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화재배와 면포생산 보급의 선구자

문익점

文益漸

인물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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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사망 1329 ~ 1398

1 붓두껍 전설의 허와 실

경남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는 사적 제108호 목면시배유지(木棉始培遺址), 즉 문익점정천익이 처음으로 목화를 재배한 터가 있다. 경남 산청군 신안면 신안리에는 문익점을 기리는 도천서원(道川書院)이 있다. 1461년(세조 7) 문익점을 기리는 사당(祠堂)을 세웠으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 무너진 것을 중건하여 1787년(정조 11)에 도천서원이라는 편액을 내린 것이 그 유래다. 도천서원에서는 매달 초하루 남평 문씨 문중의 제사가 거행되는데, 제사상에 목화솜을 올린다.

태조 7년(1398) 6월 중에 전 좌사의대부 문익점이 세상을 떠났다. 문익점은 갑진년에 진주에 도착하여 가져온 씨앗 반을 본 고을 정천익에게 주어 기르게 하였는데 하나만 살았다. 천익이 가을에 씨를 따니 100여 개나 되었다. 해마다 더 심어서 정미년 봄에 그 씨를 향리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심어 기르게 하였다. 중국 승려 홍원이 천익의 집에 머물며 실 뽑고 베 짜는 기술을 가르쳤는데, 천익이 그 집 여종에게 가르쳐서 베 한 필을 만드니, 마을에 전하여 10년이 못되어 온 나라에 퍼졌다. [태조실록]

원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가 강남 지방에서 3년 간 귀양살이를 한 끝에, 반출이 금지된 목화씨를 붓두껍에 몰래 숨겨 고려로 돌아왔다는 드라마틱한 이야기의 주인공. 그런 이야기로 어린이 위인전기에도 단골로 등장하는 인물. 삼우당(三憂堂) 문익점(文益漸, 1329~1398)이다. 오늘날 경남 산청군 단성면에서 태어난 문익점은 공민왕 12년(1363) 원나라로 가는 사신단에 서장관으로 뽑혀 갔다가 이듬해에 귀국했다.

‘목화씨를 붓두껍에 숨겨 왔다’는 것은 조선 후기부터 유행된 이야기이다. 고려 말, 조선 초의 기록에는 그가 목화씨를 ‘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왔다’거나 그냥 ‘얻어 갖고 왔다’라고만 되어 있다. 이덕무는 [청장관전서]의 ‘양업기’라는 글에서 상투 속에 씨앗을 숨겨왔다는 설을 전하고 있기도 하다. 붓두껍 전설은 문익점이 목화씨를 들여 온 사건을 더욱 극적으로 부각시키고픈 많은 사람들의 의도가 낳은 전설인 셈이다. 더구나 당시 원나라에서 목화가 정말로 국외 반출 금지 품목이었는지도 논란의 대상이다.

2 문익점 강남 귀양설

문익점은 ‘중국 강남 지방에서 3년 간 귀양살이’한 적이 있을까? 적어도 공식 역사 기록에 따른다면 그런 일은 없었다. 그가 원나라에 가 있을 때, 원나라는 반원(反元) 정책을 펴던 공민왕을 폐위시키고 충선왕의 셋째 아들 덕흥군을 왕으로 세우려 했다. 특히 고려 출신 기황후는 기 씨 세력을 몰아낸 공민왕을 눈엣가시로 여겼다. 덕흥군은 원나라가 내어 준 군사 1만과 함께 고려로 향했다. 원나라에 머물던 고려인들은 덕흥군을 왕으로 모시라는 압력을 받았다. 문익점을 비롯한 다수가 압력을 이기지 못했다.

그러나 덕흥군의 군사는 고려군에 패했고, 원나라는 덕흥군을 옹립하려던 뜻을 접어야 했다. 문익점이 귀국하여 고향으로 돌아간 것은 덕흥군 관련 행적 때문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낙향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큰 처벌을 받거나 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원나라에 머물던 상황에서 원나라의 압력을 이기기 어려웠다는 일종의 정상참작이 이뤄진 게 아닐까 하는 추정도 가능하다. 그는 이후 1375년(우왕 1) 다시 전의주부(典儀注簿)로 등용되었다.

문익점은 진주 강성현 사람인데 고려의 사명을 받들어 원나라에 갔다가 덕흥군에 부(附)하였다가 덕흥군이 패하므로 돌아왔는데, 목면의 종자를 얻어 와서 그 장인 정천익에게 부탁하여 심게 하였다. 거의 다 말라죽고 한 포기만 살아 3년 만에 크게 번식되었다. 씨 뽑는 기구와 실 빼는 기구도 모두 천익이 창제하였다. [고려사] 열전

문익점 강남 귀양설의 초기 근거는 태종 1년(1401) 권근이 문익점의 아들에게 벼슬을 내리자 상소하면서 ‘문익점이 강남에 들어가 목면 종자 두어 개를 얻어 싸가지고 와서’라고 언급한 부분이다.

이후 여러 글에서 ‘강남에 귀양 갔다’고 언급되면서 최종적으로는 19세기 남평 문씨 문중에서 펴낸 [삼우당실기]에 집약되어, ‘강남에 유배되어 3년 뒤 풀려나 돌아오는 길에 목화씨를 붓두껍에 넣어 가지고 귀국했다’는 오늘날까지도 널리 퍼져 있는 이야기가 완성됐다. 덕흥군 편에 섰다는 [고려사]의 기록과 달리 덕흥군 옹립에 반대하다가 귀양 간 것으로 바뀐 것이다.

3 삼국 시대에도 면직물은 생산되었다.

문익점이 목화씨를 들여오기 전까지 이 땅에는 면직물이 전혀 없었을까? 당나라 때 편찬된 역사서 [한원(翰苑)]에는 고구려가 백첩포(白疊布)라는 면직물을 생산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삼국사기] 신라 경문왕 조에는 869년 7월에 다른 여러 물품과 함께 백첩포 40필을 당나라에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2010년 7월에는 국립부여박물관이 1999년 부여 능산리 절터 출토 백제시대 직물 1점을 분석한 결과, 우리 땅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면직물임을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이러한 역사기록과 유물로 볼 때 문익점이 목화씨를 들여오기 전에도 한반도에서 면직물이 생산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문익점이 들여온 목화가 인도종이며 그전 한반도에서 만들어진 면직물의 원료는 아프리카종, 즉 초면(草綿)이었다는 설이 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목화와는 다른 원료였다는 것. 또한 삼국 시대 목화는 중앙아시아 품종이어서 우리 토양과 기후와 잘 맞지 않아 대량 재배되기는 힘들었고, 면직물도 대외 교류 등에서 소량이 사용되는 매우 귀한 직물이었다는 주장이 있다.

결국 우리 기후와 토양에 맞게 적응되어 본격적으로 목화 대량 재배와 면직물 생산이 이뤄진 것은 문익점 이후의 일이라는 뜻이 된다. 문익점이 들여 온 목화씨가 방적하기 편한 종류의 것으로 대량 생산에 적합했으리라는 추정도 가능하다. 삼국 시대 면직물 생산이 분명하다 하더라도, 한반도 목화 재배의 역사와 면직물의 역사에서 문익점이 차지하는 중요성에는 변함이 없다.

4 도입에서 정착과 보급으로 나아간 큰 공로

경남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 있는 문익점 면화 시배지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사기초사전>

문익점 이전에도 누군가 목화씨를 들여와 심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더러는 목화 재배에 성공한 사례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도입은 했을지언정 그것을 이 땅에 정착시키고 재배법과 면직물 생산기술을 널리 보급시키지는 못했던 것이다.

문익점과 정천익은 살아남은 한 그루를 다시 3년 간 가꾸어 대량 재배의 가능성을 열었다. 또한 원나라 승려 홍원의 도움을 받아가며 솜에서 씨앗을 빼는 씨아와 실을 잣는 물레를 만들어 보급했다. 문익점의 큰 공로는 목화씨를 들여온 사실 자체보다 바로 이러한 정착과 보급에 있었다.

백성들의 신산한 삶을 나타내는 ‘헐벗고 굶주린다’는 표현이 있다. 이 땅에서 목면이 일반화되기 전까지 사람들 대부분은 베옷으로 사시사철을 지내야 했다.

여름에야 통풍이 잘 되어 시원하다고 하지만, 한 겨울에도 베옷을 입고 지내야 하는 고통은 ‘헐벗은 고통’ 바로 그것이었다. 베옷 안쪽에 풀잎이나 짐승의 털을 넣기도 했지만, 삼베옷을 가지고서는 보온 효과를 보기 힘들었다. 문익점이 널리 존경 받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이렇게 ‘헐벗었던’ 백성들의 의생활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는 데에 있다.

더구나 문익점에서 시작된 목면 생산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국가 경제에 큰 기여를 했다. 일일이 손으로 실을 만들어야 하고 마를 가공하는 과정에서 남성 노동력이 많이 드는 베와 비교하면, 씨아와 물레를 사용하는 목면은 생산성이 매우 높고 여성 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었다.

목화 재배와 목면 생산을 특히 적극 장려했던 세종이 문익점을 ‘부민후(富民侯)’, 즉 백성을 풍요롭게 만든 이로 추증토록 한 것은 농가 경제를 두텁게 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한 결과이다. 문익점은 민생 향상과 국부 증진에 큰 도움이 되는 하나의 새로운 산업을 탄생시킨 인물로 존경 받았다.

5 동북아시아 무역 질서의 한 축이 되었던 면포

세종 때인 15세기 중반부터 면포는 국가 경제와 세금 체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 시기부터 면포는 마포를 대체하여 화폐와 같은 위상을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경국대전]에서도 길이 약 16미터, 폭 약 33센티미터를 한 필로 하고, 실 여든 가닥을 1승(升)으로 하여 5승포를 정식 규격 품질의 면포, 즉 정포(正布)로 정했다. 조선 전기 면포의 가치는 한 필에 쌀 두 말, 후기에는 한 필에 쌀 한 말 정도였고, 5승포는 일종의 고가 화폐, 그보다 구조가 성긴 3승포가 저가 화폐 구실을 했다.

면포는 조선의 국제 무역에서도 매우 중요한 품목이었다. 예컨대 여진의 상등 말 한 필에 면포 45필, 중등 말에는 면포 40필, 하등 말에는 면포 20필로 거래했다. 또한 일본의 은, 동, 소목(蘇木) 등과 면포를 거래했는데, 성종 때 일본에 대한 면포 수출량은 약 50만 필에 달했다. 일본에 목면을 수출하여 은을 입수한 뒤, 은을 지불하고 중국에서 비단, 도자기, 서책, 약재 등을 수입하기도 했다. 면포는 동북아시아 무역 질서에서 중요한 한 축을 담당했던 것이다.

문익점이 목화씨를 붓두껍에 넣어 몰래 들여왔다거나 강남에 귀양 갔다거나 하는 이야기의 사실 여부는, 문익점의 노력이 후대에 끼친 막대한 영향에 비교하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할 수도 있다. 초기 재배의 실패에도 좌절하지 않고 여러 해 동안 노력한 끝에 재배에 성공하고 면직물 생산 기술까지 보급한 집념과 성의. 문익점은 그러한 선구자적 노력과 집념과 성의 측면에서 위인의 반열에 들기 충분하다.

  • 발행일2011. 10.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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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표정훈 평론가, 번역가

    표정훈은 196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강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번역가, 저술가, 칼럼니스트로 활동해 왔다. 삼성경제연구소 SERI CEO 강좌, 한국예술종합학교 등에서 강의했고 한국문학번역원의 계간 리스트(List) 편집자문위원, 월간 출판저널 편집자문위원, (재)김구재단 기획위원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 <탐서주의자의 책>, <나의 천년>, <하룻밤에 읽는 삼국지>, <책은 나름의 운명을 지닌다>, <철학이란 무엇입니까?(공저)> 등이 있다.

  • 그림
    장선환 화가, 일러스트레이터

    서울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학과와 동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화가와 그림책 작가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현재 경희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http://www.fartzz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