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따라 발길따라

이유미의 우리꽃 산책Ⅰ[ 1회~25회]

프로필

2016. 11. 20. 22:30

이웃추가

이유미의 우리꽃 산책Ⅰ[ 1회~25회]


1. 금강초롱-그 고운 이름을 불러주세요

 


곱디고운 보랏빛 초롱을 닮은 꽃을 피우는 금강초롱


무더위가 한풀 꺾인 이즈음 깊은 산, 맑은 곳에 가면 만날 수 있는 곱고 귀한 우리 꽃이 있습니다. 바로 금강초롱입니다. 강원도 산지나 경기도 명지산, 경북 황악산 같은 높고 깊은 산에 가면 만날 수 있는 꽃입니다. 바위틈에 단단히 뿌리를 박고 서서 보랏빛 초롱을 닮은 꽃을 피우는 금강초롱을 보면 감히 누가 그 흉내를 내볼 생각이나 할 수 있을까요. 금강초롱을 가만히 들여다보노라면 이 식물의 역사와 의미를 구태여 따져보지 않더라도 짧은 감탄과 함께 마음을 빼앗기게 됩니다.  

‘우리 꽃 산책’에 첫 번째 꽃 친구로 금강초롱을 소개하는 것은 이 꽃의 특별한 아름다움이나 꽃이 피는 시기가 바로 이즈음부터라는 점도 있지만, 무엇보다 우리 꽃이라는 이름에 가장 걸맞은 식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자생 식물이 4000여 종 있답니다. 그 가운데 전 세계에서 오직 우리나라에서만 자라는, 그러니까 이 땅에서 사라지면 지구에서 멸종하게 되는 식물이 300종인데 이들을 특별히 ‘특산식물’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금강초롱은 여기에 그치지 않지요. 식물 집안(속) 자체가 통째로 ‘특산 집안’인 것은 통틀어 일곱 개밖에 없는데, 그중 하나가 금강초롱 집안입니다. 게다가 분포범위 자체가 좁으니 세계적으로 보면 꼭 보전해야 하는 희귀식물이지요.  

금강초롱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밤에 불을 밝히는 초롱을 닮은 꽃이 금강산에서 처음 발견됐기 때문입니다. 꽃을 한번 보면 그 고운 이름이 딱 어울린다는 것을 절로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이름은 이렇게 고운데 세계 사람들이 공통으로 쓰는 학명에는 아픔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이 식물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나카이라고 하는 일본인 식물학자입니다. 그가 자신을 촉탁교수로 임명하고 우리나라 식물을 조사하도록 지원해준 하나부사에게 보은의 뜻으로 학명을 하나부사야 아시아티카 나카이(Hanabusaya asiatica Nakai)라고 정해버린 것입니다.

하나부사는 한일병합의 주역이자 조선총독부 초대 공사를 지낸 인물이니 참으로 치욕적인 사연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도 학명이란 것은 세계적인 약속이니만큼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지요. 이렇게 풀 한 포기에도 나라 잃은 아픔의 역사가 담겨 있답니다. 광복절이 있는 8월에 꼭 기억해봐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 땅 우리 꽃에 대한 사랑의 첫걸음은 지금 피고 지고를 거듭할 이 땅의 금강초롱을 한번 제대로 알아보고, 이름을 불러주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
이유미 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



금강초롱의 전설


옛날 금강산 자락에 다정한 오누이 둘이 살았는데, 누나의 병을 치료할 약초를 구하기 위해 달나라로 홀로 떠난 남동생이 돌아오지 않자, 누나는 아픈 몸을 추슬러서 간신히 초롱불을 들고 밤에 찾아 나섰다가 엎어져 변을 당했는데, 이 소녀가 들고 있던 초롱불이 꽃으로 환생되었다는 애절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금강초롱의 학명이 일본인 명으로 된 이유


경기도 가평 북쪽의 그늘진 산속에서 8~9월에 꽃을 피우는 한반도의 고유식물이다. 하지만 세계 식물학계에서 통용되는 금강초롱꽃의 학명은 ‘하나부사야 아시아티카 나카이(Hanabusaya asiatica Nakai)’다. 일제 강점기 식물학자 나카이 다케노신(中井猛之進·1882~1952)이 1911년 금강초롱꽃을 새로운 속(屬)으로 명명하면서 자신에게 조선식물 연구를 제안한 초대 주조선 일본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1842~1917)를 기리기 위해 붙인 이름이다

식물의 학명은 이를 처음 발견하고 연구한 사람이 붙인다. 국제식물명명규약(International Code of Botanical Nomenclature·ICBN)에 기초해 속명(屬名)과 종소명(種小名·속 내에서 그 종이 갖는 특징), 명명자를 라틴어 형식으로 적는다. 금강초롱의 경우 ‘하나부사야’가 속명이고, 아시아에서 주로 자란다는 의미에서 ‘아시아티카’라는 종소명이 붙었다.

조선총독부의 촉탁직으로 조선식물 연구를 했던 나카이는 ‘금강초롱꽃속’을 비롯해 ‘금강인가목속(Pentactina·1917)’, ‘미선나무속(Abeliophyllum·1919)’ 등 다수의 한국 특산속 식물을 발견했다. 그 중 몇몇 식물에 일본식 학명을 붙였다. ‘하나부사’가 된 금강초롱을 비롯해 조선화관(朝鮮花菅)·평양지모(平壤知母)라고 불리는 꽃의 학명(Terauchia anemarrhenaefolia Nakai)에는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1952~1919)의 이름이 올라 있다. 울릉도가 원산지인 섬초롱꽃의 학명은 ‘캄파눌라 다케시마나 나카이(Campanula takesimana Nakai)’다.  [출처] : 중앙일보] '하나부사'가 아닌 '금강초롱'으로 …



2. 곰취- 산나물의 제왕 노란 꽃도 황홀


 


“봄도 아닌데 웬 곰취!”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곰취 하면 아이 손바닥막한 잎이 떠오릅니다. 곰취는 주로 봄에 난 싱싱한 새 잎을 쌈으로 먹는 대표적인 산나물입니다. 쌉쌀하면서도 오래도록 입안에 남는 향기가 일품이죠. 그래서 사람들은 ‘산나물의 제왕’이라는 거창한 별명도 붙여놓았답니다.

잎이 조금 억세지기 시작하면 호박잎처럼 끓는 물에 살짝 데쳐 쌈을 싸먹거나 초고추장을 찍어먹기도 합니다. 예전 지리산 산골마을에서 억세진 곰취 잎으로 간장·된장 장아찌를 담근 것을 먹은 적이 있는데 입안에 맴도는 향기며 그 맛이 얼마나 일품이던지, 지금도 기억에 남습니다.  

워낙 인기 있는 산나물이다보니 요즘은 재배도 하는데, 산지마다 조금씩 맛과 향이 달라 서로 제 고장 이름을 붙여 부르곤 합니다.  

이렇게 누구나 알아보는 곰취 잎. 하지만 정작 곰취 꽃을 알아보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누가 뭐래도 식물이 가장 주목받는 중요한 기관은 바로 꽃인데도 우리는 그동안 먹는 데만 눈이 어두워 진짜 곰취 모습을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곰취에게도 꽃이 있느냐고 묻고 싶다면 정말 식물에게 미안해해야 합니다. 자연에서 자라는 모든 고등식물은 당연히 꽃이 핍니다. 곰취 꽃은 여름이 서서히 물러나고 저만치 가을 기운이 조금씩 느껴지기 시작하는 바로 이즈음 하나둘 피기 시작해 초가을까지 만나볼 수 있는데, 정말 놀랍도록 곱게 핍니다. 꽃을 보려고 곰취를 키워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만큼 말이죠.  

곰취는 국화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입니다. 자라는 곳도 그 범위가 매우 넓어 그야말로 한라에서 백두까지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자랍니다. 흥미롭게도 제주 한라산에도 곰취가 많은 편인데 그곳 분들은 곰취를 잘 먹지 않는답니다. 아마도 산에 기대어 살기보다 바다에 의지해 살아온 까닭에 해산물 쪽 먹을거리가 더 발달했기 때문인 듯합니다.

곰취는 다 자라면 1m가 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어른 허벅지 높이 정도까지 자랍니다. 심장과 신장의 중간쯤 되는 모양을 가진 잎이 뿌리 주변에 크게 여러 장 달리고 줄기를 따라 작은 잎이 달리죠. 꽃은 노랗게 핍니다. 국화과 식물이어서 우리가 꽃잎이라고 생각하는 그 하나하나가 사실 각각의 꽃 한 송이로, 이러한 꽃이 모여 작은 꽃차례를 만들고 다시 원추형 꽃차례를 이룹니다.  

혹 집에 마당이 있다면 낙엽 지는 나무 사이 햇살 드는 곳에 곰취를 심어보세요. 봄에는 잎을 따서 즐기고 늦여름부터는 꽃을 즐길 수 있어 그야말로 일거양득입니다.


 


그렇다면 왜 ‘곰취’라는 이름이 붙었을까요? 곰이 나타나는 깊은 산에서 자라기 때문일까요? 한자로는 웅소(熊蘇)라고 하는데, 어느 이름이 먼저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 밖에 잎 모양이 말발굽과 비슷하다 해서 마제엽(馬蹄葉)이라고도 합니다. 곰취 뿌리는 호로칠(胡蘆七)이라고 부르며 약으로 쓰기도 하죠. 한방에서는 폐를 튼튼히 하고 가래를 삭이는 효능이 있어 기침, 천식, 감기 치료제로 사용합니다.
 
비가 그친 뒤, 하루하루 점점 더 맑고 높아지는 하늘을 배경으로 곰취 꽃이 노랗게 피기 시작하면 가을이 멀지 않았다는 뜻이랍니다.

[이유미 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

곰취의 효능


변비 - 섬유소가 매우 풍부하게 함유되어있는 곰취는 변비치료는 물론 예방에도 도움을 준다고한다

항암효과 - 베타카로틴과 비타민C가 다량 함유되어있는 봄의 대표적인 나물로 항암효과가 있다고한다

천식.기침 - 가래를 삭히고 폐를 튼튼하게 해주는 효능이있어 기침이나 천식,감기등에 효능이있다고한다

노화방지 - 항산화효과가있는 비타민C와 베타카로틴을 함유하고있어 노화를 방지에 효과적이라고 한다 


곰취나물 만드는 법 (1인분 312칼로리 )


1) 우선 조리하기전 말린 취나물은 물에 담가 불려주세요

2) 그런다음 불려진 취나물을 냄비에 넣고 취나물이 잠길 만큼 물을 부어준후 끓여주세요

3) 그러다 끓어오르면 불을 약한불로 줄여주신 후 30~40분간 더 삶아주세요 그런다음에 곰취를 물에 2~3회

     깨끗하게 헹궈주신 후 6시간 도 물에 담가 두시면 된답니다.

4) 그렇게 6시간동안 물에 담가두었던 곰취의 물기를 꽉 짜주세요, 물기를 짜기전 곰취의 억쎈 부분을 제거.

5) 물기를 뺀 곰취나물에 재래간장과 다진마늘 ,다진파를 넣어무쳐주세요



3. 노랑어리연꽃- 연못의 처녀, 한약재로도 좋아라


 



평생을 풀이나 나무를 찾아 산과 들을 누비는 저 같은 식물학자들은 책상머리에 앉아 있다 보면 이 땅 이곳저곳에서 피고 지고 있을, 이런저런 꽃 생각으로 마음이 절로 간절해지곤 합니다. 막상 여름이라는 계절을 보내려 하니 물가에서 자라는 수생식물 꽃구경을 놓쳐버린 것이 가장 아쉽네요.
 
우리는 흔히 잔잔한 물 위에 피어나는 아름다운 꽃 하면 제일 먼저 수련이나 연꽃을 떠올리지요. ‘물의 요정’이란 별명으로 숱한 노래와 그림에 등장하는 수련이나, 진흙탕에서 피어나는 탐스럽고 고결한 연꽃은 모두 참으로 곱습니다. 게다가 꽃에 담긴 이야기나 쓰임새도 무궁한 좋은 식물들이지요. 하지만 이 두 식물은 모두 원산지가 우리나라가 아니랍니다.  

자생식물이 아니라는 사실에 너무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수련이나 연꽃의 화려함에는 조금 못 미쳐도, 보면 볼수록 매력 넘치는 고운 우리의 수생식물이 여럿 있으니까요. 물가에서 자라는 진분홍빛 털부처꽃이나 보랏빛 물옥잠 꽃도 참 예쁘고, 꽃잎을 빼놓고는 잎이며 줄기며 꽃받침이며 온통 가시가 무성해 신비롭고 개성 넘치는 가시연꽃도 있답니다.

우리의 눈길을 기다리는 멋진 자생식물 중에서도 노랑어리연꽃의 아름다움은 특별합니다. 주로 중부 이남 지역의 물에서 나는 여러해살이풀입니다. 수염 같은 뿌리가 물속 땅에 자리 잡고, 가늘고 긴 줄기의 마디에 잎이 1~3장 달리며, 잎자루가 길어서 물 위로 떠오르지요.

지름이 5~10cm 되는 방패형 잎은 윤기로 반질거리고, 꽃은 여름에 핍니다. 초여름에 시작해 여름이 가도록 오래오래 볼 수 있어 참 좋습니다. 꽃 지름은 3~4cm 되는데, 무성하고도 고요한 여름 연못에 잔잔한 꽃송이들이 이어지듯 펼쳐져 피어 있는 모습은 그 어떤 풍경보다도 장관이랍니다.  

노랑어리연꽃의 꽃잎들을 가까이 들여다보면 더욱 멋져요. 노란색 꽃잎 가장자리에 마치 레이스처럼 가느다란 털이 달려 있답니다. 꽃이 노란색이 아닌 흰빛이고, 크기가 조금 작은 꽃들을 보셨다면 그건 그냥 어리연꽃이랍니다.  

노랑어리연꽃은 먼저 한방에서 이용합니다. 생약명은 행채( 菜)라고 하며 잎, 줄기, 뿌리를 모두 쓰지요. 간과 방광에 이롭고 해열, 이뇨, 해독에 효능이 있다고 알려져 임질, 열과 한기를 조절하는 여러 증상에 처방하지요. 부스럼이나 종기의 경우 생잎을 찧어 상처 난 부위에 붙인다고 하네요.  

최근에는 물이 있는 공간이 도시에서도 매우 중요한 생태학적 공간으로 여겨지면서 노랑어리연꽃 같은 우리 수생식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널따란 연못에 수련 대신 심어 키우면 훨씬 은은한 멋을 느낄 수 있고, 또 돌확 또는 옹기 같은 곳에 심어 실내나 정원 한쪽 공간에 놓고 보는 것도 유행이지요.  

 


눈여겨 찾아보면 주변의 작고 오래된 저수지 같은 곳에서 자라는 노랑어리연꽃이나 어리연꽃을 만날 수 있는데, 그렇게 만나는 꽃들을 바라보는 일은 분명 행복입니다. 이런 행운은 마음을 열고 찾아보는 일부터 시작하는 것이 먼저지요. 쉽게는 제가 일하는 국립수목원(광릉) 수생식물원에 찾아오면 어김없이 있습니다.  

한번 이 꽃들을 바라보고 나면 이토록 좋은 우리 수생식물 자원을 두고 왜 그동안 외래식물만 곁에 두려 했는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곤 하지요. 게다가 이즈음에는 수목원에서 전국(일부는 전 세계)에 있는 귀하고 보전해야 할 수생식물을 모아 전시회도 여니 한번 들러보세요. 잔잔한 수면의 꽃들과 함께 걸으면서 가는 여름을 갈무리해보기를 권합니다.  [이유미 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



4. 동자꽃-한여름 뜨거움 간직한 ‘주홍빛 하트’




바람도 비도 지나가고 선뜩선뜩 가을 기운이 느껴집니다. 시간의 흐름이 빠르다는 걸 절실히 느끼는 와중에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나이가 들고 있다는 증거겠지요. 저는 거기에 더해 올여름 놓치고 만 꽃구경 생각을 하면 아쉬움이 더욱 절실해지곤 합니다.  

여름 꽃에 대한 그 미련을 주홍빛 동자꽃을 보며 달래고 있습니다. 오늘 제가 일하는 광릉숲길을 거닐다 한여름 내내 피었을 이 꽃이 아직도 선명한 꽃빛을 남기고 있어 얼마나 반가웠던지요.  

동자꽃은 먼저 이름이 참 특이하지요? 겨울 채비를 위해 마을로 내려간 스님이 눈이 쌓여 돌아오지 못한다는 사실을 모른 채, 스님이 내려간 언덕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앉아 기다리다 그대로 얼어 죽은 동자승을 묻어준 자리에서 한여름 그의 얼굴처럼 동그랗고 발그레한 꽃을 피운 식물이 돋아나 동자꽃이라 이름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주홍빛이 워낙 선명한 꽃은 짙어질 대로 짙어진 초록을 배경 삼아 매우 인상적입니다. 석죽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인데 우리나라에는 제주도나 울릉도 같은 섬 지방을 제외하고는 어느 산에서나 그리 드물지 않게 만날 수 있습니다. 키는 보통 무릎 높이 정도지만 잘 자라면 허리까지 오기도 합니다. 잎은 줄기에 잎자루도 없이 마주나는 타원형이고, 꽃은 지름이 손가락 두 마디쯤 되며, 꽃잎을 5장 가진 갈래꽃이지만 꽃받침이 통 모양으로 길게 달려 통꽃으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동자꽃은 전추라화(剪秋羅花), 천열전추라(淺裂剪秋羅) 등 한자 이름으로도 불리고, 학명은 리크니스 코그나타(Lychnis cognata)입니다. 속명은 ‘붓꽃’이라는 뜻의 희랍어 리크노스(lychnos)에서 유래했는데, 꽃이 그만큼 아름답기 때문일 것입니다. 영어로는 ‘코리안 리크니스(Korean lychnis)’라고 부르지요.  

  


어디에 쓰이냐고요? 아무래도 관상용으로 어울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특히 다소 습기가 많은 숲 가장자리나 나무 심은 주변에 다른 식물과 함께 식재하면 아주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만들 수 있지요. 야생화는 꽃이 아름다워 심어 놓아도 나무 그늘이 지면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동자꽃은 반그늘이 적당합니다.
 
꽃잎을 한번 잘 들여다보세요. 꽃잎 끝 쪽이 오목하게 들어가 하트 모양을 하고 있지 않나요? 붉은 심장 모양으로요. 그것도 5개씩이나. 이 작고 소박한 숲 속의 꽃송이들이 얼마나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지 알 듯도 합니다.

그 붉은빛의 뜨거움은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라보는 이를 따뜻하게 만드는 주홍빛이어서 참 좋습니다. 우리 꽃의 아름다움이 바로 그런 것 같아요. 평범한 듯하지만 하나하나 마음을 담아서 보면 새록새록 특별한 아름다움이 깊이 들어 있고, 그 안에는 정겨움이 숨겨져 있는…. 

지나가는 여름에 가졌던 치기 어린 뜨거움이 남아 있거든 동자꽃 주홍빛 꽃잎에 담긴 그 빛처럼 아름답고 의미 있게 갈무리하길 바랍니다. 
[이유미 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



5. 독도의 술패랭이꽃-장하다, 씩씩하고 아름다운 네 모습



독도에 다녀왔습니다. 식물을 조사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래전부터 언제 한번 제대로 조사해보려고 마음먹고 있었습니다. 최근 몇 년 사이 갑작스레 토종 식물에 관심이 고조되어 여기저기 다니고 조사하는 일이 많다 보니 차일피일 탐방을 미루고 있었습니다. 막상 독도를 찾아가 보니 남들이 손을 놓을 때 찾아가리라 괜한 고집을 피웠던 것이 후회스러웠습니다.

독도는 노랫말처럼 동해에 떠 있는 외로운 섬이었습니다. 독도에 사는 여러 생물에 대한 보고서나 논문을 보았고 수많은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저 막연히 깎아지듯 서 있는 절벽 같은 바위 사이에 식물이 드문드문 가까스로 살고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독도에는 생각보다 식물이 많았습니다. 큰 나무는 없어도 흙이 앉은 자리나 바위틈 사이사이 강인한 생명들이 회색 돌섬을 푸르게 덮고 있었습니다.  

독도에서만 자라는 식물은 없지만, 50여 종류의 식물 면면을 보니 문득 독도에 산다고 해서 특별히 외로운 존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독도는 정말 우리 토종 식물이 사는 우리 땅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독도 식물은 울릉도와 가까운 섬의 특성을 그대로 나타내듯 섬괴불나무, 섬제비쑥 등이 서식하며 육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사철나무, 바랭이, 털쇠무릎, 억새 같은 식물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조금 일찍 찾아갔다면 노란색 땅채송화와 섬기린초가 아름다웠을 것 같고, 조금 늦게 갔다면 가을이 깊어가면서 절벽 사이 보라색 해국이 좋을 것 같았습니다.

지금은 육지 들판과 마찬가지로 박주가리가 한창 꽃을 피우고 있었고, 그 사이사이 술패랭이꽃이 여름의 끝을 잡고 바닷바람에 몸을 맡기고 있었습니다.

오늘 보여드리고 싶은 꽃은 바로 술패랭이꽃입니다. 술패랭이꽃은 석죽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입니다. 술패랭이꽃을 모르신다면 혹시 패랭이꽃은 아시나요. 패랭이꽃은 한국산 야생 카네이션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술패랭이꽃은 패랭이꽃과 자매 식물이지만 꽃빛이 연분홍이고 이름에 나타나듯 꽃 끝이 마치 술처럼 잘면서도 길게 갈라져 있습니다. 꽃빛이 곱고, 분백색이 나는 줄기는 연약해 보이지만 강인하고 아름답습니다. 술패랭이꽃은 흔치는 않지만 전국에 분포합니다.

 패랭이꽃 종류는 보통 석죽(石竹)이라고 부릅니다. 마디가 있고, 그 마디를 서로 마주보고 감싸며 2장씩 달리는 잎이 대나무 잎을 닮았습니다.

술패랭이꽃은 바위산 같은 척박한 곳에서도 자리 잡고 비바람 혹은 뜨거운 햇살 속에서도 잘 자랍니다. 꽃이 피면 오래오래 볼 수 있으니 집 안에서 키우기 좋은 최고의 식물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집 안 식물을 통틀어 구맥(瞿麥)이라 부르며 생약명으로 이용하기도 하죠.




술패랭이꽃이 자라는 독도에 다녀오니 관념 속 독도가 어느새 친근한 우리 섬이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이 땅 어디에선가 술패랭이꽃을 만난다면 ‘지금 독도에도 한창 술패랭이꽃이 피었겠구나’ 하고 한 번쯤 기억해주셨으면 합니다.  [이유미 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 ]



6. 물봉선화- 손대면 톡… 날 건드리지 마세요!




‘손대면 톡 터지는’ 봉선화는 참 친근한 꽃입니다. 여름날 손톱에 곱게 물들이는 봉선화, 울 밑에 서서 고향을 떠오르게 만드는 봉선화는 알고 보면 우리나라에서 살아온 역사가 그리 오래된 식물이 아닙니다. 고향이 인도인 식물이라서 섭섭하다고요? 그 대신 우리 땅에는 독특한 자태로 피어 늦여름 숲을 아름답게 만들고 손대면 톡 터질 것만 같은 우리 꽃 물봉선화가 있습니다.
 
물봉선화는 사람에 따라서 야봉선, 물봉숭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진분홍 꽃이 피는 물봉선화 말고도 노란 꽃이 피는 노랑물봉선화, 흰 꽃이 피는 흰물봉선화가 있답니다. 봉숭아 혹은 봉선화라고 부르는 이 꽃들은 모두 한집안 식구이지요. 이를 통칭하는 집안 이름은 임페티언스(Impatiens)로 ‘참지 못하다’라는 뜻입니다. 바로 손대면 톡 터져버리는 열매 특징을 따서 붙인 이름인데, 그래서 꽃말도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이지요.

한여름 서서히 꽃을 피우기 시작하는 물봉선화는 낮은 개울가, 자작한 물기가 남은 숲길, 혹은 깊은 산골짝 외진 물가에 자리 잡은 뒤 여름이 다 가도록 신비로운 꽃 모양새로 지나가는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한풀 죽은 초록 숲가에 피는 데다 그 근처에는 늘 물이 흘러 뜨겁고 무거웠던 여름을 잔잔히 가라앉혀 주는 듯한 느낌이 든답니다.

포기가 워낙 커서 여러해살이풀 같지만 알고 보면 보기 드문 한해살이풀입니다. 다 자라면 키가 성인 무릎보다 좀 더 커지는 물봉선화는 줄기에 볼록한 마디가 있고, 잎은 끝이 뾰족하며, 가장자리에는 톱니가 나 있지요.  

숲 속에서 그저 평범하게 커나가던 물봉선화는 꽃이 피면서 단연 돋보이는 존재로 부상하는데, 가까이에서 보면 더욱 놀랍습니다. 통꽃 모양의 물봉선화 꽃은 앞쪽은 벌어진 여인 입술처럼 나뉘는데, 위쪽은 작고 아래쪽은 넓은 꽃잎을 가지지요. 그 벌어진 사이로 흰색과 노란빛이 어우러진 꽃잎 속살이 드러나고 자주색 점까지 점점이 박혀 더 아름답습니다. 벌어진 꽃잎의 반대쪽은 깔때기 끝처럼 한데로 모여서는 카이저수염처럼 동그랗게 말리는데, 그 모습 또한 아주 귀엽답니다.  

봉선화는 손톱 등을 물들일 때 사용하는데, 물봉선화는 어떨까요. 유사한 식물은 서로 성분이 비슷하므로 물론 물들이기가 가능합니다. 식물체 전체를 염료로 이용했다고 하지요. 하지만 봉선화처럼 손톱에 물이 들 만큼 강력한 염료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한방에서는 생약명으로 야봉선(野鳳仙), 좌나초(座拏草), 가봉선(假鳳仙)이라고 부르며 잎과 줄기, 때로는 뿌리를 약으로 썼답니다. 줄기는 해독과 소독 작용이 있어 종기를 치료하거나 뱀에 물렸을 때 사용하고, 강장효과를 지니는 뿌리는 멍든 피부를 푸는 데도 쓴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봄에 어린순을 나물로 무쳐 먹기도 하지만 유독성분이 있어 충분히 우려낸 다음 먹어야 합니다. 그런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먹을 만큼 특별한 맛은 아니므로 먹는 것은 포기하는 편이 더 낫습니다.   



그 대신 습지에서 잘 자라는 특징 때문에 최근 조경용으로 관심을 모읍니다. 요즘 생태적 장소, 예를 들어 습지식물원이나 정원 등 식물을 심는 공간에 물을 끌어들임으로써 다양한 수서곤충을 비롯한 여러 생태적 조건을 조성하는 시도가 많이 이뤄지는데, 이때 꼭 필요한 소재가 바로 물봉선화랍니다. 도랑 옆처럼 물이 흐르는 곳에도 좋지요. 여름 숲가가 아름다운 이유는 색색이 무리지어 피는 물봉선화 식구가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글 [이유미 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



7. 참취-나물뿐 아니라 흰 꽃도 일품


 


일주일 만에 숲에 나가니 가을빛이 완연합니다. 성큼성큼 가을이 다가오고 있음을 절로 알겠더군요. 아직은 초록이지만 그 때깔은 한풀 죽어 은근함이 깊어지고, 가지 끝에서는 성급한 나뭇잎 몇 장이 노랗게 혹은 붉게 물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숲가에 참취 꽃이 한창입니다. 참취 꽃은 흰빛이지만 한여름에 어울리는 투명한 흰빛이 아니라 딱 지금의 가을빛에 잘 스며드는 그윽한 흰빛이어서 마음에 더욱 애잔하게 와 닿습니다.  

참취라고 하니 꽃이라기보다 나물이라는 생각이 든다고요? 사실 맞는 말이기도 합니다. 주로 가을에 꽃이 피는 국화과 식물 중에는 참취를 비롯해 수리취, 곰취, 서덜취 등 이름에 ‘취’라는 글자가 들어가는 풀이 여럿이고, 이들은 각각 나름의 맛을 지녀 나물로 쓰이는 경우가 많죠.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그래서 그냥 ‘취나물’이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참취입니다. 혹시 ‘나물에도 꽃이 피나?’ 하는 의문이 든다면 정말 식물들에게 크게 결례하는 것입니다. 고등식물은 모두 꽃이 피고, 그 식물의 잎이나 뿌리, 줄기를 우리가 나물로 무쳐 먹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이 맛있고 향기로운 취나물의 주인공 참취가 더운 여름을 이겨내고 피워낸 꽃들을 한번 보세요. 얼마나 순결하고 기품 있는지 말입니다.

참취는 우리나라 산야에서 자라는 여러해살이풀입니다. 사람들은 봄마다 열심히 이 식물의 잎이며 줄기를 뜯어 가지만 그래도 왕성한 생명력으로 살아남은 줄기들이 자라 여름 끝 혹은 가을 초입에 하얀 꽃송이를 피워내죠. 크지도 작지도 않은 꽃송이(실제로는 여러 꽃이 머리 모양으로 둥글게 달리는 꽃차례)들이 갈라진 줄기마다 달려 아름다움을 뽐냅니다. 나물로 쓰이면서도 이렇게 고운 모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참 인상적입니다. 대부분 한쪽으로 치우친 우리 삶과 대조적인 모습이지 않나요?  

참취는 정상적인 조건에서 제대로 크면 1m 넘게 자랍니다. 우리가 나물로 뜯어먹는 잎은 줄기가 길게 올라오기 전 뿌리 주변에서 나는 근생엽입니다. 심장 모양으로 생겼죠. 이 잎들은 꽃이 필 때쯤 없어진답니다. 줄기에 달리는 잎은 좀 달라서 더 작은데, 밑부분의 잎은 잎자루가 길며 날개가 있어요. 모양도 달걀 같고요. 그러니 먹는 잎이 날 때의 참취는 잘 알아도 꽃 필 때의 참취는 모르는 이가 많답니다.  

참취는 당연히 나물로 쓰일 때가 최고죠. 대표적인 묵나물, 즉 삶아서 말려뒀다가 두고두고 먹는 나물입니다. 정월 대보름에 부럼과 함께 먹는 취나물을 기억하시죠? 봄에 생잎을 먹기도 하지만 쓴맛이 있고 향취가 너무 강해 봄에 먹으려면 일정한 작업을 거쳐야 합니다.

줄기가 올라올 무렵, 순을 잘라 소금 넣은 끓는 물에 데쳐 잘 헹군 뒤 연한 부분을 골라 나물로 무쳐 먹기도 하고, 고기와 깨를 넣어 볶은 밥을 초밥처럼 싸서 먹어도 특별한 맛을 즐길 수 있습니다. 참취는 또 약으로도 씁니다. 특히 머리가 아플 때 말려둔 참취를 달여 먹는다고 하네요.  

제가 권하고 싶은 것은 마당 한켠에 야생화로 흐드러진 참취 꽃입니다. 서로 어우러져 한껏 피어 있으면 현란하지 않아도 풍성하고 깨끗하며 싱그럽죠. 텃밭처럼 만들어 봄에는 어린순을 따서 나물로 즐기고, 몇 포기는 남겨 가을 들꽃으로 즐기는 것도 향기로운 삶이지 않을까요.    [이유미 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 ]



8. 두메부추-탐스러운 연보라꽃 마당에 꼭 심고 싶어


 


 

꽃으로 치면 요즘이 1년 중 가장 좋은 때가 아닐까 싶습니다. 새싹이 삐죽삐죽 올라오고 아기자기하면서도 화려한 꽃이 가득한 봄도 좋지만, 서늘한 가을바람 한 자락에 은은한 들국화 향이 섞이는 이즈음도 참 좋습니다.
 
무성한 초록빛도 한풀 죽고, 하나 둘씩 단풍 들고 낙엽 져서 식물마다 깊이가 더해가는 사이에 피어나는 가을꽃들은 꽃빛이며 향기가 기품 있고 그윽합니다. 게다가 하나 둘씩 저마다 열매 맺는 결실의 계절이니 풍성하기가 이를 데 없죠.

이즈음에도 지난 여름 흔적을 이어가는 꽃이 있는데 바로 두메부추입니다. 이름에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죠. 먼저 사는 곳은 깊고 깊은 울릉도 두메산골입니다. 지금처럼 개발되기 전인 지난 시절 아주 외로운 섬이던 울릉도 바닷가 절벽에서 바다를 향해 피어 있던 두메부추를 처음 보던 날, 그 쓸쓸하고도 아름답던 풍광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울릉도에선 흔히 볼 수 있으며, 강원도 바닷가나 북부 지방에서도 자랍니다. 하지만 워낙 장점이 많은 식물이라 이젠 식물원이나 공원 등 우리 꽃을 심은 곳이라면 어디든 퍼져 있어 더는 외딴 곳의 외로운 식물이 아니랍니다.  

두메부추는 부추와 같은 집안 식물로 백합과에 속합니다. 파나 부추 꽃처럼 둥근 꽃차례를 가졌는데, 꽃이 많이 달리는 꽃송이의 연보라빛이 무척 고와 쉽게 마음을 빼앗기고 맙니다.

여러해살이풀이며 다 자라면 성인 무릎 높이쯤 됩니다. 꽃은 둥글게, 우산살처럼 일정한 길이의 꽃자루가 달려 마치 작은 공 같습니다. 지역이나 햇볕, 땅 조건에 따라 색감이 다소 달라지기는 하지만 연보라색, 연팥죽색, 분홍색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런 꽃들이 무리 지어 피어 있으면 단박에 아름다운 정원이 됩니다. 꽃이 오래가는 것도 장점이고, 이렇게 꽃이 가득하면 어디선가 나비며 벌이 찾아 들어와 뒤늦은 꽃대궐을 이룬답니다.  

부추처럼 먹을 수 있을지도 궁금하죠? 두메부추 잎은 아주 두텁고 육질이 풍부해 특별한 기호식품, 나아가 건강식품이 될 수 있습니다. 부추가 몸에 아주 좋은 식물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졌는데, 거기에 알로에의 끈적한 젤라틴 성분 같은 것까지 많이 나오는 두메부추를 보면 누구나 ‘아! 좋은 식품으로 개발될 가능성이 있겠구나’ 하고 느낄 수 있을 정도입니다.

또 잎새뿐 아니라 쪽파 뿌리처럼 생긴 인경 역시 맵싸하고도 신선한 맛이 좋죠. 그래서 야생화를 키우는 이들은 마당 한켠에 두메부추를 심어두고 꽃을 주로 보지만, 때론 쌈을 싸먹을 때 쪽파같이 생긴 두메부추 몇 포기를 뽑아 맵싸한 맛을 즐기곤 한답니다.

한방에서는 두메부추는 물론 같은 집안 식물인 산부추, 참산부추를 모두 혼용합니다. 생약명은 ‘산구’이며, 이들을 통칭하는 알리움(Allium)속 식물들에 혼용돼 쓰는 용어로는 ‘야생하는 마늘’이라는 뜻의 야산(野蒜), 혹은 ‘작은 마늘’이라는 뜻의 소산(小蒜)이 있습니다. 잎과 줄기는 특히 비위가 약해 음식을 잘 못 들고 수척해지며 소변을 잘 못 보는 노인에게 좋답니다.  

두메부추는 ‘마당이 생기면 꼭 심어야지’하고 꼽아둔 식물 가운데 하나입니다. 저와 같은 생각을 가진 분이라면, 야생 식물을 캐는 것은 절대 안 되니 하나둘 꽃이 질 무렵 까만 씨앗 몇 알을 잘 챙겨두길 권합니다.   [이유미 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



9. 배초향-보라색 꽃송이… 방아잎, 맞습니다



숲에서 식물을 만나는 방법은 여러 개가 있습니다. 눈으로 보고, 코로 향기를 느끼며, 감촉으로 인지하기도 하고 때론 미각으로 알기도 하지요. 가을이 되면서 눈은 이미 가지가지 물드는 단풍 빛과 들국화들의 향연으로 황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덧붙여 올해는 유독 향기가 마음을 지극히 자극합니다. 봄철 벌과 나비를 유혹하는 감각적인 꽃향기가 아니라, 낙엽이 지면서 구수하고도 달콤한 향기가 나지요. 특히 산국이나 감국 같은 국화과 식물이 내는 향기는 더없이 깊고 그윽합니다. 매일 숲길을, 혹은 수목원 길을 산책하며 향기에 취하면 마음이 가을처럼 깊어집니다.  

배초향은 향기와 빛깔에 맛도 어우러진 식물입니다. 먼저 꽃은 조금 연한 보랏빛입니다. 가을철 보랏빛 꽃은 용담에서부터 쑥부쟁이나 구절초 등 여럿이지만, 그중에서도 배초향은 가장 연해 자극적이지 않은 보랏빛이 아닐까 싶습니다.

향기는 맛과 함께 느낄 수 있는데, 쉽게 말해 허브식물이라고 보면 됩니다. 생각해보면 라벤더, 로즈메리, 카밀러 같은 서양 허브는 알면서도 진정한 우리의 전통 허브식물이라고 할 수 있는 배초향은 잘 몰라 안타깝습니다.

산에서 나는 배초향은 예부터 우리 생활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식물입니다. 그래서 마당 한켠에 몇 포기 키우면 두고두고 잎을 얻을 수 있고, 늦여름부터 가을 내내 고운 꽃구경도 할 수 있는 여간 좋은 식물이 아니지요.  



배초향은 꿀풀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입니다. 우리나라 전역에서 자라며 이웃한 중국, 대만, 일본에서도 볼 수 있지요. 산 아래 낮은 곳에서부터 1000m가 넘는 높은 산 정상까지 분포하지만 햇볕이 드는 곳에서 잘 자랍니다.

다 자라면 1m쯤 되는데, 많은 가지를 만들어내고 가지마다 잎과 꽃을 매어 달지요. 꽃 한 송이는 1cm도 안 될 만큼 작고, 입술 모양의 길쭉한 꽃송이는 반쯤 꽃받침 속에 가려져 있습니다. 이 작은 꽃송이들은 10cm 정도의 원기둥 모양으로 둥글게 둥글게 모여 달립니다.

꽃은 진하지도 연하지도 않은 아름다운 보라색이며, 꽃잎보다 더 길게 수술이 나와 있답니다. 우리가 먹는 잎은 길쭉한 심장모양으로 생겼고 두 장씩 마주납니다. 가장자리에 둔한 톱니도 있지요.

꽃 사진을 보고 “이거 방아잎 아냐?” 하는 분도 있을 텐데, 맞습니다. 남부지방에서는 그렇게 부르며 매운탕, 추어탕 같은 음식에 넣어 끓이거나 생선회에 곁들여 먹기도 합니다. 식물체 자체에서 방향성 냄새가 나기 때문에 생선 비린내를 없애주지요.

고기를 싸서 먹거나 봄철에 어린순을 끓는 물에 데친 뒤 무쳐먹으면 부드럽고 독특한 향기가 그만입니다. 또한 잘 말려서 차로 마시면 훌륭한 허브차가 되지요. 이 밖에도 방애잎, 깨나물, 중개잎, 야박하, 참뇌기, 곽향(藿香), 토곽향, 어향(魚香), 인단초(仁丹草), 가묘향(家苗香) 등 아주 다양한 이름으로 불립니다. 이름 가지 수가 많은 것은 그만큼 우리 민족과 가까웠다는 증거겠지요.

배초향은 한방에서도 이용했습니다. 곽향이라는 생약으로 주로 감기, 어한, 두통, 복통, 설사, 소화불량에 처방합니다. 버짐이 피었을 때는 배초향 달인 물에 담가 치료하기도 하고, 입에서 냄새가 날 때는 그 물로 양치를 해도 좋다고 하네요. 좋은 향이 나쁜 냄새를 없애주지요. 가을이 배초향처럼 그윽이 익어갑니다.  [이유미 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



10. 산국(감국)-‘그윽한 향기’ 누구와 비교하리



가을은 국화의 계절입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국화과 식물의 계절입니다. 고개를 들면 울긋불긋 아름답게 물든 단풍잎들이 하늘을 가리지만, 고개를 숙여 숲가를 둘러보면 산국, 감국, 구절초, 쑥부쟁이, 해국 등 우리가 흔히 들국화라고 부르는 야생 국화과 식물이 가득합니다. 게다가 도시로 가면 이런저런 빛깔로 개량한 국화품종이 곳곳에 심어져 있어 가을을 더욱 풍성하게 해줍니다. 이 국화과 식물은 기품 있는 때깔도 멋지지만 무엇보다 그윽하고 서늘한 향기가 일품이지요.  

가을의 그 많은 국화과 꽃 중에서도 예로부터 ‘야생 국화’라 해서 사랑하고 애용한 꽃이 바로 산국입니다. 말 그대로 산에서 피는 국화인 산국은 무엇보다 우리 산과 들, 지천에서 피고 지기 때문에 더욱 마음 가는 식물입니다.   






이즈음 가을 길을 따라 우리 산야를 한번 돌아보세요. 들녘, 바위틈, 산언덕, 길가 등 어느 곳에 가나 한창 흐드러지게 핀 들꽃 속에서 어김없이 피어 있는 가을 꽃, 산국을 만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만난 산국에 코끝을 가져가 보세요. 가을 청량함이 몸과 마음에 가득 채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여러해살이풀인 산국은 보통 성인 무릎 높이까지 커서 꽃을 피우지만 어린아이 키만큼 크기도 합니다. 백색 털이 소복하고, 잎 모양새는 흔히 국화 잎과 비슷하지만 가장자리에 잔 톱니가 달려 구별할 수 있답니다. 꽃은 흔히 소국이라고 해서 화분에 심어 꽃가게에서 파는 노란 꽃보다 작지만, 색깔은 소국보다 노란빛이 더욱 선명하고 향기도 더 진합니다.

또 산국과 아주 비슷한 식물로 감국이 있는데 꽃차례 지름이 좀 더 큰 특징으로 구분합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산국과 감국은 구별이 쉽지 않고, 같이 쓰이는 경우도 많습니다. 야국, 황국, 야산국, 야국화 등으로 함께 불리기도 하고 한방에서도 그 약효나 용도를 동일하게 쓰지요. 주로 꽃을 말려 약으로 썼는데 머리가 아프거나 어지러울 때, 특히 술독을 풀 때나 열을 내릴 때 사용했다고 합니다.

잎을 즙으로 내어 소금과 함께 쓰면 통증치료에도 그만이라지요. ‘본초강목’에는 오랫동안 복용하면 혈기에 좋고, 몸을 가볍게 하며, 쉬 늙지 않고, 위장이 편안하며, 오장을 돕고, 사지를 고르게 한다고 적혀 있습니다. 믿지 못할 이야기지만 ‘유향’이란 중국 사람은 국화를 먹고 1700세까지 살았다고 하니, 어쨌든 좋은 식물임에 틀림없지요.  

실제로 산국은 먹는 식물이기도 합니다. 어린 순을 삶아 물에 우렸다가 나물로 먹기도 하고, 10월쯤 좋은 꽃을 채취해 술에 담가 그 향기를 즐기기도 하며, 꽃을 따서 향기가 나가지 않게 밀봉해두었다가 뜨거운 차로 마시기도 했습니다.

음력 9월 9일에는 국화전을 만들어 먹기도 했고요. 그 밖에도 꽃을 말려 베개 속에 넣고 자면 머리가 맑아지고 단잠을 잘 수 있다고 합니다. 더욱 멋진 일은 이불솜 사이에 마른 꽃잎을 넣어두면 이불을 들썩일 때마다 조금씩 풍겨 나는 향기를 즐길 수도 있지요.  

옛사람들은 산국 향기를 즐겼는데, 향수 대신 산국 꽃을 향낭이란 주머니에 넣어 몸에 간직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기품 있는 풍류는 어렵더라도 가을이 가기 전 산국을 한 움큼 묶어 책상가에 말려두어야겠어요. 가을이 좀 더 머물 수 있게요.

[이유미 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



11. 쑥부쟁이(개쑥부쟁이)-사냥꾼 청년과의 애잔한 전설 간직



 


산야의 나무는 단풍으로, 풀은 가을꽃으로 변신해 아름답습니다. 색깔 따라 일렁이는 마음도 주체하기 어렵네요. 더없이 좋은 푸른 하늘 아래의 가을볕 따사로운 풍광도, 촉촉한 가을비에 젖어드는 풍광도 어느 하나 놓치고 싶지 않은 가을 모습입니다. 그 풍광 속에서 연보랏빛 꽃송이가 풍성한 들국화도 보입니다.

 바로 쑥부쟁이입니다. 다소 신비롭고 때론 특별하면서도 고결해 거리감을 주던 보라색이 쑥부쟁이 꽃무리에서 빛을 발하면 금세 다정하고 넉넉해지면서 무엇보다 청량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들국화라는 말은 원래 식물도감에는 나오지 않는 이름이지요. 이즈음 산에서 만나 들국화라 불리는 꽃 가운데 주로 노란빛 꽃이 피는 것은 산국(‘주간동아’ 860호 참조)이거나 감국이 많고, 희거나 연분홍빛 꽃이 핀다면 구절초기 쉬우며, 연보랏빛으로 피어난다면 쑥부쟁이일 겁니다.

그런데 고민인 것은 그냥 쑥부쟁이는 꽃차례 지름이 좀 작고 분포도 제한적이어서 실제로는 보기 쉽지 않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바닷가는 물론, 산에서 가장 흔히 보는 그 꽃은 사실 ‘개쑥부쟁이’랍니다.

두 꽃을 구분하려면 작은 꽃송이를 싼 총포라고 부르는 부분이 가늘고 길게 올라온 특징을 찾아봐야 하고, 쑥부쟁이 잎 가장자리의 결각을 가려내야 하지만 사실 이를 구별하기가 쉽지 않답니다. 만일 우리꽃 산책을 처음 다니는 분이라면 산에 무리 지어 핀 꽃은 대부분 개쑥부쟁이라고 생각하면 쉽습니다.

쑥부쟁이라는 특별한 이름은 ‘쑥을 캐러 다니는 불쟁이(대장장이) 딸’에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합니다. 옛날 아주 깊은 산골마을에 가난한 대장장이 가족이 살았습니다. 이 대장장이의 큰딸이 병든 어머니와 많은 동생을 돌보며 쑥을 캐러 다녔기에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쑥부쟁이라고 부르곤 했다지요.

어느 날 마음씨 착한 쑥부쟁이는 산에 올라갔다가 상처를 입고 쫓기는 노루를 숨겨 살려주었는데, 노루는 은혜를 꼭 갚겠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습니다. 좀 더 길을 가다 이번엔 함정에 빠진 사냥꾼을 보게 됐고 칡덩굴을 잘라 던져서 꺼내주었습니다.

사냥꾼은 아주 잘생기고 씩씩한 청년이었는데 첫눈에 반한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게 됐지요. 사냥꾼은 부모의 허락을 받아 다음 해 가을에 다시 찾아오겠노라고 약속한 뒤 떠났습니다.  

그러나 기다리던 가을이 돌아오길 몇 번, 사냥꾼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리움에 야위어 가던 쑥부쟁이에게 몇 년 전 목숨을 구해준 노루가 나타나서는 소원을 빌 수 있는 노란 구슬 세 개를 보랏빛 주머니에 담아주고 돌아갔습니다.

쑥부쟁이는 첫 번째 구슬은 어머니 병을 낫게 하는 데, 두 번째 구슬은 사냥꾼을 나타나게 해달라는 데 썼습니다. 소원이 이루어져 애타게 기다리던 청년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결혼해 아이까지 두었고, 착한 쑥부쟁이는 나머지 세 번째 구슬을 그 청년이 가족에게 돌아갈 수 있게 해달라는 소원에 써버렸습니다. 하지만 끝내 청년을 잊지 못한 쑥부쟁이는 그만 절벽에서 발을 헛디뎌 죽고 말았습니다.  

쑥부쟁이가 죽은 자리에 풀이 무성하게 자라 아름다운 꽃이 피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쑥부쟁이가 죽어서도 배고픈 동생들에게 나물을 뜯게 해주려고 다시 태어났으며, 이 꽃의 보랏빛 꽃잎과 노란 꽃술을 노루가 준 주머니와 구슬 3개라고 여겨 그 꽃을 쑥부쟁이라고 부르게 됐답니다. 쑥부쟁이는 아직도 청년을 기다리는 듯 해마다 가을이면 꽃대를 길게 빼고 곱게 핀답니다.  

혹 가을 산행 길에 아름다운 쑥부쟁이를 만나거든 연보랏빛 꽃에서 노란 구슬을 찾아보세요.  [이유미 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 ]



12. 털머위-스산함 날리는 노란색 생명력



겨울이 가까워져야 빛을 발하는 꽃이 있습니다. 흔히 겨울과 연관된 꽃이라고 하면 예전엔 매화나 동백나무를 떠올렸고, 야생화에 관심이 많아진 이즈음엔 눈 속에서 피어난 복수초를 떠올리지요.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이 꽃들은 아주아주 일찍 피어나는 봄꽃과 맥이 닿아 있는 식물들이랍니다.  

참으로 쓸쓸한 계절, 가을 끝자락에서부터 겨울까지 이어지면서 그 붉던 단풍빛마저 스러지고 난 후의 스산한 초겨울을 환하게 해주는 꽃이 바로 털머위입니다. 윤기 나는 잎새에 밝고 아름다운 노란색 꽃이 가득 피면 회백색의 쓸쓸하던 풍경이 금세 생기를 띠지요.

털머위는 국화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입니다. 봄에 돋아나는 잎이며 줄기를 ‘머윗대’라고 합니다. 우리가 먹는 그 머위와 같은 집안식물임에도 자라는 장소, 모양, 시기가 모두 다르답니다.  

털머위는 다 자라면 꽃대까지 높이가 50cm 정도 되고, 콩팥처럼 생긴 잎은 머위와 비슷하지만, 잎이 두껍고 색이 진하며 반질반질 윤기가 나는 것이 특징입니다. 하긴 그래야 추위와 바람을 이길 수 있겠지요. 또 겨울에도 푸른 잎이 유지되는 상록성입니다.

그런데 이 고운 초겨울 꽃을 겨울이 모진 중부지방에선 보지 못하고 남쪽으로 가야만 만날 수 있다는 게 애석합니다. 그나마 온난한 해양성기후 덕분에 바다를 따라 좀 더 북쪽으로 올라와 울릉도에선 흔히 볼 수 있지요.  

그래서 추위가 덜한 지방에서는 털머위에 대한 관심이 높습니다. 꽃 모양이 아름다운 것은 물론이고 항상 잎을, 그것도 예쁜 잎을 달고 있는 상록성인 데다 꽃이 흔하지 않은 시기에 꽃을 피우니 그 이상 좋을 수 없지요. 제주 같은 데서는 길가에 줄지어 심어 놓은 털머위를 그리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데, 여름과 초가을까지는 잎만 봐도 좋을 정도입니다. 게다가 볕이 드는 길가는 물론이고, 그늘에서도 잘 견뎌냅니다. 숲 속에서도 잘 자라니 나무가 줄 지어 선 곳에 털머위 군락을 만들어 놓으면 어둑한 숲 속이 대번에 환해지는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물론 분에 담아 키워도 좋습니다. 요즈음엔 잎에 노란 얼룩이 들어간 변이 종도 나와 인기가 높답니다.  

털머위는 관상용 외에도 쓸모가 많습니다. 머위처럼 잎자루를 나물로 무쳐 먹기도 하고, 한방에서는 식물 전체를 연봉초(蓮蓬草)라고 해서 약으로 씁니다. 감기와 인후염에 효과가 있고 종기가 나거나 타박상을 입었을 때는 식물체를 찧어서 바르기도 합니다. 생선의 독성에 중독됐을 때는 즙을 내어 마시기도 한다지요.  

혹시 남쪽으로 길을 떠난다면, 쓸쓸한 생각이 가슴 가득 담겨 있다면, 추위를 앞두고도 밝고 그래서 더욱 아름다운 털머위를 꼭 한 번 만나보길 권합니다.   [이유미 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 ]



13. 수크령- 산책길 곳곳서 몸 흔들며 인사



먼 산자락에선 억새가 일렁입니다. 강 하구에서 바닷물을 바라보면 갈대숲이 무성합니다. 자연은 화려한 꽃송이를 가져야만 아름다운 것은 아닌 듯합니다. 식물 중에는 사람이나 곤충의 눈길을 끄는 꽃잎이 없어도, 달콤한 꿀내음이나 향기로 주위를 자극하지 않아도 바람결에 몸을 맡긴 꽃가루가 닿아 맺어진 인연에 의지해 살아가는 종류도 있습니다. 이런 꽃들은 곤충이 중매쟁이인 충매화와 달리 바람이 중매했다고 해서 풍매화라고 부릅니다.  

억새나 갈대가 그러하고, 들판에 핀 강아지풀이나 오늘 주인공인 수크령도 그러합니다. 늦은 가을에는 이런 풀들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며 만들어내는 풍광이 마음을 더 흔들어놓습니다. 아마도 바람은 풀은 물론, 사람 마음까지도 움직이게 만드나 봅니다. 노파심에 하는 말인데, 이런 식물도 꽃을 피우느냐고 고개를 갸웃거릴 수도 있겠지만, 당연히 고등한 모든 식물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답니다. 다만 눈에 뜨이는 꽃잎이 없을 뿐이지요.   





갈대나 억새는 작심하고 길을 떠나야 만날 수 있지만, 수크령은 훨씬 가깝게 있습니다. 한강 둔치나 천변을 따라 만들어진 산책길에서, 혹은 모처럼 가을을 만나러 떠난 산행의 하산 길에서, 혹은 시골마을 가장자리 정자에 잠시 들러 농주로 피로를 풀며 느긋한 마음으로 주위를 둘러보면 만날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가장 멋진 수크령과의 조우는 해가 질 무렵입니다. 꽃(꽃처럼 보이진 않지만)에 달린 빳빳한 털들이 석양을 받아 반짝반짝 생기가 돌면서 일렁거리는 장관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을 듯합니다.

수크령은 갈대나 억새 혹은 강아지풀처럼 볏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입니다. 생김새로 치면 강아지풀과 비슷하지만 키가 훨씬 크고 꽃차례도 크며 색도 진합니다. 강아지풀보다 억세 보인다 싶으면 수크령이기 십상입니다.

수크령은 키가 1m까지도 크지요. 강아지풀을 닮은 이삭은 쉽게 말해, 꽃잎이 없는 꽃들이 다닥다닥 원통형으로 달린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리고 꽃가루받이가 이뤄지면 그대로 열매로 익어가는 거지요.

수크령이란 이름은 ‘남자 그령’이란 뜻이랍니다. ‘그령’이라는 식물이 있는데, 식물학적으로 수크령과는 별개입니다. 결초보은(結草報恩)이라는 유명한 유래를 가진 그령은 암꽃과 수꽃이 있는 것이 아니라 좀 작아서 여성 같은 이미지라면, 수크령은 그령처럼 길가에 많지만 훨씬 억세고 강하다는 느낌을 줍니다. 실제로 이 풀의 이삭 생김새가 남성스러워 수크령이 됐다고 하네요.  

수크령은 생각보다 자주 보입니다. 건조한 기후에도 강하고, 옮겨 심기도 쉬우며, 아무 곳에서나 잘 자라고, 꽃이 오래 핀다는 장점을 지닌 식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천을 정리하면서 가장자리에 많이 심었다고 하지요. 화려하진 않아도 독특한 개성만으로 이렇게 훌륭한 장점들을 보여주는 꽃이 수크령입니다.  

[이유미 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 ]



14. 더덕 - 향기만큼 예쁜 더덕꽃 보셨나요?




오감이 살아 있다는 것은 참 행복한 일입니다. 꽃을 만날 때는 더욱 그렇지요. 눈으로 보는 즐거움이 가장 먼저지만 거기에 코로 맡는 향기를 보태면 그 아름다움은 더욱 깊어집니다. 숲에서 꽃들을 만날 때 살짝살짝 스쳐오는 향기의 그윽함은 느낄 줄 아는 사람만의 행복입니다.
 
식물은 때론 온몸으로 향기를 표현하기도 합니다. 백리향이란 꽃은 그 향기가 백 리를 가는 게 아니라 발끝에 스친 식물 향기가 백 리를 갈 때까지 이어진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랍니다. 요즘 유행하는 허브식물인 셈이지요.  




더덕도 그렇습니다. 먹거리로만 아는 사람은 향긋하게 무쳐 먹고 구워 먹을 수 있는 더덕 뿌리만 떠올릴지도 모르지만, 알고 보면 더덕은 향기를 온몸으로 품어내는 식물이면서 특별하고 아름다운 꽃을 자랑하는 우리 꽃이랍니다.  

그러고 보니 오래전 옛일이 생각납니다. 식물을 처음 공부하던 시절, 숲길을 걷노라니 한 선배가 “이 근처에 더덕이 있나 봐! 향기가 난다. 잘 찾아봐”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식물 세계에 살짝 발을 들여놓은 초보자 눈에는 식물이 가득한 이 숲에서 잠시 스친 코끝의 인연만으로 더덕 존재를 알아챈 선배의 능력이 경이롭게 느껴졌습니다. 물론 이제는 많은 사람이 그런 체험 정도는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아무튼 그렇게 더덕은 제게 향기로 다가왔습니다. 익숙한 꽃향기가 아닌 몸 전체로 반응하는 그윽한 식물 향으로 말이지요. 다만 애석하게도, 이젠 우거진 숲에서 더덕을 만나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답니다.  

더덕을 보고 또 한번 크게 감동했던 것은 꽃을 구경하고 나서입니다. 워낙 먹는 것으로 유명한 식물이라 잎 4장이 마주보며 달리는 독특한 구조의 덩굴식물이란 건 알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우거진 숲에서는 꽃을 잘 피우지 않는 탓에 한참 후에야 여름에 피는 더덕 꽃을 실제 볼 수 있었습니다.

먹는 식물에서 연상되는 실용적이고 평범한 모습일 것이라는 선입견이 여지없이 무너졌지요. 초롱 모양으로 아래를 향해 달리는 더덕 꽃은 녹황색이 돌면서도 자주색 점과 무늬들이 멋지게 어우러져 있었습니다. ‘이런 꽃도 있구나!’ 하는 감동을 안겨줄 정도로 매우 개성 있고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지요.

왜 이 꽃에 더덕이란 이름이 붙었는지 명확하진 않습니다. ‘향약집성방’ 같은 책에서는 가덕(加德)이라 표기되어 있는데, ‘가’는 이두식 표기로 ‘더할 가’니 ‘더’로 읽어야 하고, 덕은 ‘덕’으로 읽는다고 설명해놨습니다.  

알다시피 더덕 뿌리는 갖가지 요리 재료로 쓰입니다. 한방에서는 더덕 뿌리 말린 것을 ‘사삼(沙蔘)’이라고 해서 귀한 약재로 치지요. 특히 열을 다스리고, 가래를 삭혀주며, 장을 튼튼히 하고, 독을 없애주는 등 무궁한 약효를 자랑합니다.

인삼(人蔘), 현삼(玄蔘), 단삼(丹蔘), 고삼(苦蔘)과 함께 백삼(白蔘)이라 부르며 오삼(五蔘)의 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또 봄엔 어린잎을 삶아 나물로 무쳐 먹거나 쌈을 싸먹어도 향긋하니 좋습니다.

집에 마당이 있으면 덩굴을 올려 꼭 키우고 싶은 특별한 식물입니다. 오늘 저녁에는 재배한 더덕이라도 사서 방망이로 자근자근 두들긴 뒤 고추장 양념구이를 만들어 식탁에 올려놓으렵니다.  

[이유미 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




15. 용담- 웅담만한 강장제… 꽃도 좋아라





날씨가 쌀쌀합니다. 첫눈 소식이 전해진 지 이미 여러 날이 지났고 겨울 한가운데로 성큼 들어섰지만, 아직도 지난가을에 미련이 남았나 봅니다. 늦가을까지 있던 꽃소식에 ‘혹시나’ 하고 여기저기 기웃거리게 되네요. 겨울 끝에 다다르면 빨리 봄이 오길 기다리겠지요. 그때까지는 이 늦은 꽃들에 대한 미련이 계속될 듯합니다.  

용담은 가장 나중에 만난 올해 꽃이었습니다. 국화가 지천이던 지난가을, 용담은 자신만의 특별한 아름다움을 가진 꽃이었습니다. 그리 크지 않은 키와 꽃을 가지고서도 결코 기죽지 않은 채 고고한 자태를 뽐내는 모습, 어느 누구도 흉내 내기 어려울 만큼 아름답고 신비로운 보랏빛 꽃, 아랫부분은 봉곳하게 부풀고 윗부분은 나리꽃처럼 벌어진 고운 꽃 모양새….  



용담 종류를 통틀어 부르는 학명 중 속명은 겐티아나(Gentiana)입니다. 학교 다닐 때 익숙하지 않은 학명을 외우느라 골치 아팠는데, 용담을 두고서는 ‘괜찮아’라는 말에서 겐티아나라는 발음을 쉽게 떠올리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용담 꽃은 정말정말 ‘괜찮답니다’.

그런데 왜 용담은 꽃을 보고서는 도저히 떠올리기 어려운 이름을 가졌을까요. 용담은 한자로 ‘龍膽’이라고 합니다. 뿌리를 약으로 쓰는데 쓴맛이 워낙 강해 웅담(熊膽)보다 더하다고 해서 용담이 됐다고 하네요. 겐티아나라는 학명은 일리리언(Illyrian) 지방의 왕 겐티우스(Gentius)가 이 식물이 가진 강장제(强壯劑) 효과를 처음 발견한 것을 기념해 붙인 것이라고 합니다. 이래저래 좋은 약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경상도 지방에 용담과 관련한 이야기 하나가 전해옵니다. 눈이 많이 내린 어느 겨울, 한 나무꾼이 사냥꾼에게 쫓기는 토끼를 구해줬습니다. 다음 날 다시 나타난 토끼는 눈 속을 파헤쳐 풀뿌리 하나를 꺼내줬는데, 그 풀뿌리를 먹은 나무꾼은 너무 쓴맛에 토끼가 자신을 놀리는 줄 알고 토끼를 잡아 화를 냈다지요. 그러자 토끼는 어느새 산신령으로 변했고, 목숨을 구해준 은혜를 갚기 위해 귀한 약초를 알려주노라 하는 말을 남긴 채 사라졌답니다. 그 풀뿌리가 바로 용담 뿌리이며, 나무꾼은 이를 팔아서 큰 부자가 됐다는 이야기입니다.

한방에서 약으로 쓰는 부분은 다발로 된 굵고 허연 수염뿌리로 간기능 보호, 담즙 분비 촉진, 이뇨작용, 혈압강화, 진정 작용, 항염증 작용이 있어 소화불량, 간경변, 담낭염, 황달, 두통 등 많은 증상에 쓰인다고 합니다. 어린 싹이나 부드러운 잎을 먹기도 하는데 생뿌리나 잎을 술에 담가 몇 개월간 우린 뒤 먹으면 고혈압 같은 성인병에 좋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요즘에는 용담 꽃이 무척 아름다워 관상용으로도 가치를 인정받습니다. 마디마다 송이송이 달리는 모습이 보기 좋고, 보라색도 매우 아름다우며, 무엇보다 개화기가 아주 길어 늦은 여름부터 꽃피는 식물이 별로 없는 초겨울까지 즐길 수 있어 더욱 좋지요.

용담은 용담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입니다. 제주를 포함해 남쪽에서 북쪽까지, 높은 산에서 낮은 언덕이나 들녘까지 우리나라 전역에 걸쳐 자라는 진짜 우리 꽃이지요. 이즈음 간혹 남은 용담 잎은 초록빛에서 자줏빛으로 살포시 물들어 있습니다. 지금 산야와 참 잘 어울립니다.  [이유미 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



16.참억새- “아아 으악새~” 그 꽃이 맞습니다



초겨울, 흰 눈이 펑펑 내려 소담하게 쌓이기 전까지 들판은 참 스산합니다. 바람이라도 불어 마른 낙엽을 이리저리 쓸고 다니노라면 가슴 깊은 곳에 숨겨 두었던 한 해의 회한들이 풀어져 나오기 시작합니다. 꽃 이야기를 하기엔 참 어려운 계절입니다. 하지만 꽃은 졌는데도 피어나는 식물이 있지요. 바로 억새입니다. 지난 가을부터 들판에 일렁이던 억새 무리는 하얗게 서리를 맞으면서도 여전히 그렇게 서 있네요.  

흔히 억새가 하얗게 부풀어 오르면 억새꽃이 피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알고 보면 이즈음 억새꽃은 핀 것이 아니고 진 것이랍니다. 억새꽃은 초가을에 핍니다. 볏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이니 화려한 꽃잎은 볼 수 없고, 작은 꽃들이 줄줄이 ‘총’이라고 부르는 꽃자루에 달리며, 이들이 모여서 마치 먼지떨이 모양을 하고 있지요.  

꽃잎도 없이 꽃이 핀 줄 어찌 아느냐고요? 가만히 들여다보면 작고 노란 수술이 밖으로 나와 달랑달랑 흔들거린답니다. 식물학적으로는 이때가 바로 꽃이 핀 것이고, 사람들 시각에서는 아직 피기 직전(정확히는 하얗게 부풀기 직전)의 모습입니다. 바람의 도움을 받아 꽃가루받이가 성공적으로 끝나면 가볍고 작은 씨앗이 익고, 그 익은 씨앗이 멀리 날아갈 수 있도록 털이 부풀어오른 것이 바로 하얗게 핀 모습이지요. 어때요, 꽃이 핀 것이 아니고 진 것이 맞지요?  

억새란 이름은 어찌 붙었을까요? 억새는 다 자라면 사람 키를 훌쩍 넘기기도 합니다. 줄기를 옆으로 뻗으며 퍼져 나가는 억새는 잎 너비가 손톱길이만큼 되고 색깔은 녹색을 띠면서 가운데에 하얀 줄이 납니다. 가장자리에 있는 작고 단단한 톱니 때문에 자칫 손을 베일 수도 있지요. 보통 볏과 식물 가운데는 기름새, 쌀새, 솔새처럼 ‘새’가 들어간 이름을 가진 식물이 많은데, 아마도 억새는 그 날카로운 가시와 튼실한 줄기로 ‘억센 새’가 되었나 봅니다.

​억새



갈대 - 억새와 다른 점은 다발처럼 뭉탱이로 보이고, 갈색톤이며 뭉처있고 강가 등에 많이 보인다


그런데 혹시 억새와 갈대를 혼동하고 있진 않나요? 지금껏 많은 사람이 억새를 일컬어 갈대라고 잘못 부르기도 했는데, 사실 억새와 갈대는 별개 식물입니다. 오늘 주인공 억새가 산과 들에 많은 것에 비해, 갈대는 물이 있는 곳에서 많이 자랍니다.

 꽃도 억새는 밑에서부터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반면, 갈대는 가지가 위로 올라가면서 여러 번 갈립니다. 다 익고 난 후에도 갈대는 억새처럼 은백색이 아닌 갈색을 띠지요. 우리가 흔히 갈대숲이라고 하는 것은 대부분 억새숲입니다. 낙동강 하구 을숙도 주변, 많은 물새가 둥지를 마련하는 그곳에서 자라는 것이 갈대숲이랍니다.  

억새들의 군무는 누구에게나 인상적으로 비치는가 봅니다. 노래와 시에 심심찮게 등장하거든요. 어지간히 나이 든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부를 수 있는 ‘짝사랑’이란 노래의 “아아 으악새 슬피우우는 가아을이인가아요”라는 구성진 가락에서 ‘으악새’는 새 이름이 아니라 억새를 가리키며, ‘슬피 우는 것’은 바람 따라 흔들리는 억새 모습을 묘사한 것이지요. 단풍놀이가 끝나고 고산(高山) 설화 구경이 시작되기 전까지 우리 산야에서는 명성산, 천황산, 재약산, 취서산, 신불산에서 마지막엔 제주 들녘까지 이어지는 억새의 군무가 슬프도록 아름답습니다. 
[이유미 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 ]





17. 한란- 추워서 더 고귀한 향기와 자태





날씨가 참 무섭게 춥습니다. 한동안 겨울 날씨가 따뜻한가 싶더니, 갑자기 닥친 한파에 눈까지 겹쳐 온 세상이 얼면서 마음까지 추워져 절로 움츠려들게 되네요. 기후변화는 단순하게 온난화 추세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진행돼 우리를 더욱 힘겹게 합니다. 어디 우리뿐이겠습니까. 자연을 구성하는 다양한 생물 역시 그렇겠지요.
 
우리나라 같은 온대 중부지역에서 식물들에게 가장 힘든 시기는 겨울입니다. 영하로 내려가는 기온에서는 수분이 정상적으로 이동하지 못한 채 얼어버려 생존 자체가 힘겨워지지요. 한해살이풀들은 물론, 여러해살이풀들도 지상부는 사라지고 땅속에서 겨울을 납니다. 상황이 이러하니 식물기관 중에서도 가장 연약하고 섬세한 꽃은 온실 속이 아니고서야 겨울에 피어나는 것이 그만큼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겨울에 피는 꽃을 떠올려보면 먼저 동백나무가 있습니다. 하지만 나무에 피는 꽃인 데다 조금 추운 전북지역으로만 올라와도 봄꽃이 돼버리지요. 그런데 정말 겨울에 피는 꽃이 있는데, 바로 한란(寒蘭)입니다. 이름도 추운 데서 피는 난초라는 뜻이지요. 한반도에서는 자생하는 곳이 제주 한라산자락 한 곳이라 북쪽으로 올라오면서 봄꽃이 될 염려도 없는, 그냥 말 그대로 겨울꽃 그 자체입니다.  

한란은 난초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입니다. 우아하고 아름다우며 가녀리고 향기로운 동양 난초의 품격을 잘 드러내는 꽃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선형 잎은 늘씬하게 뻗어 뒤로 젖혀지고, 한겨울 그 사이에서 올라온 꽃대에는 황색이라고도, 녹색이라고도, 자색이라고도 하기 어려운 아주 신비롭고 아름다운 꽃이 피지요.  

한란은 꽃 피는 시기만 특별한 것이 아니라, 자라는 곳도 특별합니다. 제주 서귀포 자생지는 그 자체가 한란 종(種)과 함께 천연기념물로 지정됐습니다. 우리나라에 남은 유일한 한란 자생지로 가장 북한계(北限界)를 이룬다는 점에서 특별한 가치를 인정받았다고 합니다.

사실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난초들은 조직배양을 통해 대량 생산, 보급돼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꽃가게에서 살 수 있습니다. 문제는 자연 그대로의 다양한 변이를 지닌 자생지에 핀 한란의 경우, 정말 ‘탐욕스럽게’ 욕심내는 사람이 많아 대부분 훼손됐다는 점이지요. 현재 한란 자생지는 몇 겹으로 울타리가 쳐진 천연 요새 같은 모습으로 보호받고 있으며, 한란은 사람들이 하나하나 개체를 확인, 관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 손길이 얼마나 무서운지, 그렇게 보호한 지 그리 오래지 않아 다 사라져버린 줄 알았던 한란이 여기저기 다시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보존을 위해 노력한 사람들도 흐뭇하게 보람을 느끼고 있답니다.  

혹시 1840년 제주에 유배되어 9년 동안 살면서 제주 한란을 재배하고 또 그 모습을 그림으로 즐겨 그린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제주 한란을 발견하고 세상에 알린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나요? 날씨도, 세상도 추우니 그 고고한 한란의 자태와 은은한 향기가 더욱 귀하게 생각됩니다. 

[이유미 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



18. 동백나무 - 따뜻한 섬마을엔 벌써 꽃망울?



누가 뭐래도 겨울꽃은 동백꽃이 아닐까 싶습니다. 좀처럼 흰 눈을 볼 수 없는 남쪽 섬에서 불붙듯 피어난 붉은 동백꽃잎에 소금이 변해서 된 듯한 하얀 눈자락이 흩날리다가 앉으면 동백나무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귀한 모습이 되지요.  

오래전 동백꽃은 겨울꽃일까, 아니면 봄을 알리는 봄꽃일까 하고 고민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이름에 ‘겨울 동(冬)’ 자를 붙였으니 겨울꽃일 듯싶지만 영하의 추운 날씨에 ‘웬 꽃?’하는 마음도 들고, 대개는 이른 봄 꽃소식을 전할 때마다 들먹이는 것이 동백꽃이다 보니 봄꽃일 듯도 싶었지요. 그런데 식물을 공부하느라 식물 따라, 꽃 따라, 때론 열매 따라 전국을 다니다 보니 알게 되더군요. 따뜻한 남쪽 섬, 동백나무의 제 고장에 가보니 분명 동백꽃은 겨울꽃이었습니다. 그곳에선 지금쯤 동백나무에서 꽃망울이 올라오고, 1월이면 동백꽃이 한창이기 때문입니다.






동백나무는 상록성이며 잎이 넓은 활엽수입니다. 7m 정도까지 자라는데, 간혹 18m까지 자라기도 합니다. 언제 봐도 싱그러운 잎새는 사시사철 윤기로 반질거리고, 가장자리에는 잔톱니가 있어 물결치는 것처럼 보입니다. 꽃잎은 보통 다섯 장인데 간혹 일곱 장이 되기도 하고, 서로 조금씩 겹쳐서 아랫부분은 붙어 있습니다. 그 사이로 드러나는 수많은 수술은 마치 일렬로 붙여 돌돌 말아놓은 듯 단정하지요.  

짙푸른 잎새에 붉은 꽃잎, 그리고 샛노란 수술이 만들어내는 색의 조화는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동백꽃만의 아름다움입니다. 여기에 오래되어 회갈색으로 매끈거리는 수피가 어울려 운치를 보태면, 동백꽃은 한겨울에 완벽한 아름다움을 선보입니다.

동백나무는 그 열매도 보기 좋답니다. 녹색의 작은 방울 같던 열매가 갈색으로 익으면서 세 갈래로 벌어지는데, 그 속에서 잣처럼 생겼으나 좀 더 큰 종자가 드러나지요.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 바람 불어 서러운 날에 말이에요. 동백꽃을 보신 적이 있나요.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그 꽃 말이에요.♪♬” 

저는 동백나무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이 노래입니다. 바로 ‘선운사’란 시에 노래를 붙인 곡인데요. 동백꽃의 장렬한 낙화를 두고 ‘눈물처럼 후두둑 진다’는 이 표현보다 더 마음에 와닿는 말을 지금까지 찾지 못했습니다.

누구라도 동백꽃이 지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그 모습이 가슴속에 선연하게 새겨질 거예요. 꽃잎 하나 상하지 않은 그 붉은 꽃 덩어리가 그대로 툭툭 떨어지니까요. 그래서 사람들은 이 모습을 두고 가장 극적인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곤 하지만, 제주나 이웃 일본에서는 이를 불길하게 여기기도 합니다.

연말이니 오페라 공연도 많은데요. 동백나무와 관련한 오페라도 있습니다. 뒤마의 소설 ‘춘희’와 이를 변형해 오페라로 만든 베르디의 ‘춘희’가 그것입니다. 원래 제목은 ‘라 트라비아타’인데, 주인공 비올레타는 한 달 가운데 25일은 흰 동백꽃을, 나머지 5일은 붉은 동백꽃을 들고 사교계에 나오는 여자였답니다. 일본에서는 동백나무에 ‘춘(椿)’ 자를 붙이지요. 그래서 ‘라 트라비아타’가 일본으로 건너가 ‘춘희’라는 제목이 붙은 거예요.

곧 춘희는 ‘동백나무 아가씨’란 뜻인데, 문제는 우리나라의 경우 이 ‘춘(椿)’ 자를 ‘참죽나무 춘’으로 읽기 때문에 ‘참죽나무 아가씨’라는 의미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라도 원제 그대로 ‘라 트라비아타’로 쓰는 편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에도 뭇사람들의 심금을 울린 이미자 씨의 그 유명한 ‘동백아가씨’란 노래가 있지요. 꽃을 보고도 머릿속에 노래만 떠오르니, 연말이라 마음이 들뜨긴 했나 봅니다.    [이유미 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



19. 두루미꽃 - 날개 편 두루미처럼 행복 가득 기원



벌써 한 해가 가고 새해가 밝았네요. 우리나라는 언제나 역동적이지만, 되돌아보니 지난해에는 선거를 비롯해 유난스레 나라가 들썩거리는 일이 많았습니다. 어렵고 질시하고 분열됐던 한 해를 뒤로 하고 진정으로 희망에 찬 한 해를 맞이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나라는 물론이고 우리 가정과 개개인 모두가 말이죠.  

그래서 저는 새해엔 상서로운 일이 많길 바라는 마음에서 꽃으로 인사를 드릴까 합니다. 바로 두루미꽃으로요. 사실 연하장 등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새가 두루미인데, 흔히 학이라고도 부르는 두루미가 행복과 행운을 상징하기 때문이지요. 저는 두루미꽃 얘기로 근하신년을 대신합니다.  

흰 눈이 쌓인 겨울 들판에 두루미들이 우아한 자태로 서 있는 모습을 보면 마음마저 맑아져 스스로 고결한 느낌까지 듭니다. 식물인 두루미꽃도 곱기는 매한가지이지요. 봄이면 땅 위로 줄기가 올라와 심장을 닮은 예쁜 잎이 하나 펼쳐집니다. 그리고 그 위에 다시 또 하나의 잎이 반대 방향으로 달리고, 거기서 꽃대가 올라와 희고 작은 꽃들이 줄줄이 촘촘하게 달리지요. 그 자태가 마치 날개를 편 두루미 같습니다. 물론 이름도 그런 모양 때문에 붙여진 것이고요.  

재미난 것은 이 세상 모든 새 가운데 두 번째로 큰 새에 속하는 두루미 집안과는 달리, 두루미꽃 집안 식물들은 키가 작다는 점입니다. 다 자라야 한 뼘쯤 올라올까요. 꽃대에 달리는 꽃들도 하나하나 구분되지 않을 만큼 아주 작지요. 또 두루미는 겨울 들판에서 만나지만 두루미꽃은 초여름 깊은 숲에서 만날 수 있어요.   





두루미는 다정한 부부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한번 인연을 맺으면 평생 함께 간다고 알려졌지요. 물론 여러 마리가 무리지어 살긴 하지만요. 그런데 두루미꽃은 조금 다르답니다. 땅속에서 뿌리가 이어져 달리고 그 마디에서 줄기가 땅 위로 올라오기 때문에 보기엔 각각 다른 개체 같지만, 알고 보면 뿌리가 하나입니다.

형제도 부부도 아닌, 동일한 복제 개체들이라고 표현해야 할까요? 하지만 여름 숲에 무리를 이루어 하얗게 꽃대를 올린 두루미꽃을 바라보면 진귀한 겨울철새 두루미를 만난 듯 아름답고 신선한 느낌이 듭니다.

두루미꽃은 백합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입니다. 작은 꽃들이 모여 만들어낸 꽃차례 길이는 손가락 두 마디쯤 되지요.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기 시작하면 흰 꽃이 있던 자리에 구슬같이 작고 붉은 구슬이 달려 이 또한 보기 좋습니다.

쓰임새로 보면 크게 쓰이는 듯싶지는 않아요. 주로 피와 관련한 증상에 효과가 있어 피를 맑게 하고, 피가 과도하게 나거나 토하거나 할 때 처방한다고 합니다. 생약 이름이 이엽무학초(二葉舞鶴草)인데 잎(날개)을 두 개 가지고 춤추는 학처럼 생긴 풀이라는 뜻이니 참으로 멋진 이름이지요? 그 밖에 지피용(땅에 넓게 깔리는 식물)으로 심기도 하고, 어린잎은 살짝 데쳐 무쳐 먹거나 된장국거리 혹은 묵나물로도 쓴답니다.

두루미가 행복과 행운의 상징이듯, 이 두루미꽃을 보면서 행복하고 좋은 일만 가득하길 기원합니다. 

[이유미 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



20.복수초- 얼음 뚫고 피어난 ‘영원한 행복 전령사’



새해가 밝았습니다. 어제 뜬 해와 같은 해지만, 뜨는 해를 향해 간절한 모습으로 무엇인가를 기원하는 수많은 마음이 보이더군요. 새해가 있어 어려웠던 많은 일을 뒤로하고 새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저도 새해 첫 우리꽃 산책으로 새해 인사와 축복을 전할까 합니다. 바로 복수초(福壽草)를 소개하면서 말이에요. 복수초가 환하게 웃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새해에 복 많이 받으시고 오래오래 사시라고요.  

복수초라는 이름은 한자로 복 복(福) 자에 목숨 수(壽) 자, 즉 복을 많이 받고 오래 살라는 뜻입니다. 노랗게 피어나는 복수초를 보면 누구나 축복받은 느낌을 갖게 되지요. 지방에 따라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데, 땅 위에 꽃만 불쑥불쑥 튀어나온 것이 인상적이어서 땅꽃, 얼음 사이에서 피어나 얼음새꽃 또는 눈색이꽃, 새해가 시작할 때 피는 꽃이라서 원단화라고도 합니다. 눈 속에 피는 연꽃과 같다는 의미로 설연이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꽃말은 동양에서는 ‘영원한 행복’입니다.  





재미난 것은 복수초가 서양에선 ‘슬픈 추억’이란 의미를 지닌다는 점입니다. 복수초 집안의 식물을 통틀어 부르는 학명은 아도니스(Adonis)인데,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미소년 이름과 똑같습니다. 아도니스가 죽어가면서 흘린 피가 진홍빛 복수초를 피워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땅속에 살던 페르세포네라는 여신이 아도니스를 살려내자, 제우스는 아도니스에게 평소 사랑하던 아름다움의 여신 아프로디테와는 지상에서 반년, 페르세포네와는 지하에서 반년을 살라고 명령했다고 합니다. 복수초 역시 지하에서 살다 봄이 시작되자마자 사랑 이야기를 전하려고 지상으로 나오는 것이라니, 생각해보면 이 역시 역경을 초월한 사랑의 메시지임에 틀림없습니다.  

복수초는 일찍 핀다는 매력이 아니더라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밝아질 만큼 생김새가 참 아름답습니다. 복수초는 미나리아재빗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입니다. 암갈색 수염을 많이 단 굵고 짧은 뿌리를 땅에 박은 채 겨울이 가기를 기다리다, 미처 봄이 오기도 전에 성급한 꽃망울부터 땅 위로 올려 보내지요.

햇볕이 따사로운 어느 봄날, 마치 풍선이 부풀어 오르듯 꽃망울이 커져 그 화려한 꽃잎을 한껏 벌려놓습니다. 20~30장이나 되는 수많은 꽃잎이 포개어 달리고, 그 사이에는 더욱 밝고 선명한 노란색 수술이 가득 모여 있지요. 그 수술 속을 헤치면 도깨비방망이처럼 돌기가 난 연둣빛 암술이 자리 잡고 있고요. 낮에 빛이 있어야만 펼쳐지는 복수초 꽃잎은 윤기로 반짝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복수초를 화분에 심거나 봄 화단의 앞자리에 심어 키우는데, 활엽수에 잎이 나기 전에 꽃이 피므로 활엽수 아래에 심어도 좋습니다. 복수초 꽃잎이 질 즈음 나뭇가지에 싹이 돋으므로 서로 햇볕을 가릴 염려가 없지요.

한방에서도 복수초를 이용합니다. 생약명은 측금잔화인데, 꽃이 필 때 뿌리를 포함한 전초를 햇빛에 말린 후 달여 이용합니다. 식물체 내에 배당체 아도닌을 함유하고 있어 심장을 튼튼히 해주고 이뇨효과도 있다고 하네요.  


복수초는 추운 노지에서 따뜻한 곳에 가져다 놓으면 2주일 만에 꽃을 피운다고 합니다. 올 한 해 복수초를 잘 키워 내년 새해에는 이 꽃 한 포기로 존경하는 분에게 마음을 전하면 어떨까요. “복 많이많이 받으시고 오래오래 사세요” 하고 말입니다. 아름다운 정성과 복수초의 밝음이 그대로 전달될 듯합니다.   [이유미 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



21. 노루발- 한겨울 눈 속 초록의 예쁜 잎



참 추운 겨울입니다. 눈도 많이 내리고요. 한동안은 눈이 내리는 족족 녹더니, 이번엔 오래도록 대지를 덮고 있습니다. 숲에 속속들이 내려앉은 눈도 여전히 그대로입니다. 차가운 겨울 숲 기운을 온몸으로 느끼며 걷노라니 움츠러든 몸이 조금씩 훈훈해집니다. 무엇보다 이런저런 생각과 욕심, 회한으로 탁해졌던 마음이 깨끗해지고 정신도 맑아지는 듯해서 좋습니다.  

온 숲 바닥, 나무 사이사이에 순백의 눈이 때 묻지 않은 채 그대로입니다. 이를 배경 삼아 이리저리 뻗어 내린 회갈색 나뭇가지들의 조화가 참으로 그윽하고도 애잔합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겨울 숲 풍광입니다.  

이런 숲에선 생명의 느낌을 얻기가 쉽지 않습니다. 간혹 산짐승의 발자국을 보기도 하지만 그것도 흔적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문득 숲 바닥에 동글동글 살아 있는 초록 잎새들이 선명하게 눈에 박혀옵니다. 겨울 숲에서 작은 풀 한 포기는 점처럼 자라지만 그래도 생명으로 다가옵니다. 바로 노루발입니다. 노루 발자국은 눈 속에서 실체를 느낄 수 없지만, 노루발이라는 이름의 이 풀은 초록으로 생생하게 전달됩니다. 

노루발은 노루발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이자 중부지방에선 흔치 않은 상록 풀입니다. 물론 한여름의 생기로 반짝이는 초록빛은 많이 퇴색했지만 한겨울에 이게 어딥니까. 콩팥 모양의 동글동글한 잎 여러 장이 한 포기를 만들며 이 산 저 산 어딘가에서 푸르게 살아 있으니 말입니다. 더러는 꽃이 달렸던 꽃대 그대로 열매가 익었다가 씨앗마저 터뜨려 내보내고, 남은 갈색의 대와 열매 껍질이 지난 계절의 흔적처럼 남아 있기도 합니다. 잎은 잎맥이 발달한 부분의 색깔이 연해 마치 무늬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요.

흔적만 남은 꽃은 이미 한여름에 피었습니다. 한 뼘쯤 꽃대가 올라오고 10개 남짓한 흰꽃이 차례로 달리지요. 암술이 길게 뻗어 나온 모습은 아름답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해서 노루발의 전체적인 모습을 귀엽고 친근감 넘치게 만들어줍니다. 보통 한번 만나면 근처에서 몇 포기씩을 함께 보는데, 이는 가는 줄기들이 땅속에서 이어져 있기 때문이지요.  





쓰임새로 치면 상록의 예쁜 잎이 있으니 관상용으로 가능할 듯한데, 다소 그늘진 정원 또는 화분에 담아 키우는 용도로 적절할 것입니다. 약용식물로는 유명한 풀입니다. 이 풀에 전하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한 부인이 사냥꾼을 피해 도망쳐온 노루를 치마폭에 넣어 숨겨주었고, 이후 아파서 사경을 헤맬 때 그 노루가 물고 온 풀을 먹고 살아났다는 내용입니다.

노루발이란 이름은 노루가 가져다 놓고 가서 붙은 것이라고도 하고, 가녀린 꽃대가 노루발과 같다고 해서 그리 부른다고도 합니다. 어찌됐든 한방에선 이 풀을 녹수초(鹿壽草)라고 해서 약으로 씁니다. 생약 이름에도 노루가 목숨을 살린 사연이 담겨 있네요.

노루발의 꽃말은 ‘소녀의 기도’라고 합니다. 고개 숙인 꽃송이들 모습과 순결한 흰빛이 그리 느껴지기도 합니다. 올 한 해 행복하시기를 바라는 마음을 부족한 글에 담아 꽃으로 대신합니다. 

[이유미 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 ]



22. 매화(매실나무)- 고고한 雪中梅, 품격 있는 향기






사람들은 참 잘 적응하는구나 싶습니다. 이어지던 모진 추위 끝에 날씨가 좀 풀리니 모두 따뜻해졌다고들 하네요. 예전 같으면 추운 날씨인데도 말입니다. 그새 추위에 익숙해졌나 봅니다.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해서 날이 좀 따뜻한 것 같으니 이내 이런저런 꽃구경 생각이 나네요. 이즈음 떠오르는 여러 꽃 가운데 오래도록 사랑받는 꽃은 매화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중에서도 이른 봄에 꽃이 피어 눈 속에서도 볼 수 있다는 설중매(雪中梅) 말입니다. 잔설 속에서 매화가 꽃봉오리를 열고 아주 은은하면서도 품격 있는 향기를 보낸다면 얼마나 멋질까요! 하지만 그런 욕심은 내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곧 다시 닥쳐올 추위에 꽃잎이 상할까 염려해서입니다.  

그런데 꽃 이야기를 하느라 매화라고 했지만, 정확한 식물학적 이름은 매실나무입니다. 사실 매화라 부를까, 매실나무라 부를까 고민이긴 합니다. 같은 나무인데도 이른 봄꽃을 피우면 매화가 되고 여름에 열매를 맺으면 매실나무가 되니까요. 열매 값어치를 생각하면 매실나무라 불러야 하고, 깊이 우러나는 단아한 꽃송이의 아름다움을 생각하면 매화라 불러야 제격입니다. 기준으로 삼은 식물도감에 매실나무라고 기록돼 있으니 공식적으로는 이를 따르려 하지만, 꽃에 마음을 빼앗겨 매화 혹은 매실나무로 오락가락하는 것을 과히 허물치 않았으면 합니다.  

설마 매화와 매실나무가 같은 나무라는 것을 모르는 건 아니겠지요? 매화는 나무지만 흔히 꽃이라고 생각하기 쉬워 꽃과 나무란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꽃이란 나무든 풀이든 고등 식물에겐 모두 있는 기관이지요.  

오늘은 꽃에 마음을 두고 이야기하겠습니다. 매화는 오랜 옛날부터 우리 조상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난초, 국화, 대나무와 함께 군자의 고결함을 지녔다고 하여 사군자로 추앙받는 건 누구나 알 것입니다. 강희안의 ‘양화소록’을 보면 옛 선비들이 매화를 귀하게 여긴 이유는 첫째 함부로 번성하지 않는 희소함 때문이고, 둘째 나무의 늙은 모습이 아름답기 때문이며, 셋째 살찌지 않고 마른 모습 때문이며, 넷째 꽃봉오리가 벌어지지 않고 오므라져 있는 자태 때문이라고 합니다. 매서운 추위를 뚫고 꽃을 피워내는 그 의연한 기상과 단아한 모습이 사람들의 마음을 끌었을 것 같습니다. 물질은 너무 풍성하고 정신과 행동은 절제되지 않는 오늘날 가장 적절한 의미를 가진 꽃이 아닐까 싶습니다.

매화 자태와 비견할 또 하나의 매력은 그 향기에 있습니다. 어떤 이는 매화 향기가 ‘귀로 듣는 향기’라고 합니다.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만큼 마음을 가다듬은 고요한 분위기에서 비로소 진정한 향기를 마음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랍니다. 매화를 따서 빚은 술은 매화주, 매실을 넣어 만든 술은 매실주입니다. 흰죽이 다 쑤어질 무렵 깨끗이 씻은 꽃잎을 넣은 매화죽이나 말려뒀다가 끓여 마시는 매화차는 향기를 아는 이들이 즐기는 음식과 차이지요. 

매화 꽃 모양은 다양합니다. 꽃을 보자고 만든 품종들은 빛깔에 따라 흰 매화, 홍매화로 가르고 꽃잎 수가 많으면 만첩매가 되며 가지가 늘어지면 수양매가 되지요. 그러나 특히 꽃을 즐기는 이들은 그 어느 품종보다 흰색의 홑겹꽃이 일찍 꽃을 피우고 향기가 짙다 하여 귀히 여기는데, 그중에서도 자색이 들어 있지 않은 녹두 빛 꽃받침잎을 가진 ‘청악소판’이란 품종을 가장 높이 치기도 합니다.  


꽃이 지고 난 후 익어가는 매실 이야기는 뒤로 미루고, 따뜻한 매실차 한 잔을 마시며 오래 묵은 가지에서 피어날 매화를 기다려보렵니다. 




[이유미 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 ]



23. 팔손이- 비진도에서 만나는 우윳빛 꽃송이




올 초 문득 팔손이가 꽃을 잘 피웠을지 염려됐습니다. 겨울이 다가설 즈음부터 우리나라 가장 남쪽 끝에서 우윳빛 꽃송이를 한껏 피워, 보는 이 마음까지 환하게 만들어주는 꽃이 바로 팔손이인데, 올핸 남쪽에서도 한파가 계속돼 걱정이 앞서네요. 사실 땅도 얼고 물도 어는 겨울에 몸체 가득 수분을 담은 식물이 땅을 뚫고 올라와 꽃을 피우길 원한다는 것 자체가 잘못입니다. 그래도 남쪽 따뜻한 곳이긴 하지만 겨울철 꽃 구경을 가능하게 해주는 꽃이 팔손이지요.  

팔손이는 풍모가 워낙 이국적인 데다, 제주나 남쪽 섬에서는 해변가에서 자라지만 중부지방에선 대부분 분에 넣어 실내에서 키우는 식물입니다. 그래서 외국에서 들여온 수많은 관엽식물 가운데 하나려니 생각하는 분이 많지만, 실은 이 땅에서 절로 나고 자라는 우리 자생식물이랍니다.

팔손이 자생지는 경남 통영에서 배를 타고 다시 한참을 가다 보면 나오는 한산면 비진도입니다. 이 섬에는 크게는 4m까지 자라는 팔손이 자생지가 있는데, 천연기념물 제63호로 지정, 보호하고 있지요. 물론 인근 다른 섬에서도 팔손이를 볼 수 있지만 태풍 피해를 입기도 하고 사람들이 마구 캐어 내다 판 탓에 천연 자생지가 많이 줄었답니다.

이렇게 귀하디 귀한 팔손이를 그래도 남쪽지방 정원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건 1970년대 이순신 장군 전승지를 꾸미면서 함께 했던 이식사업이 성공한 덕분이라고 합니다. 어찌 됐든 아주 먼 섬까지 찾아가지 않아도 겨울이면 풍성한 우윳빛으로 꽃을 피우는 팔손이를 만날 수 있게 된 것은 반가운 일이지요.  

씩씩하고 무성하게 자라서 언뜻 풀처럼 보이지만 사실 팔손이는 두릅나뭇과에 속하는 작은 키 나무입니다. 그것도 언제나 푸른 상록수지요. 어린아이 팔뚝 길이만한 잎이 8갈래로 갈라진 모양새 때문에 팔손이란 이름이 붙었다지만, 7개짜리 잎도 있고 9개짜리 잎도 있습니다. 겨울철에는 잎이 아래로 처지는데, 꽃을 더 돋보이게 하려는 잎의 배려일까요.

팔손이에게는 엉뚱하게도 인도 공주와 얽힌 이야기가 전해 내려옵니다. 옛날 인도에 바스라라는 아름다운 공주가 살았는데, 어머니에게서 받은 예쁜 반지 2개를 소중히 여겼습니다. 어느 날 공주 방을 청소하던 한 시녀가 반지들을 보고 호기심에 양손 엄지손가락에 하나씩 껴봤지요. 그런데 아무리 해도 뺄 수가 없자, 큰 벌을 받을까 두려워 다른 반지를 덧씌워 감춰버렸습니다.


상심한 공주를 위해 궁궐의 모든 이가 손을 내밀고 검사를 받게 됐고, 시녀는 엄지손가락 두 개를 감췄지요. 바로 그 순간 하늘에서 뇌성벽력이 떨어지면서 시녀는 한 그루 나무로 변했는데, 이 나무가 바로 팔손이라는 것입니다. 처음 이 이야기를 듣고는‘그렇다면 이 식물 이름은 팔손이 아닌 팔손가락이 돼야겠네’ 하는 실없는 생각도 해봤답니다.

비진도에서는 팔손이를 총각나무라고 부릅니다. 마음속에 비밀을 간직한 채 잎새처럼 넓적한 얼굴로 환하게 웃는 섬 총각의 투박한 모습을 보는 듯하네요. 그래서인지 팔손이의 꽃말은 ‘비밀’이랍니다.

   

[이유미 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 ]




24. 새우난초- 오묘한 꽃 색깔 관상용으로 ‘딱’





한라새우난초​


우리 꽃을 만나 하나하나 알아가는 과정은 참 경이롭습니다. 이름 모를 산야의 꽃 한 송이가 눈에 들어오면, 이내 마음에 담아뒀다가 두고두고 되새기곤 합니다. 거기에 꽃 각각에 깃든 사연과 의미들을 더하다 보면 안타깝고 놀랍고 즐거운 감정이 교차하면서 결국 입가에 미소를 띠게 되고, 그럼 어느새 꽃과 더불어 살아가는 행복한 사람이 돼 있습니다.  

새우난초도 그런 꽃 가운데 하나입니다. 겨울 끝자락에 볼 수 있는 꽃으로, 원래 자생지에서는 제대로 된 봄에 피지만 분에 담아 실내에서 키우면 훨씬 일찍 꽃구경을 할 수 있지요. 자생난초라고 하면 춘란이라고 부르는 보춘화와 여러 변이품종이 좀 알려졌고, 거기에 더해 희귀한 한란(겨울이 시작할 즈음 소개드렸던 한란 기억나시나요?)의 쭉쭉 뻗는 잎사귀들을 보면서 뭉뚱그려 그냥 동양란이라고 부르며 그게 전부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우리 숲에는 야생 난초가 매우 다양하게 있고, 그중 화려하면서도 아름다운 꽃을 가진 난도 제법 여럿입니다. 그 가운데 새우난초와 그 집안 식구들이 관상용으로 가꾸기엔 최고인 듯합니다. 복주머니난이나 광릉요강꽃처럼 꽃으로 치면 더욱 화려한 것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자생지에서도 멸종 위기에 처한 종들이다 보니 보전하는 일이 더 급하고, 설령 곁에 두고 가꾸려 해도 키우는 일 자체가 매우 까다로워 죽이기 쉽습니다. 그러니 아예 포기하는 편이 낫지요.  





새우난초를 들여다보면 일단 꽃 색깔이 참 오묘합니다. 흰색과 분홍색과 갈색이 적절히 어우러져 특별히 무슨 색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색을 갖고 있습니다. 포기마다 안정감이 있는 전체적인 모습도 좋고, 약간 연한 느낌이 나는 주름진 잎사귀도 보기 좋답니다. 하지만 새우난초가 가진 진짜 재미는 같은 집안 식구인 금새우난과 피를 섞었을 때 경험할 수 있지요. 샛노랗고 화려한 꽃잎을 가진 금새우난과 새우난초를 교잡하면 그사이에서 정말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꽃 색깔이 나오고, 이들을 각기 품종화하면 고가에 거래할 수도 있습니다. 

새우난초는 제주를 비롯한 남해 섬 지방에서 드물게 자랍니다. 위로는 안면도에서까지 볼 수 있는 여러해살이풀이지요. 밑부분이 포개지고 주름이 깊은 잎사귀가 2~3장 나오고, 그 가운데서 꽃대가 쭉 올라오면 키가 어른 무릎쯤 됩니다. 새우난초 잎은 상록성이지만 다음 해 봄에 교체되지요. 꽃은 원래 봄에 피며, 자생지에서는 4~5월이 개화 적기입니다. 꽃자루가 올라오고 여기에 줄줄이 꽃송이가 달리는데, 열 개쯤 될까요.

새우난초라는 이름은 뿌리를 보면 마치 새우등처럼 마디가 있어서 붙은 것 같습니다(이 마디는 1년에 하나씩 생긴다고 하네요). 또한 속명이 칼란데(Calanthe)인데, 이는 ‘아름답다’는 뜻을 가진 희랍어 칼로스(calos)와 꽃이라는 뜻을 가진 안토스(anthos)의 합성어라 하니 아름다운 꽃의 대명사라 할 만하지요. 한방에서는 구자련환초(九子連環草)라는 생약명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편도염, 림프샘염, 타박상, 종기로 인한 독 등에 쓰인다고 합니다. 보기도 아까운 꽃을 먹다니 아무래도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새우난초 꽃구경이나 하면서 남은 추위를 이겨볼까 합니다.   [이유미 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 ]




25. 참뱀차즈기- 뱀같이 똬리 틀고 ‘황홀한 유혹’





올해는 계사년 뱀 해입니다. 뱀 해이다 보니 발밑을 스르르 지나가는, 보기도 좋지 않을뿐더러 징그럽기까지 하던 뱀 이미지가 좋은 의미로 다가옵니다. 겨울잠을 자느라 한동안 사라졌다가 나타나 허물을 벗으니 매번 다시 사는 영생의 상징이요, 집안에 풍요와 재물과 복을 주는 신이면서 지혜로움까지 갖춘 존재이지요. 그래도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뱀을 좋아하긴 쉽지 않은데, 이런 모든 찜찜함을 한 번에 날려주는 우리 꽃이 있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뱀 모습을 한 참뱀차즈기입니다.
 
참뱀차즈기 꽃을 보면 정말 뱀을 닮았습니다. 통꽃인 꽃잎이 벌어진 모습이 마치 먹이를 잡아먹으려고 입을 크게 벌린 뱀 같지요. 길고 가늘게 나온 암술은 꼭 뱀 혀 같고, 자세히 보면 살짝 드러나는 수술들은 뱀 이빨 같습니다. 참뱀차즈기 한 포기에서 길게 올린 꽃대는 똬리를 튼 채 머리를 꼿꼿이 치켜든 뱀 모습처럼 보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뱀 말이지요.

참뱀차즈기는 꿀풀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우리나라에서만 자라는 특산식물이라 희귀식물 범주에 들기도 합니다. 참뱀차즈기의 식물학적 의미는 정말 특별하답니다. 설악산, 가야산, 소백산, 지리산 같은 크고 깊은 산, 물 빠짐이 좋고 살짝 햇살이 들거나 반쯤 그늘이 진 숲 속에서 드물게 자라니 식물로서는 귀한 존재이지요.


참뱀차즈기는 다 자라면 어른 무릎 높이쯤 됩니다. 줄기가 아닌 뿌리에서 나온 잎들은 긴 자루를 달고 타원형 잎을 가집니다. 꽃은 한여름에 핍니다. 연한 노란색 꽃이 꽃대 마디마디에 몇 개씩 달려 꽃잎을 펼치지요. 손가락 두 마디쯤 되는 꽃이 여러 개 모여 있는 모습을 숲에서 만나면 참 아름답고 인상적입니다. 이 식물이 자라 꽃을 피우는 곳은 워낙 좋은 숲이라 그때 무더위가 한창이더라도 귀한 느낌이 든답니다.  



참뱀차즈기라는 이름에서 ‘참’은 진짜라는 뜻이고, ‘차즈기’는 자줏빛을 띤 차즈기라는 식물의 잎 모양을 닮았다는 의미로 붙었습니다. 주름진 잎이며 겨울에 땅바닥에 붙어서 난 모양이 배춧잎을 닮아 그런지 뱀배추라고도 하고, 곰보배추라고도 부릅니다.  

장소를 가리는 데다 재배법도 다소 까다롭지만 매우 훌륭한 관상용 식물입니다. 한 포기씩 심기보다 나무를 심어놓은 곳 가장자리쯤, 그늘이 조금 드는 곳에 무리지어 심는 것이 보기에 좋지요. ‘배추’라는 말이 붙은 별칭을 가진 식물답게 어린순은 식용으로도 쓰입니다.  

이쯤 되면 계사년에 가장 어울리는, 아름답고 소중한 뱀을 닮은 존재를 만난 것 맞지요? 뱀이 가지는 좋은 의미와 참뱀차즈기가 보여주는 고운 모습을 함께 간직하면서 행복하고 좋은 일만 가득한 해가 되길 기원합니다.  [이유미 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

[출처] : 이유미 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 : <이유미의 우리꽃 산책> / 주강동아



ohyh45
ohyh45

ohyh45님의 블로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