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실리콘밸리서 잘 나가던 토종 자율주행 스타트업은 어쩌다 '산업기술보호법'에 발목 잡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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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1.04.02. 오후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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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서 원천기술 개발해도 한국서 추가 개발하면 법 적용 대상
세종 규제자유특구에서 에이아이모빌리티가 나브야 차량으로 자율주행을 실증하고 있다. 이 실증은 팬텀AI·켐트로닉스·에이아이모빌리티 등이 컨소시엄을 꾸려 진행하고 있다. 중기부 제공
'벤처 산실'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자율주행차 센서 기술을 개발하는 한국인들이 설립한 스타트업 팬텀AI는 기술의 실증 시험을 위해 지난해 1월 국내로 돌아왔다. 자율주행차 시범 사업을 하는 세종시의 러브콜을 받고 기술 검증과 기능 향상 시험을 하기 위해 세종시에 지사도 세웠다. 올해말 시운전을 목표로 올초까지 기술 검증 준비 작업을 하던 회사는 최근 돌연 모든 개발 활동을 중단했다. 이달 1일에는 급기야 국내 사업 철수까지 결정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미국에서 잘 나가는 토종 스타트업의 귀환'이라며 지자체와 각종 매체를 통해 소개된 이 회사에 1년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1일 업계에 따르면 오는 2024년 첫 시범 운행을 위해 지난해부터 세종시 자율주행차 규제자유특구에서 추진 중인 자율주행차 실증 사업 중 일부가 사실상 멈춰섰다. 팬텀AI를 포함해 토종 스타트업들이 현재 방식으로는 '산업기술 유출 방지 및 보호에 관한 법률(산업기술보호법)'에 저촉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확인하면서 사업을 이어가기 어려워진 것이다.

산업기술보호법은 국가핵심기술로 지정된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등 12개 분야 71개 기술의 해외 유출을 막는 법이다. 국가핵심기술은 해외로 유출되면 안보와 경제 발전에 악영향을 줄 수 있는 기술로 정부 허가가 나야 해외에 반출할 수 있다. 자율주행차량에 들어가는 카메라와 레이더, 라이다(레이저 레이더), 정밀위치탐지 시스템 등 상당수 기술이 국가핵심기술로 분류된다.

팬텀AI도 최근 국내에서 실증시험을 하며 개선한 기술이 국가핵심기술로 분류된다는 판정을 받았다. 미국에 본사가 있는 팬텀AI는 정부의 허가 없이는 국내에서 개선한 기술의 자세한 내용을 들여다볼 수 없다는 것이다. 같은 회사 소속의 개발진이 개발했지만 미국 본사를 다니는 연구진이 한국의 국가핵심기술로 분류된 기술의 상세 내용을 더는 볼 수도 없고 활용할 수도 없게 된 것이다.

팬텀AI는 기술 단계가 높아질 때마다 정부에 새로 허가를 받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고 보고 결국 사업 철수를 결정했다. 세종시는 이미 6억원이 넘는 자금을, 팬텀AI 역시 높은 연봉을 받는 고급 엔지니어들을 투입한 상황이다. 자율주행 실증 사업을 마련해 팬텀AI의 귀환에 공을 들인 중소벤처기업부와 세종시는 정작 이 문제를 사전에 인지하지 못한 채 사업을 추진했다가 낭패를 보게 됐다.

○ 핵심기술 한국 가져와 개선한뒤 미국서 활용하면 산업기술유출?
팬텀AI는 미국 전기차 회사 테슬라가 개발한 자율주행장치 ‘오토파일럿’의 초기 개발자인 조형기 씨와 이찬규 전 현대차 연구원이 중심이 되서 2016년 실리콘밸리에 설립한 스타트업이다. 자율주행차의 눈 역할을 하는 라이다 기반 ‘컴퓨터 비전’을 개발해 기술력을 인정받았다. 지난해 4월 미국 자동차 회사 포드와 투자사인 셀러레스 인베스트먼트로부터 2200만 달러(약 273억원)의 시리즈A 투자를 유치하기도 했다.

팬텀AI는 한국 정부가 자율주행 실증을 위한 인프라 지원과 참여기업 유치에 나서자 지난해 1월 세종시에 팬텀AI코리아를 설립했다. 세종시가 토종 실리콘밸리 스타트업의 귀환이라며 이를 대대적으로 홍보하면서 주목 받았다. 팬텀AI코리아는 미국에서 팬텀AI이 개발하던 기술을 들여와 지난해 5월부터 세종시 자율주행특구에서 진행 중인 자율주행 실증사업에 참여했다. 사업 계획에 따르면 팬텀AI코리아는 국내 9인승 승합차에 자율주행 기술을 접목해 도심특화 전용 공간에서 자율주행을 실증하게 된다.

이 회사는 올해 1월 국토교통부로부터 자율주행차 면허를 발급고 올해부터 세종시에서 기술 고도화에 나설 계획이었다. 지난해에는 사업비를 투입해 자율주행 장비를 부착한 차량을 준비하고 기술 실증을 준비해 왔다.

그러나 회사의 핵심 역량인 라이다 기술이 산업기술보호법이 적용받게 되면서 문제가 됐다. 회사 측은 산업통상자원부에 해당 기술이 국가핵심기술에 속하는지 여부를 문의한 결과 팬텀AI코리아가 추가 개발한 기술이 팬텀AI가 보유한 기존 기술보다 고도화된 만큼 국가핵심기술로 봐야한다는 답변을 통보했다.

이는 팬텀AI코리아가 정부 승인 없이 더는 본사인 팬텀AI와 기술을 공유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올해 1월 개정된 산업기술보호지침에 따르면 국가핵심기술의 연구자료를 외국기업에 주거나 공유하는 행위는 금지된다.

팬텀AI는 자율주행 기술을 미국에서 한국으로 들여올 땐 별다른 제재를 받지 않았다. 미국에도 한국의 산업기술보호법과 같은 기술유출 방지법이 존재하지만 팬텀AI는 미국 로펌 법률자문에서는 해외로 내보내도 문제 없는 기술이라는 해석을 받았다.

산업부는 일단 팬텀AI코리아가 기술 수출을 요청하면 허가 여부를 결정한다는 방침이다. 다만 기술이 개선될 때마다 새로 승인을 받야아 할지는 불투명하다. 산업부 관계자는 “기술이 업그레이드할 때마다 매번 새 승인을 받아야할지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며 “가급적 업체에 피해를 주지 않는 방향으로 승인 절차를 밟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 중기부 세종시 사업유치했지만 이해 부족
사업을 벌이는 다른 부처와 지방자치단체들은 정작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해외에 진출한 우리 기업뿐 아니라 해외 기업을 유치하는데 걸림돌이 될 문제를 놓친 것이다.

중기부와 세종시는 팬텀AI를 유치하면서 국가핵심기술 조항의 충돌 소지가 있다는 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 것으로 확인됐다. 자율주행 기술은 실증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2년 전인 2018년 1월 이미 국가핵심기술에 포함됐다. 지난해 9월 KAIST 교수가 라이다 기술을 유출한 혐의로 구속기소되기 전까지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국가핵심기술이 포함된 사업은 보안과제로 진행해야 하지만 계약도 일반 과제로 진행했다.

이번 사례는 기술유출을 막기 위해 만든 산업기술보호법이 오히려 국내로 들어오려는 토종 첨단 기업의 귀환조차 막을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 사례로 평가된다. 또 해외 기업이 국내에서 핵심기술을 개발한 뒤 해외로 진출하는데 걸림돌로 작용해 장기적으로 해외 첨단 기업의 국내 진출에 장애가 빨간불이 될 것으로 보인다.

팬텀AI코리아는 한동안 사업 철수를 포함해 여러 방안을 놓고 대응책을 고심하다 이달 1일 사업 철수 쪽으로 선회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30일 세종시를 방문한 권칠승 중기부 장관은 자율주행기업들과 만나 “중기부에서도 특구사업이 끊김 없이 이어질 수 있도록 법령 정비와 실증특례 연장 등을 통해 적극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조승한 기자 shinjs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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