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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14. 오늘의 희망/마8:14-17(기적3: 베드로 장모의 열병 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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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3. 16.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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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14.
제목: 오늘의 희망
본문: 마 8:14-17

14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15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
16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1. 본문설명: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
2. 기복신앙의 문제들
3.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다 고치시니’
4. 오순절 교회의 희망
5. 십자가가 뿌리 내려고 있는 이 땅에서의 오늘의 희망

 

 

1. 본문설명: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집을 방문하시고, 사위의 집에 병들어 누워있던 베드로의 장모를 주님이 치료해주셨다는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과 동일한 사건을 마가복음 1장과 누가복음 4장에서도 소개하고 있는데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베드로의 장모가 앓고 있는 병이 ‘열병’이라고 소개하고 있는 반면에 누가복음은 ‘중한 열병’이라고 좀더 세밀하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의 저자로 알려져 있는 누가가 의사였기 때문에 어떤 병명을 소개할 때 다른 이들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경향이 있습니다.   


 여기서 누가가 말하는 ‘중한 열병’(퓌레토 메갈로)이란 습기가 많은 갈릴리 바다 인근 지역에서 걸리기 쉬운, 40도에 가까운 고열을 동반하는 풍토병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중한 열병’을 ‘뼈속의 불’이라고 불렀을 정도로 고통스럽고 아픈 병입니다.


 그런데 마태, 마가, 누가복음의 내용을 잘살펴보면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베드로의 장모를 위해 베드로의 집을 방문했다기 보다는, 베드로의 집에 가서 보니 그 집에서 중한 열병을 앓고 있는 베드로의 장모를 만나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마8:14)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는지라”(막1:29-30)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신 그 다음에서야 베드로의 장모가 앓아 누운 것을 비로서 알게 되신 것입니다. 이 다음의 내용을 누가복음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을 앓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눅4:38)

 

 예수님이 베드로의 집에 들어오시자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예수님께 베드로 장모님의 병을 고쳐달라고 간청을 합니다. 한글에서는 ‘그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라고 잘못 번역이 되어 있는데, 영어성경뿐만 아니라 헬라어 원문을 보면 ‘그를 위하여’가 아니고 ‘그녀를 위하여’라고 번역하는게 번역상으로는 맞습니다. 그러나 사실 생각해보면 사람들이 병든 베드로의 장모를 위해 예수님께 간청했던 이유에는 베드로를 위한 마음이 분명히 있었을 겁니다. 그러기에 ‘그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라고 번역해도 해석상으로는 크게 문제가 될 건 없어 보입니다. 여기서의 ‘사람들’이란 정확히 누구를 가리키는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함께 있었던 야고보와 요한을 포함해서 병든 장모님을 자신의 집에 모셔서 봉양하던 베드로를 평소 잘알고 있던 사람들이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평소 베드로가 어떤 사람인지를 아주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마태, 마가, 누가복음 본문을 잘종합해 보면 예수님이 베드로의 집을 방문했을 때 병든 베드로의 장모를 만나고, 그녀의 병을 고쳐주셨던 일들은 우연히, 자연스럽게 일어난 것이 아니라 베드로가 처음부터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모셨다고 봐야 합니다.


2. 신앙의 토대: 기복신앙

 이런 베드로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되지 않으십니까? 우리가 함께 읽지는 않았지만 마태, 마가, 누가복음 모두 오늘 이 사건에 앞서 기록되어 있는 내용들이 대부분 예수님이 병자들의 병을 고쳐주시거나, 귀신들린 사람들에게서 귀신을 내쫓는 내용입니다. 지금 베드로의 눈앞에서 예수님이 만져주시거나, 한 말씀 해주실 때마나 사람들의 병이 실제로 낫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마음 속에, 머리 속에 누가 떠올랐겠습니까? 지금도 뼈 속이 불타고 있는 것 같은 고통으로 신음하고 계신 장모님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베드로가 겉보기와는 다르게 예수님께 말을 못하고 우연스럽게라도 예수님의 시선에 장모님이 들어오기를 바라면서 집으로 모셨던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물론이고 기독교 역시 근본적으로 기복신앙을 토대로 하고 있습니다. 복을 바라고 비는 신앙입니다. 서로가 추구하는 복이 조금씩 다를 수는 있지만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건강하고 풍요롭고, 안락하게 살고 싶어하고 그것을 위해 기도를 하고 복을 빕니다. 기복신앙을 아주 수준낮은, 값싼 신앙이라고 비난하는 분들이 말하는 진정한 신앙, 고상한 신앙도 잘들여다 보면 ‘영적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뿐이지 자기만족과 기쁨, 행복을 추구하는 신앙이라는 면에서 그것도 기복신앙입니다.


 유구한 인류의 역사가운데 지금처럼 사람들이 부유하고 배불리 살았던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지금은 자기를 낳아주고 길러주신 부모도 모른척하거나, 부모를 해외에 버리고 오는 영화에서나 나올 것 같은 패륜이 생각보다 많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세태에 비추어 볼 때 병든 장모를 자신의 집에 모시고 살아가는 베드로의 모습은 그의 사람 됨됨미를 보여줍니다. 그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면 장모님의 병이 낫을 수 있다고 믿고, 그런 기적을 바라는 마음도 기복신앙입니다. 기복신앙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나’의 한계를 인정하는 신앙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기복신앙을 마치 한국교회를 병들게한 아주 나쁜 왜곡된 신앙이라고 단정하는 분들은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고 있는지, 어떤 신앙을 추구하는지 되묻고 싶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교양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악세사리가 아닙니다. 필요에 따라 나를 화려하고, 알맞게 꾸며주긴 하지만 없어도 그만인게 악세사리인데 소위 기복신앙이라고 비판받는 신앙인들을 보며 신앙을 생명처럼 여기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에서 당신 자신을 가리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독교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생명”이 아니라면 그것은 신앙도 아니고 믿음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자신에게 “생명”이 아니 사람들에게 교회는 단순히 ‘사교의 장’이거나 ‘친목을 위한 센터’일 뿐입니다.

 

3. 기복신앙에 대한 비판

 한국교회의 위기를 이야기하면서 교회개혁을 부르짖는 기독교 지성인들, 신학교 교수님들, 각종 단체와 여러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이 분들의 비판은 거의 비슷한데 그 중에 중요하게 지적하는 것이 마치 무당이나 무속과 달라보이지 않는 기독교인들의 기복신앙입니다.

 


 그런데 이런 비판은 이미 100여년 전인 1917년 11월에 춘원 이광수가 <청춘>이라는 잡지에 “금일 조선야소교회의 결점”이라는 제목으로 기고한 적이있습니다. 거기서 춘원은 기독교의 4가지 결점을 지적하고 있는데 그 중에 네 번째 항목이 ‘기독교는 미신적이다’라는 비판입니다. 춘원은 당시 미국 선교사들이 조선인들에게 전하는 ‘천당과 지옥’, ‘죽음 이후의 부활’, ‘기도만능설’ 같은 것들은 미개한 민족들에게 전하는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왜 선교사들은 심오한 원리를 가르치지 않냐고 비판했습니다.    


 그로부터 100여년이 지난 지금도 한국교회를 비판하는 목소리와 글들 가운데는 이광수가 했던 비판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한국교회는 100년전이나 지금이나 변한게 없다. 부끄럽다”라고  아주 나이스하게 자기반성과 자기비판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참된 신앙’과 ‘미신같은 신앙’이 매사 그렇게 분명하게 구분이 됩니까? 삼자의 입장에서는 더 이상 회복의 가능성이 없어보이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모습이 미신같은 신앙으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병든 자녀, 병든 남편과 아내, 병든 부모, 가족들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생명같은 신앙”이고 “오늘의 희망”입니다.


 천당과 지옥, 죽음과 부활, 기도와 믿음. 이것들이 다 미개한 민족들에게나 필요한 것이고 참된 신앙은 더 심오하고 고상한 어떠한 것을 찾아야 하는 것이라면 저는 차라리 미개한 민족의 일원으로 남겠습니다.


 다윗이 시편에서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84:10)라고 고백했는데, 다윗의 표현을 조금 빌리자면 하나님께 어떤 바램과 아쉬움도 없는 고상하고 심오한 신앙인으로 남는 것보다는 항상 하나님께 매달려 있고,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미개한 신앙의 문지기로 남는게 낫습니다. 주님이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4. 아주사 312가 부흥운동

 그런데 지금은 기독교인들의 기복신앙, 미신적 신앙, 다른 말로 하면 이 땅에서의 현세적 신앙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있다면, 그 이전에는 전혀 반대의 입장에서 기독교인들의 내세적 신앙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교회가 이 땅에서의 삶의 중요성을 이야기하지 않고 죽음 이후의 천국, 내세만을 강조한다는 겁니다.  

 


 칼 맑스가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고 말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겁니다.

 

“종교는 억압된 피조물의 탄식이며, 심장 없는 세상의 심장이고, 영혼 없는 현실의 영혼이다. 이것은 인민의 아편이다. 인민에게 있어서 환각적 행복인 종교를 버리라는 것은, 곧 현실의 행복을 지향하라는 것이다” (1843.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

 

 사람들이 이 땅에서 혁명을 일으켜서 공평하고 배불리 먹을 생각은 하지 않고, 이 땅에서의 삶을 변화시킬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은 교회에서 가르치는 ‘천국’, ‘내세’라는 아편에 사람들이 중독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이 아편에 중독이 되고 나니까 사람들이 병들어도 자신이 병든지도 모르고, 아파도 아픈지도 모른다는게 맑스의 진단이었습니다.

 

 칼 맑스가 등장하기 전부터 유럽에서 과학이 발전하고, 인간의 이성이 강조되면서 성경 속에 있는 기적과 같은 비상식적인 부분들이 다부정되기 시작했습니다. 유럽 지성인들 사이에서 기독교는 단순히 도덕윤리로 전락이 되었는데, 거기다 공산주의가 대두되면서 기독교 신앙은 그야말로 미개한 민족들이나 받아들이는 것인양 대우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1900년 초반에 2000년 기독교 역사에 거의 나타난 적이 없는 기독교 부흥운동이 연달아서 세계 각 곳에서 일어났습니다. 1904년 웨일즈 부흥운동, 1905년 인도 카시아 부흥운동, 1906년의 미국 LA 아주사 312가에서 일어난 아주사 부흥운동, 그리고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그 중에서 세계 기독교의 흐름을 바꿔놓은 것이 1906년 흑인노예의 아들인 윌리엄 시므어어 목사님이 미국 LA 아주사 312번지 시작한 아주사 부흥운동입니다. 처음에는 작은 기도회로 시작을 하였는데 나중에 수천명씩 모이는 기도회가 날마다 진행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부흥운동의 매우 특이한 현상이 지금까지 어디에서도 나타난 적이 거의 없는 방언기도가 터져나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는 교회 역사에 방언기도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습니다. 이렇게 오순절 교회의 역사가 시작이 됩니다.

 

 

 당시에도 언론은 주로 흑인들이 참여하고 있는 이 아주사 부흥운동의 현상을 매우 위험스럽고, 미신적인 신앙으로 비판했었습니다. 한국에서 부흥운동을 이끌었던 순복음교회도 아주사 부흥운동의 흐름안에 있는 교회라 할 수있습니다. 현재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부흥하고 있는 개신교 교단은 오순절 교단밖에 없습니다.

 


오순절 교단이 아시아와 유럽에서는 열세를 보이지만 북미, 남미, 아프리카에서는 현재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성장하고 있습니다. 남미에서 가톨릭과 대등한 유일한 세력이 오순절입니다. 아프리카에서 이슬람세력과 유일하게 경쟁하는 교단도 오순절입니다. 물론 이들 오순절 교회는 가는 곳마다 번영신학, 기복신앙이라는 비판을 받기도합니다.

 

 

 (11. 쥬빌리 교회) 그런데 전세계적으로 부흥한 오순절 교회들, 한국에서 60, 70년대에 엄청난 부흥을 체험한 순복음교회의 신앙을 보면 기독교는 이 땅에서의 삶에는 관심이 없고 내세라는 아편에 빠져있다는 비판과 다르게 당시 소외되어 있던 사람들에게 이 땅에서 살 수 있는 “오늘의 희망”을 심어 주었습니다. 링컨의 노예해방선언이 있은 지 5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미국에서 흑인들의 삶은 비참하기 이를데 없었습니다. 가난했고, 못배웠고, 모든 것이 열악했습니다. 그런데 아주사 312가에서 있었던 기도회를 통해서 우리도 이 땅에서 노예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 부유하고, 안락하게,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준 것입니다. 기독교는 단순히 기복신앙이 아니라 이처럼 희망의 신앙입니다.



 

 (12. 천막교회) 지금은 한국교회가 비판을 받을 때 항상 그 중심에 있는 곳이 순복음교회이지만 우리 한국사회가 북한보다도 가난했던 60년대에 전후의 폐허에서도 하나님과 함께라면 잘살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고, 그 희망을 가지고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을 단순히 기복신앙이라고 비판만 해서는 안됩니다. 

 

5.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다 고치시니’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신 예수님의 시선에 ‘중한 열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베드로의 장모가 보였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그녀를 치료해 주십사 청을 올립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녀의 손을 만지셨습니다.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이 열병을 꾸짖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손을 만지셨건, 말로 꾸짖으셨건 중요한 건 그 즉시 열병이 떠나갔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신앙은 죽어서 가는 천국을 위해 이 땅에서 준비하고 단순히 희생하는 신앙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땅에서 천국을 누리며 살아가는 신앙입니다.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고 난 후 저녁이 되자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귀신들린 사람들과 병든 사람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몰려왔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이 사람들에게 ‘너희의 태도는 너무 미신적이야. 이성적으로 행동좀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만좀 달라고 하고 좀 성숙한 모습을 보여봐’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본문은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17절은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며 구약 이사야서의 고난받는 종의 노래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돌아가오는 주일이 사순절 둘 째 주일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위해 지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너무 나의 실제 현실과 동떨어져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십자가를 내세의  천국만을 위한 것처럼 여길때가 많지 않습니까. 그러나 마태복음 본문 말씀에 따르면 이사야서 53장의 고난받는 종의 노래는 다름 아닌 우리들의 이 땅에서의 삶을 위한 것입니다.

 

사53:3-6
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주님이 이 땅에서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으신 이유는 우리의 슬픔을 대신 당하시기 위한 것이고, 주님의 찔림과 상함은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위함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이 징계를 받고 채찍에 맞았음으로 마태복음 말씀에 따르면 우리가 이 땅에서 마땅히 평화를 누리고 나음을 받아야 합니다. 십자가가 뿌리 박혀 있는 곳은 저 하늘이 아니라 이 땅 위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이 땅에서부터 경험해야 합니다. 부활의 삶은 죽은 후에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내 삶에 받아들이신 그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에게 종말은 세상 마지막 날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믿는 그 순간부터 종말의 삶이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이 종말인데, 우리는 함께 계시는 성령님을 통해 주님과 언제나 함께하고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우리의 삶이 하루 하루가 종말론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가운데 우리가 하나님을 구하고, 바라고, 하나님께 매달리는 기복신앙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구하는 삶이 기복신앙, 미신적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이 도우심이 없어도 살 수 있다는 듯이 기도하지 않고, 구하지 않는 용감한 삶이 오히려 미신적인 삶이고 신앙입니다.


 기독교인 삶, 기독교인의 신앙은 언제나 하나님께 구할 수 있고, 바랄 수있기 때문에 어떤 일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늘의 희망을 가질 수 있는, ‘희망의 신앙’이어야 겠습니다.

 

인간의 자리
인간의 자리 사회·정치

"모든 민주주의에서 국민은 그들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 -알렉시 드 토크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