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글 몇줄에 수천만원 후원···'붕어'의 기막힌 SNS 사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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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9.06.10. 오전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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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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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포토]
최근 유명 인터넷 커뮤니티인 ‘보배드림’을 뜨겁게 달군 사건이 있었다. 사건은 지난달 15일 ‘붕어의 질주2’라는 아이디를 쓰는 한 네티즌 A씨가 올린 글에서 시작됐다.

A씨는 ‘아내는 공황장애에 우울증이며, 두 아이의 끼니를 해결하지 못할 정도로 경제 사정이 어렵다’고 밝히며 다른 회원들에게 소액이라도 좋으니 후원을 부탁한다는 글을 올렸다. 이때까지만 해도 ‘안타깝다’는 반응은 있었지만 반향은 크지 않았다.

하지만 10일 뒤 A씨가 올린 두 번째 글로 인해 회원들의 ‘분노’와 ‘측은지심’이 폭발했다. A씨의 두 번째 게시글에 따르면 밀린 3개월치 월세와 소정의 생활비를 지원해준다는 제안을 받고 보배드림 회원 B씨를 만났는데, 정작 B씨는 A씨의 자녀들을 조롱했을 뿐만 아니라 음식물 쓰레기가 들어 있는 택배 상자를 보내며 ‘가족끼리 맛있게 나눠 드세요’라고 했다는 것이다.
인터넷 커뮤니티 '보배드림'에 올라온 '붕어의 질주2 후원 사기 혐의' 관련 글. [보배드림 캡쳐]


"후원 대신 음식물쓰레기 주더라" 알고 보니 '주작'
A씨의 두 번째 게시글은 보배드림뿐만 아니라 다른 사이트로도 퍼져 나갔고, 많은 네티즌들이 A씨의 계좌에 후원금을 보내기 시작했다. 음식물 쓰레기 택배를 보낸 B씨를 색출해야 한다는 움직임도 있었다. 약 2주간 A씨에게 모인 후원금은 약 4000만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A씨의 ‘음식물 쓰레기 택배’ 사연은 거짓으로 드러났다. 보배드림 운영진이 "A씨와 B씨의 IP주소가 일치하니 더 이상 A씨의 계좌로 후원금을 보내지 말라"고 공지한 게 계기가 됐다.

IP 주소는 온라인에서 개별 컴퓨터를 구분하는 고유번호로, 이 두 주소가 같다는 것은 A씨와 B씨가 같은 사람이 아니냐는 의심을 하게 되는 이유가 된다. A씨도 결국 해명글을 통해 ‘음식물 쓰레기 택배’ 글은 각색해서 쓴 게 맞다고 밝혔다. 하지만 어려운 집안 환경은 모두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뒤늦은 A씨의 해명을 믿는 네티즌은 거의 없었고, 현재 A씨에게 후원금을 보낸 사람들은 민·형사상 집단 소송을 준비 중이다. 소셜미디어 이용자들은 이 같은 허위 게시물을 '주작질' 또는 '주작'이라고 표현한다.

'붕어의 질주2 후원 사기' 혐의 관련 보배드림 운영진이 공지한 집단 소송 관련 글. [네이버 카페 캡쳐]
왜 '붕어'를 완전히 믿었을까
왜 네티즌들은 얼굴도 이름도 잘 몰랐던 A씨에게 작게는 만원, 많게는 수백만원을 후원했을까. A씨에게 후원하며 ‘후원금 인증’까지 할 정도로 신드롬이 일었던 이유는 뭘까.

전문가들은 A씨 글이 사람들의 공감대를 자극한 게 주효했다고 평가했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남성으로서의 공감대와 ‘가장’으로서의 정체성이 형성된 것”이라며 “다른 사람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 우리의 일’로 받아들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임운택 계명대 사회학과 교수도 “‘심정적·감성적 차원에서 같은 남성으로서의 감정이 공유된 것”이라며 “남성 가장들이 최근 매우 힘들어하고 있는데 이런 부분을 정서적으로 건드린 것”이라고 말했다.

자신보다 어려운 환경에 있는 사람이 명확하게 드러나면 돕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는 분석도 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내가 제일 억울한 줄 알았는데 나보다 훨씬 못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 점에 감동이 일어나 더 공감하게 된다”고 분석했다. 이동귀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다른 기부와 달리, 돈이 어디에 사용될지 분명하니까 오히려 더 기부가 촉진됐을 수 있다”고 말했다.

후원금이 문제 아냐…문제는 '불공정성'
'붕어의 질주2 후원 사기 혐의' 관련 후원자들이 피해자 카페를 만들어 민형사상 소송 대응에 나섰다. 9일 현재 가입 인원은 1000명이 넘는다. [네이버 카페 캡쳐]
사연에 대한 후원이 폭발적이었던 만큼, 그것이 거짓으로 드러났을 때 느끼는 대중들의 배신감도 크다. 곽금주 교수는 “사연에 감동했던 자신의 ‘감정 소비’ 심리가 강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분노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동귀 교수는 “특히 요즘 세대의 키워드가 ‘공정성’인 만큼 거짓말로 이득을 편취했다면 용서를 못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설동훈 교수도 “돈 몇 푼보다 공정성을 어긴 것에 대한 분노가 더 큰 것”이라고 말했다.

보배드림 운영진은 현재 A씨에게 이른바 ‘후원 사기’를 당한 사람들을 모아 민·형사상 소송을 준비 중이다. 온라인 게시글 등에 따르면 A씨는 후원받은 돈을 일부 네티즌들에게 돌려주는 것으로 알려졌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이제 네티즌 및 정보를 만들어내는 주체들이 온라인 공간에서도 윤리를 지키고 책임을 다하라는 요구를 하는 것”이라며 “이 과정이 반복된다면 진실에 가까운 콘텐츠가 나오는 자정작용이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사기 후원' 사례도 접수돼"
보배드림 운영진에 따르면 '붕어의 질주2' 사기 혐의 사건 외에도 다른 유사 사례들이 접수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네이버 카페 캡쳐]
보배드림 운영진의 게시글에 따르면 A씨의 일을 계기로 온라인 상에서 거짓 사연글을 올리고 후원금을 받은 다른 ‘사기 후원’ 사례도 접수되고 있다. 운영진 측은 지난 7일 “이번 사건 외에도 여러 회원님들께서 이야기하시는 유사 피해 사례 내용을 확인한 상태”라며 “해당 사안에 대해 심각성을 느끼고 법률 검토를 마친 상태이며, 이번 ‘붕어의 질주’ 사건을 우선 처리한 후 관련 입장을 정리해 안내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후연·편광현 기자 lee.hoo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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