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삶을 '갈아 넣고'···폭행도 착취도 “IT업계 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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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9.01.07. 오후 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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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IT 업계 ‘무법천지’ 왜?
ㆍ하루 15시간 일한 앱디자이너…2년 반 동안 받은 돈 ‘15만원’
ㆍ“당신이 회사 주인” 희생 강요…‘버티면 성공’ 세뇌하며 ‘갑질’

양진호 한국미래기술 회장(왼쪽)과 송명빈 마커그룹 대표.


“넌 수순대로 작업해줄게. 너 내 성격 모르지?”라는 양진호 한국미래기술 회장부터 “넌 죽을 때까지 맞아야 한다”는 송명빈 마커그룹 대표까지….

최근 한국 사회를 분노하게 만든 두 ‘직장 갑질’ 사건은 정보기술(IT) 업계에서 발생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양 회장 폭행 사건 이후 직장 내 괴롭힘을 막기 위해 이른바 ‘양진호 방지법’이라고 불리는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지난해 말 국회를 통과했지만, 법안 통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디지털 소멸 분야’ 최고 권위자로 꼽혔던 송 대표가 직원을 잔인하게 폭행하고 협박한 사실이 경향신문 보도(2018년 12월28일자 1·3면, 29일자 1·4면)로 드러났다.

‘첨단 사업’으로 꼽히는 IT업계에서 이 같은 ‘전근대적’ 폭행사건이 왜 반복될까. 업계 관계자들과 전문가들은 ‘당신이 회사의 주인’이라며 노동자에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스타트업 분위기, 평판을 중시하는 좁은 업계 특성 탓에 굳어진 수직적 상하 관계, 프리랜서 등 만연한 비정규직 고용 및 하청구조를 원인으로 꼽는다.

“성공을 위해 필요한 과정인 줄 알았습니다. 돌이켜보면 사이비 종교에 빠진 것 같아요.”

김현우씨(25)는 2014년부터 2년 반 가까이 한 IT업체에서 애플리케이션 디자이너로 근무했다. 대학을 휴학하고 군 입대도 미룬 채 20명 정도의 동료들과 숙소생활을 했다. 회사 대표는 김씨에게 ‘월급을 받을지, 지분을 받을지’ 선택하라고 했다. “지분을 받으면 스타트업 회사의 창립멤버가 되지만, 월급을 받으면 일용직 노동자로 대하겠다”고도 했다. 김씨는 월급 대신 지분을 택했다. 계약은 구두로 이뤄졌다. 대표는 “서류를 만들면 지분관계가 복잡해져 스타트업 지원을 받을 때 불리하다”고 설명했다. 김씨가 2년 반 동안 하루 평균 13~18시간 일하고 받은 돈은 단 15만원이다. ‘용돈’이었다.

김씨는 “회사가 감옥 같았다”고 했다. 회사에서 먹고 자면서 친구나 가족과 연락이 끊겼다. 직원들은 서로를 감시했다. 조금만 쉬어도 사내에서 문제가 됐다. 쉬다 걸리면 자아비판을 해야 했다. 대표는 “성공하려면 개인 삶을 줄여야 한다. 지분 분배를 다시 고려하겠다”고 협박했다.

김씨는 집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김씨는 “회사는 부당한 일을 ‘성공을 위한 고난’으로 포장했다. 버티지 못하면 성공하지 못할 거라고 세뇌했다”며 “많은 개발자들이 이런 말에 속아 ‘갑질’을 견딘다”고 했다.

■ 바닥 좁아 찍히면 ‘블랙리스트’…양진호 방지법도 갑질 못 막아

‘무법천지’ IT업계, 왜?

원청, 하청 직원들 부당한 일 당해도 책임 안 지는 구조

무리한 일정 강요·책임 전가·일방적 해고 ‘비일비재’

종사자 503명 중 42% “언어폭력” 절반은 “자살 충동”


양도수씨는 지난해 하이마트 시스템을 관리하는 하청업체 소속으로 일했다. 양씨는 원청 직원들의 퇴근시간 이후 업무 지시 등을 항의했다. 원청 직원들은 무리한 개발 일정에 따라 발생한 업무 문제 책임을 양씨에게 전가했다. 퇴근시간 이후 지시 등도 잦았다. 양씨가 이 문제를 항의하자 원청 측 팀장과 매니저가 욕을 하며 양씨를 폭행했다.

양씨는 “원청 직원들은 ‘난 잘 모르겠고, 내일까지 해놔’라는 식으로 업무 지시를 한다”며 “정보기술(IT)업계에서 원청 기업 갑질이 일상화돼 있다”고 말했다.

한국 후지쯔의 하청회사와 계약한 유모씨는 미쯔비시은행 서울지점의 시스템유지관리(SM)업무를 담당했다. 유씨의 채용면접 및 업무지시와 근태관리는 모두 한국 후지쯔측이 했다. 어느날 한국 후지쯔는 유씨에게 일방적으로 계약 종료를 통보했다. 유씨가 e메일로 계약 종료 사유를 물었다. 그러자 한국 후지쯔가 아닌 하청업체 측 관계자가 연락이 왔다. “IT업계는 바닥이 좁고 ‘블랙리스트’가 있다. 모든 화는 당신에게 돌아간다”는 협박이었다.

유씨는 “채용부터 해고까지 모두 한국 후지쯔가 했다”며 “위장도급이었다”고 말했다. 결국 유씨는 한국 후지쯔를 상대로 '해고무효확인 청구 소송'을 냈다. 한국 후지쯔는 김앤장 법률사무소를 선임해 대응중이다.

정연아 한국정보통신산업노동조합(IT노조) 조직국장은 “만연한 갑질 피해 사례를 보면 노동자에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분위기, 비정규직 고용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고 말했다.

IT노조와 이철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지난해 11월 503명의 IT 종사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노동실태 조사를 보면, 응답자 중 약 42%가 업무 중 언어폭력을 당했고, 약 4%는 신체적 폭력도 경험했다. 절반 이상이 “자살 충동을 느낀다”고 응답했다. 정 조직국장은 “일부 대표의 경우 대학을 갓 졸업하거나 재학 중인 직원에게 ‘네가 회사의 주인이다’라며 지분계약을 맺고, 갑질을 견디는 것을 성공을 위한 과정처럼 정당화한다”고 했다.

프리랜서 등 비정규직 고용이 늘어나면서 피해자들이 ‘갑질’에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는 것도 원인으로 꼽힌다. 정 조직국장은 “사람을 고용해 업무를 배우게 해야 하는데 업계에서는 경험 많은 프리랜서를 선호하는 분위기”라며 “고용이 불안정하다 보니 부당한 일을 당해도 참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IT업계는 끝없는 하도급 구조”라며 “원청이 하청을 주면 이를 받은 업체는 또 다른 업체에 하청을 주고, 이렇게 4~5개 단계를 내려가면 원래 예산이 반토막 난다”고 했다. 이어 “제일 마지막이 이른바 ‘보도방’이라 불리는 인력소개 업체인데 프리랜서들이 이곳에서 일을 얻는다”며 “월급을 받지 못하거나 피해를 입어도 원청은 책임지지 않는 구조”라고 말했다.

법·제도의 미비 문제도 있다. ‘IT업계의 노동실태에 관한 법률적 분석’을 담당한 하태승, 장재원 변호사는 “최근 국회에서 통과된 근로기준법·산업재해보상보험법 일부 개정법률안(양진호 방지법)도 직장 내 괴롭힘 문제를 완전히 막지는 못할 것”이라고 했다. 하 변호사는 경향신문과의 통화에서 “‘양진호 방지법’이 사용자와 노동자 간의 괴롭힘 문제에 국한됐다”며 “고객이나 원청업체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는 것에 대한 대책이 없다”고 했다. ‘양진호 방지법’이 시행되더라도 양씨처럼 원청업체나 발주자로부터 괴롭힘을 당한 IT 노동자들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가 근로기준법에 규정돼 있기 때문에 근로계약 대신 프리랜서 계약을 하는 IT 노동자 상당수가 보호받지 못하는 점, 사용자가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해 적절한 조치를 취할 의무는 있지만 위반 시 형사처벌 등 불이익이 없어 실효성이 떨어지는 점도 법의 미비점으로 꼽힌다. 프리랜서는 근로관계에 따른 종속성이 없고 노동법규 역시 적용받지 않는다. 이 경우 발주자나 사용자는 근로기준법·최저임금법 등에서 정한 각종 의무를 준수하지 않아도 된다.

‘2018 IT노동자 노동실태 조사’에 따르면 사측의 일방적 요구로 프로젝트가 중단된 경험을 한 노동자는 전체의 45.7%에 달했다. 이 중 정규직은 36.4%, 프리랜서는 65.6%였다. 보고서는 “프리랜서는 미래가 불투명한 프로젝트에 투입될 가능성이 높고, 업무 중 스트레스도 훨씬 더 높다”고 해석했다.

프리랜서의 91.2%가 원하는 장소가 아닌 사무실 등 지정된 장소에서 근무했다. 79.8%가 월급제로 임금을 지급받는 것으로 조사됐다. 형식은 프리랜서지만 사실상 고용된 노동자와 다름없는 것이다.

김찬호 기자 flyclose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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