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잡스와 70대 이병철의 만남, 애증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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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0.03.23. 오후 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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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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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기자가 쓴 책 '삼성의 부상(Samsung Rising)'
이병철 만난 잡스, 끊임없이 수다 떨며 대화
다 들어주던 이병철 "잡스는 IBM에 맞설 인물"
"미국 삼성 직원들, 애플 이기려 사과 먹어"
삼성의 경직된 문화엔 "왕조같다" 비판도



삼성전자를 대표하는 ‘갤럭시(Galaxy)’ 브랜드는 어디에서 왔을까?

이코노미스트와 월스트리트 저널 등의 한국 통신원으로 근무하며 삼성을 취재한 제프리 케인은 지난 17일 미국에서 출간된 ‘삼성의 부상(Samsung Rising)’이란 책에서 전직 삼성 고위 임원과의 인터뷰를 통해 갤럭시 브랜드의 출발을 이렇게 설명했다. “삼성의 고위임원들은 한 병에 95달러짜리 텔라토(Terlato)사의 ‘갤럭시’란 레드 와인을 즐겨 마셨다. 이것(와인)이 나중에 갤럭시란 이름을 선택하는데 영향을 줬다.” 삼성의 프리미엄 스마트폰 브랜드 갤럭시는 고급 와인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삼성은 이 주장에 대해 “터무니 없는 얘기”라며 “갤럭시란 이름은 은하계(갤럭시·galaxy)처럼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기를 바라는 뜻에서 삼성전자 내부 토론을 통해 결정됐다”고 밝혔다.

‘삼성 라이징’은 미국인 기자의 눈으로 본 ‘삼성 해설서’이다. 부제는 ‘삼성이 애플을 물리치고 기술 시장을 장악한 내막(The Inside Story of the South Korean Giant That Set Out to Beat Apple and Conquer Tech)’로 삼성이 어떻게 소니와 애플 등과 경쟁하며 세계적인 기업으로 우뚝 섰는지를 다루고 있다. 케인은 IT분야를 주로 취재하는 기자로 한국에서 5년간 취재했고 이 책을 쓰기 위해 약 400명을 인터뷰 했다고 밝혔다. 이 책의 한국어판은 오는 5월쯤 나온다.

지난 19일(현지시각) 워싱턴DC 인근 버지니아주 애넌데일의 한 카페에서 '삼성의 부상'을 쓴 제프리 케인이 책을 들고 웃고 있다. /애넌데일=조의준 특파원


저자는 책의 상당 부분을 삼성과 애플의 경쟁에 할애했다. 삼성과 애플의 첫 만남은 1983년 11월로 거슬러 올라온다. 당시만 해도 서구에선 삼성을 ‘삼-썩(suck·형편없는)’이라고 조롱하기도 할 때였다. 컴퓨터 회사 ‘애플’의 28살 사장이었던 스티브 잡스는 최신 메모리 반도체를 얻기 위해 삼성을 찾아 당시 이병철 회장을 만났다. 캘리포니아 출신 수다스런 20대의 잡스는 당시 70세가 넘었던 이 회장 앞에서 끊임없이 수다를 떨었지만 이 회장은 이를 모두 들어줬다. 이 회장은 이후 “잡스는 IBM에 맞설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이렇게 맺은 인연은 애플이 사상 첫 스마트폰인 아이폰을 개발할 때 빛을 발한다. 애플은 2006년 2월 삼성에게 아이폰에 들어갈 새로운 반도체 칩을 5개월안에 개발해달라는 사실상 불가능한 주문을 한다. 그러나 당시 황창규 삼성전자 사장 등의 삼성 기술진은 애플의 요구 조건을 맞췄고 이듬해 1월 역사적인 사상 첫 스마트폰인 아이폰이 출시될 수 있었다. 삼성이 없이는 아이폰도 없었던 것이다.

삼성그룹 창업주인 고 이병철 회장(왼쪽)과 그의 아들인 이건희 회장(오른쪽)/조선일보DB


그러나 삼성과 애플의 밀월은 오래가지 못했다. 삼성이 갤럭시 스마트폰을 출시하면서 본격적인 경쟁자가 됐다. 케인은 책에서 한때 미 텍사스의 삼성전자 직원 휴게실과 엘리베이터엔 사과가 가득 쌓여 있었다고 주장했다. 삼성은 직원들이 쉬면서 사과(apple·애플)를 한 입씩 베어 물고 애플을 이겨야 한다는 목표를 잊지 않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삼성전자는 이에대해 “내부에서 직원들끼리 농담삼아 하던 얘기로 실제로 사과를 갖다 놓지는 않았다”고 했다.

삼성과 소니의 신경전도 흥미롭다. 소니가 소유한 컬럼비아 영화사는 지난 2002년 개봉한 영화 ‘스파이더맨’의 뉴욕 타임스퀘어에 거리 장면에서 삼성 광고판을 고의로 지운 뒤 ‘USA투데이’ 신문 광고로 바꿨다. 당시 언론엔 컬럼비아 영화사의 조치에 격분한 광고판 소유의 건물주들이 소송 등 항의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 책에 따르면 실제로는 삼성의 법률팀이 뒤에 붙어 이들의 소송을 직접 지원했다.

그러나 미국인 저자의 눈이 삼성에 따뜻한 것만은 아니다. 케인은 이 책의 소개 이메일을 한국 특파원들에게 보내면서 책 제목을 ‘삼성 제국’이라고 써서 보냈다. 영어판 제목은 분명히 ‘삼성의 부상(Samsung rising)’이라고 해놓고, 한글로 ‘삼성 제국’이라고 옮긴 것은 미국인이 눈으로 봤을 때 그만큼 삼성의 기업 문화를 왕조처럼 느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실제 케인은 지난 19일 특파원들과 만나 “이것은 세계적인 기술 회사를 운영하는 가족 왕조의 이야기”라며 “이 책을 쓰는 데 가장 흥미로운 부분 중 하나”라고 말했다.

삼성의 임원들이 즐겨마신 것으로 알려진 와인 회사 텔라토(Terlato)의 ‘갤럭시’와인./텔라토 홈페이지 캡쳐


케인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1980년대 심각한 교통사고를 당한 뒤 치료하는 과정에서 진통제에 중독된 적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에대해 삼성전자는 “사실 무근”이라고 했다. 이 책은 삼성 오너 일가의 각종 구설과 사건·사고도 함께 다루고 있다.

그는 그럼에도 삼성이 세계적인 기업이 된 것은 삼성 오너 일가의 현명한 판단이 있었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케인은 “냉전이 끝나고 전 세계가 개방되고 경쟁에 들어갔을 때 그(이건희)는 변화를 미리 내다본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며 “그는 삼성이 위대한 회사가 되기 위해 모든 것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예견했고, 만일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삼성은 오늘날처럼 주요 회사가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워싱턴=조의준 특파원 joyjune@chosun.com] [김성민 기자 dori2381@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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