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프리즘] 페미니즘과 혐오 사이 / 선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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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9.04.14. 오후 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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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왜곡으로 물의를 빚은 김순례 자유한국당 의원이 12일 오후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린 자유한국당 책임당원협의회 임원출범식에 참석하고 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지난 여름 ‘혜화역 시위’에 취재 나온 남성 기자들이 현장에서 ‘멘붕’에 빠진 이야기를 기사로 쓴 적이 있다. 당시 주최 쪽은 ‘생물학적 여성’에게만 폴리스라인 안쪽 출입을 허가했다. 남성 기자들은 난생처음 ‘유리천장’을 마주해야 했다. ‘생물학적 여성’이라는 이유로 그 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었던 나는 솔직히 그 모습이 조금은 통쾌하게 느껴졌다.

통쾌함은 이내 곧 혼란스러움으로 바뀌었다. ‘여경과 남경의 비율을 9 대 1로 맞추라’는 황당한 주장(물론 대개의 정치적 구호란 그런 식이다)은 둘째 치더라도, 시간이 흐를수록 현장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혐오 발언을 듣고 있기가 괴로워졌다. 불법촬영물을 “찍는 놈도, 올린 놈도, 보는 놈도 엄중처벌”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범죄를 규탄하기 위해 “한남 재기해”(한국 남자 죽어라) 같은 혐오 표현까지 용인해야 하는가 의문이 들었다.

혜화역에서 보고 들은 모든 걸 기사에 옮겨 쓸 수는 없었다. ‘있는 그대로’의 이야기가 기사로 나갔을 때, 자칫 혜화역 시위의 취지가 훼손되거나 더 나아가 미투 운동에 대한 정치적 공격이 더 강화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다. “두려움 없이 살게 해달라”며 거리로 뛰쳐나온 여성들을 심정적으로 지지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날 혜화역에 있었던 ‘생물학적 여성’ 기자들의 마음은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고민이 다시 시작된 건 일주일 전이었다. 지난 8일 숙명여대 총학생회는 ‘5·18 망언’을 한 자유한국당 김순례 의원을 비판하는 성명을 냈다가 철회했다. 총학생회가 밝힌 철회 이유들 중에 가장 당혹스러웠던 내용은 ‘생물학적 여성’인 김 의원을 규탄하는 것이 ‘여성혐오’에 해당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는 지난 2월19일 열린 총학생회 중앙운영위원회 임시회의에서 성명 철회를 최초로 주장한 동아리연합회장이 내세웠던 근거이기도 했다.

‘여성을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혐오를 정당화하거나 옹호할 수 있을까. 사실 그 답은 나와 숙대생 모두 이미 알고 있다. “여성 피해자가 존재하는 집단에게 욕을 한 여성의원을 여성이라는 이유로 감싼다면, 여성연대에서 피해자 여성을 배제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여성이라는 정체성은 공유하지만 피해자보다 김순례 의원은 정치적·사회적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 적힌 2월28일 9차 정기회의 속기록에 그 답이 담겨 있다. 그럼에도 학생들은 선뜻 성명 철회를 막아서지 못했다. ‘5·18 망언’의 심각성에 공감하면서도 동시에 생물학적 여성으로 ‘저평가’받는 자신의 삶에 ‘막말 국회의원의 모교 출신’이라는 낙인을 더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들의 침묵이 공동체의 가치를 저버리는 건 아닌지 걸리는 마음도 여전했다. 학생들 사이에서 “(공개적인) 성명을 철회하는 대신 김순례 의원에게 이메일을 보내 5·18 피해자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자”(지난 4일 열린 14차 정기회의 속기록)는 대안이 거론된 이유다.

‘혜화역 시위’로 상징되는 20대 페미니스트들은 이런 현실을 더 이상 외면해선 안 된다. 페미니즘을 앞세워 혐오를 정당화할수록, 페미니스트를 지지하던 사람들은 점점 그들의 곁을 떠나게 될 것이다. 숙대 캠퍼스에서 취재하며 만난 학생들 가운데에는 교내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보이는 일부 페미니스트들의 혐오 발언에 질려 커뮤니티를 떠나거나 페미니즘을 외면하게 됐다고 밝힌 이들이 적지 않았다. 김 의원을 규탄하는 성명이 철회된 것도 다수가 침묵하는 사이 소수의 급진 페미니스트들이 ‘총공’(총공격)을 펼쳐 여론을 뒤집은 결과라는 분석이 나온다.

지난 12일 숙대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지난 1월 당선 공고를 게시하지 않은 사실을 들어 동아리연합회장에게 ‘당선무효 및 직위상실’을 공고했다. ‘생물학적 여성’인 김 의원 규탄이 ‘여성혐오’라고 주장했던 그 동아리연합회장이다. 이것은 과연 우연일까.

선담은
24시팀 기자


s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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