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최강의 反日 국가라고? 상류층은 日상품 최대 애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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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평양남자 태영호의 서울 탐구생활]
일러스트= 안병현

한·일 갈등이 고조되면서 일본 상품 불매운동이 일제 색출 운동으로까지 번지고 있다. 반일 감정이라면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북한에서는 일본 상품 불매운동이 없느냐고 묻는 지인들이 종종 있다. 답은 '노(No)'다.

한국 같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선 상품을 팔거나 살 권리가 기업과 개인에게 있지만 북한은 모든 상점이 국가 소유다. 특히 일본 상품을 판매하는 외화 상점의 기본 사명은 김씨 일가와 북한 정권 유지에 필요한 외화벌이다. 일본 상품 불매운동을 들고나오는 것 자체가 '반당·반혁명적인 반체제 활동'으로 분류될 수 있다.

또 다른 이유는 대북 제재로 일본과 북한 사이의 경제 거래가 얼마 없다는 점이다. 불매운동을 해봤자 일본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북한 정권의 이중적인 반일 정서와도 관련된다. 이 세상에서 가장 반일적인 나라로 알려진 북한의 기득권층은 아이러니하게도 일본 상품 최고 애호가다. 그들은 유럽이나 한국 상품보다는 일본 상품을 통해 자본주의 경제의 우월성을 먼저 터득했다.

1950년대 말부터 일본에서 '재포(북한에서 재일동포를 낮춰 부르는 말)'가 대거 북한으로 이주하면서 일본에서 쓰고 살던 물품을 대부분 가지고 왔다. 당시 평양 거리를 거닐던 재일동포들은 몸냄새부터 달랐다. 그들이 입고 있던 일본산 옷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내가 어릴 때 우리 마을에서 흰색 도요타 자동차를 몰고 다니는 재일동포가 있었다. 소련산 '볼가' 승용차밖에 보지 못했던 나는 정신없이 차 안을 구경했다. 반일 감정이 강했던 아버지는 "네가 크면 우리나라도 일본보다 더 멋있는 차를 만들게 될 것이다. 국산 차를 타고 주말이면 원산으로 해수욕 갈 것이다"고 하면서 일본 차를 부러워하지 말라고 했다.

1980년대 초부터 김정일의 지시로 북한에는 일본 상품을 들여다 파는 외화 상점들이 곳곳에 생겼다. 매달 북한 선박 '만경봉호'가 두 나라 항구를 오가면서 일본 상품을 들여왔다. 김정일이 일본산 TV, 내의, 냉장고, 녹음기 등을 부하들에게 하사하는 '선물 정치'가 시작됐다. 김정일이 하사한 일본산 선물이 집안에 몇 개 있는가가 간부들의 지위를 평가하는 잣대가 됐다. 내가 결혼할 때 간부였던 처가에서 김정일이 하사한 일본 도시바 '선물 TV'를 우리 집에 예단으로 보내줬다. 수십 년 썼는데 고장 한번 안 났다.

평양시 중심 구역인 모란봉 구역 북새거리에는 일본 상품만 전문으로 파는 류경상점, 북새상점 등이 있다. 북새거리는 '히타치 거리' '재포 거리'라고 불린다. 거기서 파는 전자제품, 술·맥주, 보석 등은 일반 주민은 혀를 내두를 정도로 비싸지만 부유층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구매한다.

김정일은 전속 일본 요리사를 옆에 두고 일본 스시를 즐겼다. 김정일 시대에는 영국산 담배 로스만과 일본산 마일드세븐이 인기였는데 김정은 시대에 들어서면서 엘리트층은 일본산 담배 '피스(PEACE)'로 바꾸었다. 요즘에는 높은 간부와 거래하려면 '피스' 정도는 주어야 이야기가 시작된다.

주민들에게 최고 인기 있는 일본 제품은 중고 자전거다. 오래 사용해도 튼튼해서 이동수단이나 장마당 장사를 위해 짐을 싣고 다니기에도 유용하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일본의 대북 제재로 수입 통로가 많이 막혔지만 2000년대 초에는 한 해에 몇만 대씩 들어왔다.

일제 중고 자전거는 품질에 따라 50~150달러 정도로 거래된다. 북한 사람들에게는 매우 높은 가격이지만 품질이 뛰어나기 때문에 중국산이나 북한산 새 자전거보다 선호한다. 소문으로는 북한으로 들어간 대부분 중고 자전거는 일본 지방 당국이 기차역 앞에 주인 없이 방치된 자전거를 고철업자들에게 판 것을 재일동포들이 다시 싸게 사서 북한으로 보낸다고 한다.

어서 통일이 되어 북한 사람들도 일본산 중고 상품 대신 품질이 뛰어난 한국산 새 상품을 마음대로 사고팔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의 내수 시장이 커져서 일본의 수출 규제와 같은 '폭거'도 맥을 추지 못할 것 아닌가.

[태영호 전 북한 외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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