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점

文益漸

두산백과

비슷한 글8
보내기 폰트 크기 설정

요약 고려 말기의 학자이자 문신으로 서장관으로 중국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목화씨를 가지고 들어와 장인인 정천익과 함께 목화의 보급에 크게 기여하였다.

매산서원
경기도 여주군 세종대왕면. 향토유적 제10호. 고려말의 학자이며 문신 삼우당 문익점(1329~1398)을 제향하는 곳이다. 처음 조선 세조때 문익점만을 모신 사당으로 건립되었으나 그후 목은 이색(1328~1396)과의 교우를 참작하여 후손과 유림들이 이색도 함께 모시도록 하고 서원으로 승격시켰다.
출생-사망 1329 ~ 1398
본관 남평(南平)
일신(日新)
삼우당(三憂堂)
시호 충선(忠宣)
출생지 강성현(江城縣:경남 산청)

출생과 관직

본관은 남평(南平)이며 자(字)는 일신(日新), 호(號)는 삼우당(三憂堂), 초명(初名)은 익첨(益瞻)이다. 진주(晉州) 강성현(江城縣, 지금의 경남 산청) 출신으로 아버지 문숙선(文淑宣)은 과거 시험에는 합격하였으나 벼슬을 하지는 않았다. 1360년(공민왕 9) 문과에 급제하여 김해부 사록(金海府司錄)으로 임명되었으며, 성균관(成均館)의 순유박사(諄諭博士)를 거쳐 1363년(공민왕 12)에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종육품(從六品) 벼슬인 좌정언(左正言)이 되었다. 

중국에서 목화씨를 가져옴

1360년 계품사(啓稟使)로 원(元) 나라로 파견된 좌시중(左侍中) 이공수(李公遂)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중국을 방문하였다. 고려로 돌아오는 길에 목면(木緜) 나무의 씨앗을 가지고 들어왔다. 당시 붓두껍에 목화씨를 몰래 숨겨서 가지고 들어왔다는 이야기도 전해지지만 이는 후대에 그의 업적을 추앙하는 과정에서 긴장감을 높이기 위해 덧붙여진 이야기로 추정되며,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태조 7년 6월 13일자에는 “길가의 목면 나무를 보고 그 씨 10여 개를 따서 주머니에 넣어 가져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태종 1년 윤3월 1일자에도 “목면 종자 두어 개를 얻어 싸 가지고 와서”라고 기록되어 있어 가지고 들어온 씨앗의 수는 차이가 있지만 붓두껍에 감추어 들어왔다는 이야기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목화재배

사행(使行)을 마치고 돌아온 문익점은 1364년 고향인 진주(晉州)로 내려가 장인인 정천익(鄭天益)과 씨앗을 나누어 목면나무의 재배를 시험하였다. 그가 심은 것은 모두 재배에 실패했지만, 정천익이 심은 씨앗 가운데 하나에서 꽃이 피어 100여개의 씨앗을 얻었다. 해마다 재배량을 늘려서 1367년에는 향리(鄕里) 사람들에게 씨앗을 나누어주며 심어 기르도록 권장하였다. 그리고 정천익은 호승(胡僧)인 홍원(弘願)에게서 실을 뽑고 베를 짜는 기술을 배워 10년이 되지 않아서 나라 전체에 목면(木棉) 재배와 무명이 보급되었다.

이러한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문익점은 고려 우왕 때인 1375년(우왕 1)에 전의주부(典儀注簿)로 등용되었으며, 1389년에는 중서문하성의 간관(諫官)인 정사품 좌사의대부(左司儀大夫)가 되었다. 그러나 공양왕 때 이성계(李成桂) 일파에 의하여 추진된 전제개혁(田制改革)에 반대했다가 조준(趙浚)의 탄핵으로 벼슬에서 물러났고, 1398년(조선 태조 7)에 7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업적평가

조선 시대에 들어와 문익점은 중국에서 목면(木綿)을 가져와 직조(織造)를 가르쳐 백성들을 크게 이롭게 했다며 매우 높이 숭앙되었다. 그가 죽은 뒤에 태조는 그에게 참지의정부사 예문관 제학 동지춘추관사(參知議政府事藝文館提學同知春秋館事)의 직위와 강성군(江城君)의 봉호(封號)를 추증하였으며, 태종 때에는 그의 아들인 문중용(文中庸)에게 사헌감찰(司憲監察)의 벼슬을 내렸다. 세조 때에는 그의 관향(貫鄕)에 사당을 세워 해마다 두 차례씩 제사를 지내게 했으며, 그를 백성을 부유하게 만들었다는 뜻에서 ‘부민후(富民候)’로 추봉하는 한편 ‘충선(忠宣)’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또한 정조 때인 1785년에는 그의 위패를 안치한 서원에 임금이 직접 도천서원(道川書院)이라는 이름을 지어 그것을 새긴 액자를 보냈다.

한편, 최근 백제 시대의 유적지인 부여 능산리 절터의 출토 유물에서 목면으로 된 직물이 발견되어 삼국시대에도 면직이 이루어졌음이 확인되었다. 14세기 후반 문익점이 목화씨를 가지고 들어오면서 면직이 시작되었다는 기존의 인식은 잘못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삼국사기(三國史記)≫나 ≪양서(梁書)≫, ≪한원(翰苑)≫ 등의 기록을 근거로 품종은 다르지만 삼국시대 이전부터 모, 마, 면 등을 직조해 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연구들로 문익점이 목화씨를 가져오면서 면직물 생산이 처음 시작되었다는 기존의 통설은 비판되고 있지만, 문익점과 정천익의 목면 재배와 보급이 면직물 생산을 널리 보급하는 데 기여하여 백성들의 옷감이 삼베에서 무명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사실은 부정되지 않는다.

문익점 유적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 문익점 면화 시배지(始培地)가 사적 제10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산청군 신안면 신안리에는 문익점의 묘소와 함께 그의 공적을 기리는 신도비(神道碑)가 세워져 있다.

출처

출처 도움말
확장영역 접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