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한방울이면 다 된다더니"…희대의 사기꾼 '여자 잡스'의 추락 [그 w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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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1.10.18. 오전 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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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지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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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세계인의 관심이 집중됐던 화제의 인물, 그 후를 조명합니다.

[<1>미국 실리콘밸리 슈퍼스타 평가받던 전 '테라노스' 창업자 엘리자베스 홈즈]

전 테라노스 창업자이자 최고경영자 엘리자베스 홈즈/사진=AFP
지난 2012년 미국은 실리콘밸리 총아로 떠오른 테라노스 창업자 겸 최고경영자(CEO) 엘리자베스 홈즈에게 홀려있었다. 피 한 방울만 있으면 200여개 질병 진단이 가능한 획기적인 기기 '에디슨'을 개발한 28세(당시 나이) 미모의 여성.

미국에서 가장 유망한 바이오 유니콘 업체 CEO이자 최연소 자수성가 여성 억만장자 대열에 올랐던 홈즈가 '희대의 사기꾼'으로 전락하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2015년 월스트리트저널(WSJ) 탐사보도 전문기자 존 캐리루가 전·현직 직원 160명을 인터뷰해 테라노스의 기술이 조작됐다는 사실을 폭로하면서 '실리콘밸리 신데렐라'의 유리구두는 벗겨졌다. 당시 한국에서는 '미국판 황우석 사건'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2018년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와 투자자들이 고소하면서 홈즈는 법정을 오가는 신세가 됐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과 홈즈의 임신 등 사유로 3년 가까이 중단됐던 재판이 최근 재개됐다. 변호인단과 함께 법원을 오가는 홈즈의 모습이 최근 언론에 공개되면서 미국인들의 분노도 다시 시작됐다.
테라노스는 피 한방울로 200여가지 질병을 진단할 수 있는 획기적인 키트를 개발했다고 주장해 시장의 주목을 받았다. /사진=테라노스


스탠퍼드 박차고 나와 19세에 테라노스 창업


엘리자베스 홈즈는 1984년 미국 워싱턴DC에서 태어났다. 정부 공무원으로 전 세계를 돌아다녔던 부모를 따라 어린 시절을 중국에서 보냈다. 홈즈가 유창한 중국어 실력을 갖춘 것도 이 때문이다. 이후 홈즈는 미국 최고 명문이자 스타트업 창업의 산실인 스탠퍼드대학교 화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이내 학교를 그만두고 19세에 창업에 뛰어 들었다. 싱가프로 게놈연구소에서 인턴으로 근무했던 경험을 살려 2003년 약물 전달 패치 관련 특허를 출원했는데 이 때부터 홈즈는 바이오 관련 특허에 집착했다. 창업 당시 회사 이름은 '리얼타임 큐어'였다. 누구나 저렴한 가격으로 건강 관리를 받을 수 있는 회사를 만들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그는 스탠퍼드대 인근 쇼핑몰 지하 창고를 얻어 사업을 시작했다. 창업 직후 600만달러 투자를 받은 홈즈는 2004년 회사 이름을 테라노스로 바꿨고 손 쉽게 질병을 진단할 수 있는 메디컬 키트 개발에 몰두했다. 하지만 테라노스는 창업 후 10년 가까이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러던 중 2012년 한 방울의 피로 200여개 질병을 진단할 수 있다는 문제의 에디슨을 공개하며 시장의 주목을 받았다.

테드메드 강연에 나섰던 엘리자베스 홈즈/사진=TEDMED 영상 캡처


'여자 잡스'의 등장…정치인·기업인도 속았다


엘리자베스 홈즈 스토리에 현지 언론 마저 속았다. 사진은 홈즈를 표지 모델로 선정했던 포브스지와 포춘지, 블룸버그 주말판./사진=각사 홈페이지 캡처
처음에 홈즈를 띄운 건 미국 언론이었다. 애플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와 비슷한 대학 중퇴 과정, 옷 고르는 시간이 아까워 검은색 터틀넥만 입는 패션 철학 등 스토리텔링이 더해지면서 홈즈의 인지도는 단숨에 높아졌다.

특히 19세의 스탠퍼드대 학생이 중퇴와 창업이라는 과감한 결정을 했다는 대목에서 대중들의 호감도가 급상승했다. 피 한방울이면 200여가지 질병 여부를 검사할 수 있고 비용도 종전의 10% 수준으로 저렴한 테라노스의 획기적인 기술에 미국 전체가 열광했다. 곳곳에서 강연 요청이 쇄도했고 투자하겠다는 제안도 물밀듯이 쏟아졌다. 사람들은 홈즈를 '여자 스티브 잡스'라고 불렀다.

유력 정치인과 기업인들도 엘리자베스 홈즈에 속았다. 사진은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주관한 행사에 홈즈가 참석해 대화하는 모습. /사진=AFP
정치인과 기업인도 경쟁적으로 테라노스와 손을 잡았다. 전설적인 외교관인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과 조지 슐츠 전 국무장관, 홈즈의 은사였던 채닝 로버트슨 스탠퍼드대 화학공학과 교수 등이 테라노스 이사진으로 합류했다. 조 바이든 당시 부통령과 빌 클린턴 전 대통령 등이 테라노스 연구실에 방문해 극찬하기도 했다.

언론계 큰손 루퍼트 머독의 투자도 받았다. 미국 시장 점유율 2위인 약국 체인 '월그린스'와 캘리포니아주 대표 유통업체인 '세이프웨이'가 매장 내에 테라노스 질병 테스트 센터를 열기도 했다. 심지어 미 국방부도 군에 테라노스 기술을 도입하려고 했다. 이 당시 홈즈는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제프 베조스, 마크 저커버그 등 뒤를 잇는 실리콘밸리의 슈퍼스타였다.


'미국판 황우석 사건'에 대충격…드러난 거짓말에 10조 가치 회사 0원으로


엘리자베스 홈즈는 실리콘밸리의 슈퍼스타였다. 각계에서 강연 요청이 쇄도했고 주요 행사에 빠지지 않고 초대를 받았다./사진=AFP
미국 대중들의 광적인 인기에 묻혔지만 바이오 업계 전문가들은 애초부터 테라노스 기술에 대한 문제점을 제기해 왔다. 홈즈의 거짓말은 언론 취재로 밝혀졌다. 월스트리트저널 기자는 테라노스의 기술이 모호한 데다 원리도 고등학교 과학 수업 수준에 불과하다는 점에 의심을 품고 취재를 시작했다. 수백명의 연구진과 전·현직 직원들은 "테라노스에는 에디슨이라는 기기를 만들 기술력이 없다"고 폭로했다.

테라노스가 획기적인 기기라고 했던 에디슨은 16가지 질병 외에는 진단이 불가능했다. 이는 동네 병원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기초적인 검사였고 나머지 200여개 질병은 기존의 대규모 의학 장비로 확인한 것이었다. 당연히 암 등 주요 질환은 전혀 진단하지 못했다. 심지어 원본 그대로 보존해야 하는 샘플을 조작하기도 했다.

2015년 10월 이 같은 사실이 공개되면서 미국 전역이 충격에 빠졌다. 홈즈는 "우리는 언젠가 그 많은 질병을 검사할 기술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망언을 했다. 이는 지난 2005년 줄기세포 복제기술 연구결과가 허구라고 밝혀진 뒤 황우석 전 서울대 교수가 "줄기세포를 입증하지는 못했지만 우리에겐 줄기세포를 만들 수 있는 원천기술이 있다"고 말한 것과 매우 비슷하다.

최근 법정에서 포착된 엘리자베스 홈즈/사진=AFP
미 식품의약국(FDA)은 테라노스에 시험 축소를 요구하고 나섰다. 테라노스의 투자자와 파트너가 모든 거래를 중단했다. 유통매장에 설치됐던 테라노스 테스트센터도 폐쇄됐다.

사기 행각이 드러나기 직전 홈즈는 31세에 포브스가 선정한 400대 부자 중 110위에 올랐다. 자수성가한 여성 부자 50위 중에선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600만달러 투자를 받아 시작한 테라노스 기업 가치는 90억달러(10조7600억원)로 평가받았다. 이 때문에 테라노스 지분 50%를 보유한 홈즈의 개인 재산도 45억달러로 집계됐다. 홈즈의 거짓말이 공개된 후 포브스는 잘못된 정보를 전달한 데 대한 사과 기사를 게재했다. 테라노스의 재산 가치는 '0달러'로 수정했다.


사기 혐의로 법정 들락날락 …'잡스 되기' 꿈은 결국 못 이뤘다


지난 8월 31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호세 연방법원에 출석하는 엘리자베스 홈즈/AP=뉴시스
미 증권거래위원회(SEC)와 투자자들은 지난 2018년 홈즈를 사기 혐의로 기소했다. SEC는 테라노스가 투자를 유치하는 과정에서 기술을 과대포장하고 매출을 속였다고 봤다. 이에 50만달러 벌금을 부과했고 10년간 상상기업 임원으로 활동하지 못하도록 했다.

37세가 된 홈즈는 현재 인터넷뱅킹 사기 혐의 10건과 공모 혐의 2건 등 검찰에 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다. 코로나19와 홈즈의 임신 등으로 3년간 미뤄졌던 재판이 지난 8월말부터 재개돼 공개진술 등이 이뤄지고 있다. 홈즈는 공개진술에서 당시 남자친구였던 테라노스 최고운영책임자(COO) 라메시 발와니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 자신은 아는 것이 없다며 책임을 떠넘긴 것으로 알려졌다. 또 홈즈의 변호인단은 "실패한 것은 범죄가 아니다"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고 전해졌다. 법원은 13주간 재판을 진행할 계획이며 유죄가 확정되면 홈즈는 20년의 징역형에 처해질 수도 있다.

최근 미 경제매체 CNBC가 단독 입수한 홈즈의 수첩에는 2015년 4월 2일 '스티븐 잡스 되기(Becoming Steve Jobs)'라는 메모가 적혀 있었다. 그는 잡스를 자신의 우상이라고 줄곧 말해 왔고, 사무실에 잡스 사진을 걸어놨을 정도로 잡스에 집착했다. 심지어 잡스의 식단과 생활방식까지 따라했다. 홈즈는 진정으로 잡스처럼 되고 싶은 꿈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끝내 그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미국 실리콘밸리 슈퍼스타였던 엘리자베스 홈즈는 사기 혐의로 기소돼 법정을 오가는 신세가 됐다./사진=AF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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