
스탠포드 화이트는 미국의 상징적인 건축물들을 설계했던 미국의 유명 건축가 중 한 명 입니다. 그는 1853년에 태어나 아버지의 친구들로부터 도움을 받아, 어려서부터 빠르게 건축에 대한 커리어를 쌓기 시작했습니다. 1870년, 그는 20살이 채 되기도 전에 당대 미국의 저명한 건축가였던 핸리 홉슨 리처드슨의 밑에 들어가 견습 생활을 시작했고, 견습 생활 중 알바니에 있는 국회의사당 건설 감독과 보스턴 백 베이 지역에 있는 트리니티 교회 건설을 보조하는 등 어린 나이에 쌓기 쉽지 않은 경력을 쌓아 갔습니다.
성공을 향한 욕망이 강했던 그는 새로운 경험과 지식을 더 쌓고 싶단 생각에 리처드슨의 회사에서 나와 유럽 전역을 여행했습니다. 여행을 끝낸 뒤엔 건축가 찰스 폴렌 맥킴이 설립한 새로운 회사에 입사했고, 이듬해부턴 윌리엄 루더포드 미드까지 합세해 대호황 시대의 전설인 건축가 트리오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브루클린 박물관, 모건 도서관, 보스턴 공공 도서관, 백악관 개조 등 높은 평가를 받는 건축물들을 엄청난 속도로 설계해 나가며 빠르게 신화가 되어 갔습니다.
그들의 성공기로에 도약 발판이 되어주었던건 트리오가 결성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은 1880년 4월, 벤더 빌트 소유의 메디슨 스퀘어 가든이 무너지는 사고였습니다. 건물 붕괴 사건으로 4명이 사상자가 나왔고 많은 사람이 다쳤지만 화이트와 미드, 맥킴에게 있어선 새로운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무너진 건물을 새롭게 건축해달라는 의뢰가 그들에게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새롭게 디자인한 메디슨 스퀘어 가든은 1890년 6월 16일 대중들에게 공개되었습니다.
건물은 르네상스 양식과 이슬람 요소를 융합하고 세비야 대성당의 종탑을 오마주한 탑이 특징적으로 자리 잡은 건축물이었습니다. 그리고 탑의 꼭대기엔 사냥과 처녀를 상징하는 신 디아나 조각이 자리 잡았습니다. 대중들에게 공개된 새로운 매디슨 스퀘어 가든은 개장 당시 단지의 3분의 1만이 가용되었지만, 개장 초기 동안 약 1만 7천 명의 방문객들이 원형극장을 방문해 연주회, 발레 공연을 관람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설계한 이 호황의 건물에서 앞으로 일어날 끔찍한 사건에 대해선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 끔찍한 사건의 당사자가 바로 화이트입니다. 그의 안목과 건축 디자인 능력만큼은 나무랄 곳이 없었지만 문제는 그의 사생활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1884년 결혼했었고, 아들 로렌스까지 낳은 상태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집 외에 브라운스톤 24번 거리에 있는 집을 하나 렌트했는데, 그곳을 렌트했던 이유는 다름 아닌 외도를 통해 만나는 여성들과의 관계를 위함이었습니다.
그런 그의 비틀어진 욕망은 1901년 만난 16세 어린 여배우 이블린 네스빗을 향했습니다. 이미 47세였던 그는 네스빗의 후원가이자, 보호자를 자처하며 그녀에게 접근했습니다. 어느 정도 친근한 관계를 쌓은 때, 그녀를 자신의 비밀 장소인 브라운스톤으로 데려왔고, 그녀에게 샴페인을 권했습니다. 샴페인을 마신 네스빗은 그대로 기절했고 정신을 차린 후에는 이미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끔찍한 일을 당하고 난 후였습니다. 어린 나이에 당한 일을 제대로 대처할 지식이 없었을뿐더러, 처녀성을 잃은 여성을 향한 사회의 시선이 냉혹했던 당시의 그녀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지속적인 관계를 대가로 한 비밀유지 약속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너무 많은 짐을 짊어지고 있던 네스빗에게 매일 같이 편지와 꽃을 보내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는 남성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석탄 사업으로 막대한 재산을 쌓은 집안의 자제 해리 켄달 서 였습니다. 그의 진심 어린 고백에 네스빗은 자신이 처한 상황과 화이트와의 관계에 대해 고백했고 모든 걸 알게 되었음에도 그는 네스빗에게 정식적으로 결혼을 청했습니다.
그들이 결혼을 한 다음 해, 화이트는 그의 아들과 자신이 디자인한 매디슨 스퀘어의 옥상 극장을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날 서와 네스빗 또한 극장을 방문했고 서의 눈에 아내 네스빗에게 끝없는 고통을 선사한 화이트의 모습이 들어왔습니다. 공연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는 권총의 총구를 화이트를 향해 들었습니다. 그가 쏜 총알은 그대로 화이트의 눈을 관통했고 화이트는 그 자리에서 숨을 거뒀습니다. 현장에 있던 관중들은 잠시 동안 그것이 공연의 일부라고 생각했지만, 선명하고 붉게 흐르는 피가 사람들로 하여금 지금 이곳이 살인 현장이 되었다는 것을 인식하게 만들었습니다.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총을 쏜 서는 식어가고 있는 시신을 향해 아내에게 준 고통의 대가라며 크게 소리쳤습니다. 하지만 그의 아내를 위한 복수는 그녀를 더욱 기나긴 고통의 시간으로 빠지게 만들었습니다. 긴 법정 공방과 그들의 사생활이 세상에 밝혀지면서 언론은 뜨겁게 달아올랐습니다. 그런 와중에 화이트의 동료들은 그가 남긴 건축적 업적을 지키기 위해 그를 변호했고, 네스빗은 화이트가 자신뿐만 아니라 13세에서 15세 사이의 소녀들과 지속적으로 부적절한 관계를 맺어왔다고 추가적인 폭로를 이어갔습니다.
연일 그들에 관한 이야기가 언론에 실렸고, 그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는 사회의 따가운 시선과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그 비난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제대로 구분되지 않는 혼란스러운 상태였습니다. 화이트는 아내를 위한 처형인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사건 이후 정신이상 판정으로 정신병원에 갇히게 되었고 평소 모르핀과 코카인 등의 약물 남용 사실도 드러나며 부유층의 추악한 또 다른 면이 드러났다며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후 네스빗은 서와 이혼했고, 이 끔찍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네스빗은 두 번의 자살시도 끝에 스스로 세상에 등을 돌렸습니다.
우리가 몰랐던 비하인드스토리
일하고 뭐하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