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후기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 후기 - 보지의 독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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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 11. 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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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든일곱번째 편지,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 - 보지의 독백.

 

 

 “나는 인간의 모든 근원과 존재 자체를 상징하는 문이야.

나는 인간의 사랑을 확인해주는 성스러운 장소이고,

그 사랑의 정점인 육체적 환희를 선물해 주는 열쇠야.

나는 아홉 달 동안 아기를 지켜주는 든든한 파수꾼이고,

그리고 그 커다란 아기가 세상에 나올 수 있도록 내 모든 것을 희생해.”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 중에서)

 

 그렇다. 여기서 "나"는 "버자이너(Vagina)"이다. 즉, "여성의 음부"다. 

그러니까 <버자이너 모놀로그>는 "여성 음부의 독백"이다. 

그런데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에서는 "여성의 음부"라는 말 대신 "보지"라는 "용어"를 주로 사용한다.

출연 배우들은 자신들의 연극을 "보지의 독백"이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한다.

극 시작부터 이런 용어들을 마구 뱉어낸다.

 

 사실 처음에는 내 양 옆으로 여자들 밖에 없었던지라 나는 좀 민망했다.

그런데 시간이 좀 지나니 별로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여졌다.

전라의 무용이나 연극을 볼 때, 처음에는 좀 그렇다가도 나중에는 아무렇지 않듯이. 

게다가 출연배우들의 말처럼, 눈은 눈이고, 코는 코일 뿐인데 유독 "보지"라는 말을 특별히 여길게 또 무어란 말인가?

 

 하지만, 분명 우리 사회에는 여성음부에 대한 언급의 조심스러움 또는 터부가 있다.

즉, 여성의 성에 대한 억압 이데올로기가 잔존하고 있다.

때문에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서, 사적인 자리가 아닌 공식적인 자리에서,

여성의 성에 대해, 더우기 "보지"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이야기한다는 것은 엄청난 도발이 된다.

우리네 일상사에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거대한 남성 중심 이데올로기를 뒤집으려는 "혁명적" 발언이 된다. 

즉,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음부"를 "보지"라고, 공식적인 자리에서 말하는 것은

단순히 여성의 특정 신체부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함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가 지향하고 원하는 바는,

보지를 "보지"라고 부르는 일이, 즉 여성의 성기를 포함한 여성의 성에 대한 이야기들이

더 이상 도발이나 혁명적 발언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친구나 어른들과 만나, 얼굴이나 손이나 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무 일도 아니듯이,

그렇게 자연스러운 일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페미니즘을 강의하는 분위기는 아니다. 대체적으로 유쾌하게 이야기한다. 낯뜨거울 일도 별로 없다.)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가 공연된지도 벌써 10년, 아니 해가 바뀌었으니 11년이다.

10여년의 세월만큼 사회도 조금은 변하여 이런 식의 주장들도 널리 그리고 비교적 자주 언급되어 왔으니

초연 당시만큼 파격적이거나 도발적으로 들리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변한 것 보다는 변하지 않은 것이 훨씬 많으니 여전히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의 외침은

우리 사회에 유효한 가치를 가진다.

 

 더우기 최근 공연에는 출산과 관련한 이야기도 새롭게 포함시켜 남성들도 공감할 수 있는 여지를 넓혀놓았다.

대개의 남성들도 산고의 고통과 더불어 생명 탄생의 경이로움에 대해서는 나름의 체험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은, 우리 사회의 숙제인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도 새롭게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이브 엔슬러’가 위안부 할머니를 직접 인터뷰하여 작성한 것이다.)  

 

 요컨데,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는

얼짱, 몸짱, 동안 등 외모지상주의적인 차원에서만 언급되는 여성의 몸에 대해 

새롭게 돌아보려는 시도로 가득하다. 

그리고 여성의 성기를 매개로 여성의 성문제를 똑바로 마주하게 하여

개개인의 몸을, 삶을, 나아가 우리 사회를 성찰하게 한다.

<버자이너 모놀로그>의 작가 이브 엔슬러의 말처럼, 여자라면

"좋은 여자라 불리면서 불행한 여자가 되기보다 나쁜 여자가 돼서 행복한 편이 나은 것이다."

(이 말이 오독되지 않기를 바란다. 나쁜 여자란,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서 강요된,

부당한 기준으로 봤을 때 "나쁜" 것이지, 보편 타당한 기준에서 "나쁜"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니까.)

 

 

덧붙이는 말.

 <버자이너 모놀로그>는 미국의 페미니스트 극작가 이브 앤슬러가 200여명의 여성을 인터뷰해서

성기에 얽힌 그들의 경험과 고백을 연극으로  만든 작품이다.

그동안의 출연진도 화려해 위노나 라이더, 수잔 서랜든, 우피 골드버그, 케이트 윈슬렛, 멜라니 그리피스,

브룩 실즈, 클레어 데인즈, 앨라니스 모리셋, 기네스 펠트로 등 유명 영화배우들이 출연했다. 

 

 우리나라에서는 2001년에 김지숙, 이경미, 예지원의 3인극(트라이얼로그)으로 각색해서 초연했다.

그 후에, 서주희, 장영남이 원작대로 1인 다역의 모놀로그로 공연했고,

2009년 이경미, 전수경, 최정원의 3인극으로 재공연할 때, 비교적 분위기가 밝아졌다고 한다.

이번 10주년 공연에도 그 밝은 분위기를 이어가려고 의도했던 것 같다. 

한겨레 기자의 말에 의하면, 1인극일 때는 좀 더 무겁고 날선 느낌이 강했다고 하던데,

그 이야기를 들으니 서주희, 장영남의 공연을 못 본게 몹시 아쉬웠다. 

 

 2012년 1월 8일 5시 공연을 보았다.   

 

 

   
서주희 (2002년 <버자이너 모놀로그>에 출연)                 최정원, 전수경, 이경미 (2009년 출연)

                                    

장영남 (2006년 출연)

 


김여진(이번 공연 모습)



정애연.



정영주


이지하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에 출연 중인 배우 김여진, 이지하, 정영주, 정애연은

1,000회를 맞이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에 참여하기도 했다.

김여진이 언론사 인터뷰 때 소개한 어느 위안부 할머니의 말씀.

"일본 정부도 한국 정부도 우리가 죽기만을 기다린다. 그러면 이 이야기는 사라질 테니까."

답답한 현실이다.

유민유진 POWER blog
유민유진

사람들, 모든 독해의 대상들, 그리고 그 "사이"에 관하여! 사람과 말글 (人+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