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반정

仁祖反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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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623년 이귀, 김유 등 서인 일파가 정변을 일으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인조를 왕위에 앉힌 사건.

1623년 4월 11일(음력 3월 12일)에 이서(李曙)·이귀(李貴)·김유(金瑬) 등 서인(西人) 세력이 정변을 일으켜 광해군을 왕위에서 몰아내고 능양군(綾陽君) 이종(李倧)을 왕으로 옹립한 사건이다.

16세기 중엽 정치의 주도권을 장악한 사림(士林) 세력은 서원을 중심으로 결속이 강화되면서 붕당(朋黨)을 형성하였다. 1575년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으로 나뉜 사림은 선조 후기에 동인이 다시 낙동강 동쪽의 이황(李滉) 계열은 남인(南人), 서쪽의 조식(曺植) 계열은 북인(北人)으로 당색을 달리하게 되면서 서인과 남인, 북인이 서로를 비판·견제하는 정국이 형성되었다.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정인홍(鄭仁弘), 곽재우(郭再祐) 등 조식의 문인들이 의병활동에서 공을 세우면서 북인이 정치적 주도권을 잡았으나, 내부의 결속이 약한 북인은 대북(大北)과 소북(小北) 등의 분파로 나뉘었다. 선조는 왕권 유지를 위해 유영경(柳永慶)을 중심으로 한 소북 계열의 척신(戚臣)들을 중용하였고, 이들은 세자인 광해군(光海君)이 빈(嬪) 소생이자 둘째아들이라는 이유로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소생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새로 세자로 옹립하려고 했다. 하지만 선조가 갑자기 죽으면서 그러한 시도는 실현되지 못했고, 광해군이 대북파의 지원을 받아 왕위에 올랐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으로 황폐화된 국가체제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명(明)·청(淸) 교체기의 국제 현실에서 균형 있는 중립외교를 펼쳐 조선의 안보를 유지하려 했다.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하고, 군적(軍籍) 정비를 위해 호패법을 실시했으며, 《동의보감(東醫寶鑑)》 등의 서적을 간행하였다. 하지만 붕당 간의 대립이 심화된 상태에서 왕권의 기반은 매우 취약했다. 그래서 16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을 일으켜 왕위를 위협하던 영창대군(永昌大君) 세력을 제거하고, 1617년에는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존호를 삭탈하고 경운궁(慶運宮)에 연금시키는 등 왕권을 둘러싼 갈등이 날카롭게 드러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성리학적 윤리관에 기초하고 있던 사림 세력에게 패륜으로 비판을 받았으며, 중립외교로 후금(後金)과 평화관계를 유지한 것도 사림 세력에게는 명나라에 대한 명분과 의리를 저버린 행위로 비판되었다.

계축옥사로 서인과 남인은 대부분 조정에서 쫓겨나고 대북파가 정권을 장악하였는데, 김유(金瑬)·이귀(李貴)·이괄(李适)·최명길(崔鳴吉) 등 서인 일파는 사림 세력의 이러한 불만을 이용하여 정변을 꾀했다. 1620년 광해군의 조카인 능양군(綾陽君)과 가까웠던 이서(李曙)·신경진(申景禛)·구굉(具宏)·구인후(具仁垕) 등이 정변을 모의하고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김류(金瑬)·이귀(李貴)·최명길(崔鳴吉)·장유(張維)·심기원(沈器遠)·김자점(金自點) 등이 모의에 참여하면서 더욱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이들은 1622년(광해군 14) 가을에 이귀가 평산부사(平山府使)로 임명된 것을 계기로 군사를 일으키려 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었다. 하지만 대간(臺諫)이 이귀를 잡아다 문초할 것을 청하였으나 심기원과 김자점이 후궁에 청탁을 넣어 사건은 흐지부지되었다. 그 뒤 반정 세력은 장단부사(長湍府使)로 있던 이서가 덕진(德津)에 산성을 쌓는 것을 감독하게 되자, 그곳에 군졸을 모아 훈련시키며 정변을 준비하였다.

반정세력은 이듬해인 1623년 음력 3월 12일을 거사일로 정해 준비하였다. 그리고 훈련대장 이흥립(李興立)을 한편으로 끌어들이고, 장단부사 이서와 이천부사(伊川府使) 이중로(李重老) 등이 군졸을 이끌고 모여들었다. 하지만 이이반(李而攽)이 이 사실을 고변하여 정변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었다. 그래서 정변이 예정되었던 3월 12일 저녁에 박승종(朴承宗) 등은 추국청(推鞫廳)을 설치해 고발된 모든 사람을 체포하려 했다. 하지만 후궁과 연회를 벌이던 광해군은 이를 재가하지 않았고, 붙잡았던 이흥립마저 풀어주었다. 결국 이이반의 고변으로 상황이 더욱 급박해진 반정세력은 예정대로 정변을 추진하기로 했다. 능양군은 친병(親兵)을 이끌고 연서역(延曙驛)으로 가서 이서 등과 합류하였는데, 무리가 1,400여명이 되었다. 이들은 삼경에 창의문(彰義門)의 빗장을 부수고 도성으로 들어가 곧바로 창덕궁(昌德宮)으로 갔다. 이흥립은 궁궐을 지키던 병사들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여 내응하였고, 초관(哨官) 이항(李沆)이 돈화문(敦化門)을 열어 반정세력을 궐 안으로 끌어들이면서 정변은 손쉽게 성공하였다.

광해군은 후원문(後苑門)으로 의관(醫官) 안국신(安國臣)의 집으로 피신하였으나 곧바로 붙잡혀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능양군은 새벽에 조정의 관리들을 소집하여 병조참판 박정길(朴鼎吉) 등을 참수하였으며, 광해군의 총애를 받던 상궁(尙宮) 김씨(金氏)와 승지 박홍도(朴弘道) 등도 그 자리에서 죽였다. 그리고 경운궁에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의 존호를 회복시켜준 뒤에 그 권위를 빌어서 조선의 제16대 왕인 인조(仁祖)로서 왕위에 올랐다.

인조반정 이후 정변에 공을 세운 이귀와 김류 등은 정사공신(靖社功臣)으로 봉해졌다. 그리고 광해군 때의 집권세력이던 대북파의 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 등 수십 명이 처형되었고, 200여 명이 유배되었다. 정변 이후 광해군 때에 조정에서 물러났던 서인과 남인의 진출이 활발해지고, 이들이 공존 관계를 형성하면서 붕당정치가 더욱 본격화하였다. 하지만 그해에 인조반정에 반대한 황현(黃玹)과 이유림(李有林) 등의 역모 사건이 벌어지고, 이듬해인 1624년에는 반정공신이던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켜 인조가 공주까지 피난을 가는 상황이 벌어질 정도로 왕권의 기반은 허약하였다. 특히 서인세력은 반정의 주역으로서 정국을 주도하며 왕권을 제약하였다. 또한 성리학적 윤리관에 기초해 명분과 의리를 내세운 인조반정은 광해군 때의 중립외교정책을 패륜으로 비판하면서 친명배금정책을 낳았다. 이러한 정책은 결국 정묘호란(丁卯胡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을 불러와 임진왜란 이후 이제 막 수습되어 가던 국가의 기반과 경제를 다시금 파탄 상태로 몰아넣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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