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을 은폐·악마화하면 죄의식 싹터…권력 앞에 굴종하기 쉬워” [커버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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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0.09.12. 오전 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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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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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교육이 가장 중요한 정치교육” 김누리 중앙대 교수[경향신문]

김누리 중앙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를 지난 2일 서울 동작구 중앙대에서 만났다. 김 교수는 “성에 대한 죄책감은 민주주의의 적”이라며 “성교육은 성숙한 민주주의자를 길러내기 위한 첫걸음”이라고 말했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성과 관련된 한국 사회는 시대착오적이고 이중적입니다. 공적인 성윤리는 너무나 엄격한데, 일상 도처에서 성을 거래하고, 착취해요. 아이들이 어떤 눈으로 세상을 볼지 두려워요.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너무 못된 짓을 하는 겁니다.”

김누리 중앙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의 전공과 성교육 사이엔 거리감이 있다. 그는 이 문제를 오래 지켜봐왔다. 김 교수가 특별히 강조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성교육이다. 한국성교육교사회 초청을 받아 강연했다. 법무부 강연 주제는 ‘n번방과 인권교육’이다. 중앙대 대학원 독일유럽학과 교수이며 독일유럽연구센터 소장이기도 한 그는 8년 독일 유학에서 체득한 독일 사회에 대한 통찰로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아프게 꼬집어왔다.

“나다움 어린이책 회수 조치는
시대착오적이고 파렴치한 짓”

김 교수는 지난 6월 tvN <미래수업>에서 ‘성교육이 가장 중요한 정치교육’이란 주제로 강연했다. 김 교수는 이 강연에서도, 그 전후로도 “성교육은 성숙한 민주주의자를 길러내기 위한 첫걸음”이라고 강조했다. 이 ‘미래수업’에선 한국과 유럽의 성교육 간극이 다시 드러났다. 게스트로 나온 독일 출신 방송인 다니엘 린데만이 초등학교 3학년 때 <아기는 어떻게 태어날까?>를 교재로 성교육을 받았다고 말한 것이다. 선정적이란 이유로 여성가족부 ‘나다움 어린이책’에서 회수 대상이 된 바로 그 책이다.

김 교수를 지난 2일 서울 동작구 중앙대에서 만나 ‘나다움 어린이책’ 회수 사태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여가부의 회수 조치에 대해 “시대착오적이고 파렴치한 짓”이라고 말했다.

성에 관해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
사유해선 안 되는 게 있구나 생각해
비판적 사유 불능한 개인 돼버려

“한국 아이들은 이중 억압 상태에 있어요. 성적(性的) 억압과 성적(成績) 억압이죠. 성을 올바로 가르치지 않고 나쁜 것으로 여기게 합니다. 살인적인 학업경쟁을 시키죠. 이중 억압 상태에서 아이들은 너무 불행해요. 독일에선 성을 억압·악마화해선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성을 은폐하고 악마화하면 아이들이 생물학적 본능이 생기는 시기 내면에 죄의식이 싹틉니다. ‘나쁜 게 내 안에 있네’라고 생각하죠. 그게 제일 나빠요. 죄의식을 강하게 가진 아이일수록 정치적 권력 앞에 굴종하기 쉬워요. 성을 억압하면 할수록 권력에 굴종적인 인간이 된다는 게, 아도르노, 에리히 프롬, 마르쿠제 등이 강조한 ‘권위주의적 성격이론’입니다.”

성교육은 민주주의의 기반이 되는 강한 자아를 만드는 바탕이다.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는 힘이 생기는 것이다. 그는 “성에 관해 ‘생각하면 안 돼’라고 가르치면, ‘세상에 사유해선 안 되는 게 있구나’라고 생각하게 된다. 성에 관한 사유금지는 정치적 영역의 사유금지로 자연스럽게 넘어간다. 사유할 수 없는 인간이 되는 것”이라며 “성숙한 민주사회를 위해선 모든 사안을 두고 비판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개인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성적 판단에 미숙한 한국 남성들
그 배경엔 성교육 부재·군대 문화
이는 가부장제·갑질문화와도 연결

“정부 공직자들도 성적 판단에선 너무 미숙한 사람들입니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과 같은 지적·도덕적 수준에 있는 사람조차도 성과 관련해선 성숙한 판단력을 가질 수 없을 정도로 한국 사회가 성과 관련해선 미숙하죠.”

이야기는 미투 운동, ‘안희정·오거돈·박원순 사건’으로 옮겨갔다. 그는 “한국 남성들의 왜곡된 성의식이 조금도 개선되지 못했다. 안희정 유죄 판결엔 ‘위력에 의한 성폭력’을 인정한 의미가 있지만, 더 근원적인 부분에 질문을 던져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 12년(대학교까지 16년) 동안 교육을 받고, 군대를 다녀온 남성이 정상적 인간이 되는 게 가능한가”라고 물었다.

그는 “군대는 여성을 대상화하는 일종의 ‘인텐시브 코스’다. 한국 남성을 괴물로 만든다”며 “한국 남성들은 어른이 아니다. 겉으로는 성인인데 사춘기를 올바로 넘어서지 못했다는 의미에서 유예된 사춘기 속에 있는 아이다.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사람조차 ‘어른 아이’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는 게 놀랍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4·19혁명부터 박근혜 퇴진 촛불집회까지, 오랜 민주화 역사를 지닌 한국 사회가 ‘진정한 민주사회’가 되지 못한 이유도 성교육 부재 등에서 찾았다. 그는 이 문제가 ‘우리 안의 가부장제, 권위주의 갑질문화’로도 직결된다고 보는 듯했다.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6·10항쟁은 반복적으로 쿠데타 세력에 의해 좌절돼왔다. 왜 그랬을까를 진지하게 물어야 합니다. 광장에서 정치적 민주화를 외치지만, 집이나 직장으로 돌아가면 가부장적 아버지, 권위주의적 교사, 갑질을 일삼는 상사가 됩니다. 강한 자아에 근거를 두고 저항하는 능력을 기른 성숙한 민주시민이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전통적 성윤리라는 이름의 성억압,
비민주·권위주의적 질서 만들어”

여가부는 ‘나다움 어린이책’ 7종 회수 결정을 내리면서 ‘문화적 수용성’을 언급했다. 김 교수는 “전통적 성윤리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성 억압이 우리를 비민주적이고 권위주의적 인물로 만들었다. 억압과 권위의 질서를 택할 것인가, 자유 민주주의 질서를 택할 것인가”라고 반문했다.

김 교수는 “아이들이 성에 대해 절대로 가져선 안 되는 게 죄의식이다. 성은 생명의 문제다. 인간의 가장 내밀한 인권 영역이다. 생명과 인권에 대한 책임의식을 강하게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은 성에 죄의식이 강한 반면, 생명과 인권에 대한 책임의식은 낮다. 성교육은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성범죄에 대한 처벌은 관대하다. ‘n번방’은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태어난 괴물이다. 그는 “성교육의 부재가 아이들의 악마성이 자라는 토대가 됐다. 또 한국 교육이 파탄 상태라는 걸 보여준다”며 “가해자들의 평범성에 놀랐다. 악인이 아닌 평범한 얼굴의 가해자들이 보인 잔혹성, 성착취를 통해 돈 계산을 하는 냉혹성에 놀랐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n번방 사건 이후 법무부 강의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여러분은 한국 교육 최고의 모범생이다. 다른 면에서 한국 교육 문제를 내면화하고 있다. n번방과 여러분의 거리는 그렇게 먼 게 아니다. 한나 아렌트는 ‘무지는 용서할 수 있다. 무사유는 용서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한국 사법의 역사가 무사유의 역사이기도 하다. 독재정권 아래서 사법살인이 벌어졌다.”

성에 대한 객관적 지식을 전달하고, 올바른 이해를 도우려는 성교육은 한국 사회에서 너무나 쉽게 공격받고 좌절되곤 했다. 해외에서 수십년간 널리 읽히는 책들이 ‘조기성애화’ 비판에 손쉽게 ‘문제적’이 되는 현실, 정부가 사회적 논의로 합의를 끌어내기보다는 문제를 회피하려고 회수라는 손쉬운 결정을 내리는 현실은 ‘교육의 실패’라는 김 교수의 지적과 맞닿아 보인다. 한국 교육은 성교육 문제에서 또 한 번 실패했다.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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