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화기법 그림에 괴기 조형물까지 ‘복잡무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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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작가 이피, 31일까지 근작 전시
기형인간·몸 갈라진 쥐 모형 등
자신만의 독특한 기법·구도 뽐내


이피 작가의 혼합매체 설치작업 ‘내 여자의 창고를 열다’.

딱딱한 것들, 물렁한 것들, 냄새나는 것들, 반짝이는 것들, 흘러내리는 것들, 폭발하는 것들….

검은 먹 칠한 화면에 금가루와 다채로운 색깔을 입고 세상 만물의 요지경들이 반짝거린다. 주둥이 묶은 주머니 형상의 머리를 지닌 여인, 뻗은 손끝에서 식물의 새순과 마천루가 솟아오르는 기형인간이 활개를 친다. 주방 조리대엔 덩어리 모양의 산이 솟아오르고, 서울 거리 곳곳에서 증기와 물을 분출하는 화산들의 행렬도 보인다.

젊은 작가 이피(35)의 이 복잡무쌍하고 괴기스런 그림들은 너와 나, 사물과 생물이 하나로 녹아들거나 맞붙는 21세기의 만다라 같은 세계를 표현한다. 한 예술가가 자기 눈과 몸을 통해 받아들이는 세상 모든 것들의 이미지와 이야기들이 녹아든 도가니 그림이라 할 수 있을 법하다. 서울 소격동 트렁크갤러리에 마련된 그의 근작전 ‘천사의 내부’는 한국 현대미술의 어떤 흐름에도 포괄되지 않는 독특한 기법과 구도의 회화, 조형물들을 보여준다.

전시장에 가면 1층에서 불화 기법의 금가루 채색 그림들을, 2층에선 드로잉 연작과 쥐 모양을 한 설치조형물을 볼 수 있다. 작품마다 헤아리기 힘들 만큼 많은 도시 일상과 자연, 우주의 여러 장면, 사물들의 이미지들이 변형된 형태로 가득 들어차 있다. 한눈에도 작가가 느끼고 목격한 경험과 풍경의 이미지들을 촘촘하게 채워넣었다는 것을 직감하게 한다. 불화를 배운 작가는 식재료, 병, 장신구, 꽃, 나무 등과 같은 사물들을 금가루와 수채 안료로 채색해 장엄하게 그려넣는다. 그 위에 다기한 자세로 꿈틀거리나 기묘하게 변형된 동식물과 인체의 상을 넣어 그림을 완성한다.

전시 평문을 쓴 영화감독 전하영씨가 “세계가 작가를 통과하여 스스로 말하도록 하는 방식”이라고 짚은 것처럼, 출품작들은 세상을 투과시키는 렌즈로서 자신을 자리매김하는 작가 특유의 시선으로 그려졌다. 작가는 날마다 일기를 쓰듯 자신의 일상 경험들을 낱낱이 드로잉한다고 한다. 자기 전 드로잉을 복기하며 떠오르는 원초적인 체험의 형상들을 그림으로 물질화시켜 옮기는 것이 주된 작업 과정이다. 날마다 감각을 통과해 자아의 일부로 내화되곤 하는 다양한 세상 타자들이 개념화되기 전의 상태를 만질 듯 보여주려는 것이다. 자신에게 다가와 개념이나 의미가 되기 전의 순간 약동하는 여러 타자적 존재들의 생기를 형상화한 것이 바로 그의 작품인 셈이다. 쥐 모양의 몸체가 둘로 갈라지고 그 안에 수많은 붉은빛 돌기 조형물들이 빛나는 2층의 설치물 ‘내 여자의 창고를 열다’는 이런 작가의 생각을 가장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작가의 몸에 새겨진 시간과 사건, 사물, 인물, 관계들이 별도의 전체이자 부분으로서 그와 세상의 연결망을 보여주는 징표가 되는 것이다. 작가는 세상과 우주에 대한 제단화에 자신의 그림을 비유하면서 말한다. “작가는 단지 눈을 밖으로만 뜨고 세상의 문제를 질타하는 자인가. 거기서 존재의 알리바이를 구하는 자인가. 이런 의문이 이번 작품들의 화두다.”

미국 시카고 아트인스티튜트에서 공부한 작가는 이강백 연출가, 김혜순 시인 부부의 딸이기도 하다. 31일까지. (02)3210-1233.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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