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월한 사유의 시선, 그 예민함을 유지하는 것.

프로필

2017. 11. 10. 21:57

이웃추가

탁월한 사유의 시선_최진석 교수
 
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
건명원 인문학 운영위원
전 캐나다 토론토대학교 동아시아학과 방문교수
전 미국 하버드대학교 옌칭연구소 방문학자

최진석 교수님의 강의는 깊은 가뭄에 단비였다.
어느 곳이든 희노애락이 있고, 내가 가는 프론티어 정신이 안개와 같을 때가 너무나 많았지만, 소명의식으로 무의식적 사유를 의식화하기 위해 달려온 코칭의 삶이 얼마나 파워풀한지를 증명해주셨다. 교수님의 강의를 거의 다 받아적었다. 글로서 현장감을 모두 전달하기는 어렵지만, 그 감동은 내 안에서 의식화될 것이다.

모든 인간은 가지고 있는 시선만큼 살아간다.
높이와 수준 = 공감 = 즐거움 = 쾌감(쾌락)
즉, 서로 높이가 맞지 않아서 공감되지 않는 것이다.
 
박물관에서 즐거움을 찾는 사람들이 많지 않는 것은 그만큼 공감되지 않고 우리의 시선이 높지 않다는 뜻이다.

왜? 우리는 시선을 높여야 되는가.
 
컴퓨터 칩 vs 도박장 카지노 칩
 
지식과 이론이 높다는 것은 세계를 관리하는 능력이 높다는 것이다.
이것은 대내적 통제력과 대외적 영향력으로 나타난다.
선의 높이가 결정적으로 통제력과 영향력으로 나타난다.
 
탁월한은 가장 높다는 뜻인데,
인문적 시선, 철학적 시선, 예술적 시선, 수학적 시선
가장 높은 시선이 필요한 이유는 가장 높은 통제력과 영향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전략적 시선 -> 탁월한 시선
전략이라는 말은 전술과 가까이 있는데
전략은 판을 짠다는 뜻
전술은 짜진 판 안에서 산다는 뜻
전략은 판을 짜는 일이고, 전술은 짜진 판 안에서 사는 것이다.
짜진 판 안에는 이미 판을 짠 사람들이 만들어논 고만고만한 봉우리가 존재한다.

이 봉우리를 한자로 표현하면 등(登 오를 등, 등급 등도 있지만, 오를 등도 적합하다 - 필자 한민수 코치)이라고 한다.
짜장면, 짬뽕 등등
(그래서, 코치대회가 끝나고 짜장면을 먹었나 ㅎ)

전술적 차원에서는 이미 만들어진 것이 있고, 여러 등등가운데, 더 높아지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으로 대두된다. 여러 봉우리 가운데 조금더 높아지는 것을 1등이라고 한다.
 
전략적 차원에서는 판을 짜는 일을 하는 것이다.
판을 짜면 새로운 흐름이 형성된다.
새로운 흐름을 '류(流, 흐를 류 - 다를 수도 있겠다)'라고 표현하며, 일류라고 표현한다.
 
한국에서는 1등을 해보았어도 일류를 경험해보지 못했다는 것이 가장 큰 약점이다.
일류의 삶이 어떤 삶인지...
일류 정치는 어떤 정치인지...
일류 교육은 어떤 교육인지...
일류가 무엇인지 경험하지 못했다.
 
일류는 판을 짜는 일, 즉 새로운 흐름을 만드는 일이다.
인간의 삶은 새로운 흐름을 끊임없이 추구한다.
스마트폰, AI, 4차 산업혁명, 융합, 코칭...
흐름이 형성된다는 것은 새로운 것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우리의 문명은 3개의 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3층 사상 : 사상 철학이 제도를 만들고
2층 제도 : 제도가 물건을 만든다.
1층 물건 : 우리 한국사회는 물건을 잘 생산하는 단계를 넘어서서 제대로된 제도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노력하는 단계인데, 우리 사회는 제도 논쟁에 갇혀있다.
제도 논쟁을 넘어가면 어떤 사상, 철학, 세계를 관리할 것인가에 맞춰지게 된다.
 
우리는 선진국을 전략국가라고 표현한다.
전략적 행동을 할수 있는 국가를 전략국가라고 하며 이를 선진국이라고 말한다.
 
전략국가는 나름의 철학을 가지고 있다.
철학은 컨텐츠가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시선의 높이가 좌우하기 때문이다.
철학은 내용이 아니라, 시선이다.
 
판을 짠다.
흐름을 형성한다.
가장 구체적인 것은 물건으로 드러난다.
 
우리나라는 물건을 생산할 뿐만 아니라 수출한다.
그 물건이 우리나라에서 생산된 것 일 수도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시작한 것은 무엇이 있는가? (한글, 김치, 그리고 또?)-민족자산, 시선의 높이가 가장 핵심이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물건, 제도는 우리나라에서 만들기 시작한 것을 쉽게 찾을 수 없다.
우리는 남이 만들어놓은 판 아래에서 살아왔다.
이것도 문명의 형태에서 매우 중요하며, 때론 매우 효율적이기도 하다.
 
앞으로 새로운 흐름을 만들지 않으면, 앞으로 할 일 이 없는 것이다.
아인슈타인 왈(曰), "다른 결과를 기대하면서 같은 방법을 쓰는 것이 가장 어리석다."
 
지금까지 해왔던 익숙한 방법으로 새로운 결과를 내려고 힘을 쓰고 있는가?
 
1. 피아니스트는 피아노가 가지고 있는 기능을 가장 잘 구현한 사람이다.
2. 그러다 음악 이론, 음악 체계를 구축하게 되면 음악가, 뮤지션이 된다.
3. 이 뮤지션이 음악이론, 체계를 구현하고 구현하다가 더 이상 구현한 것이 없게 되어 자유, 행복, 영웅, 슬픔, 인간사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하면 (한걸음 훌쩍 뛰어넘어) 인간에 대해서 말하게 되면 비로서 아티스트가 되고 비로서 우리는 그를 예술가라고 말하게 된다.

예술가는 인간 가운데 가장 높은 자리, 가장 앞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피아니스트 --- 뮤지션 --- 아티스트
이 간격이 동등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피아니스트에서 뮤지션까지 가는데 힘이 5정도 들어간다면
뮤지션이 아티스트까지 가는데 힘이 5~500만 정도 들어간다.

, 그럴까? 전혀 다른 차원에서 형성되기 때문이다.
피아니스트와 뮤지션은 이미 있는 길을 간다면, (이미 있는 음악체계를 간다면)
아티스트는 없는 길을 여는 단계이다. (판을 짜는 단계)
 
후진국 +5 force
중진국 +500power
선진국 +@ POWER _ 한민수코치의 짧은 성찰 : 추가 +알파는 POWER 대문자 파워다.
 
1700년 산업혁명
1820년 산업혁명 세팅됨 - Great Division : 이때 후진국, 선진국으로 나누어짐
1840년 아편전쟁, 동아시아전쟁
 
돌출적으로 좁힌 나라가 대한민국이지만, 여기 선진국에 갖다 붙이지는 못했다.
1820년대에 선진국이었던 나라가 후진국으로 떨어진 나라도 없고, 후진국도 선진국이 된 나라도 없다. 이 것은 선진국의 시선을 가졌고, 후진국은 후진국의 시선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져보지 못한 새로운 시선으로 교체할 수 있느냐 없느냐?
 
뮤지션 레벨에 도달한 다음에
아티스트로 올라갈 수 있느냐는 경계에...
새로운 길을 여는 능력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그것은, 문제를 느끼는 능력이다!
, 불편함을 느끼는 능력이다!!
문제와 불편함을 느끼면서 그것을 해결하려는 시도를 하느냐 안하느냐가 선진화의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프랑스는 계란을 왔다갔다 해서 노른자와 흰자를 구분해서 요리하는데
독일은 계란을 구분하는 기계를 만들었다.
자기가 좋아하는 나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더 문명적인 나라는 불편함을 못 견디는 나라입니다.
더 문명적인 인간은 불편함을 못 견디는 인간입니다.
 
누가 문명의 주도권을 갖느냐?
조작적이고 인위적이기 위해서는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고, 그 불편함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그 불편함이 남아있는 것을 못 견디는 나라, 인간이 주도권을 갖는다.
 
덜 문명적인 나라는 그 불편함을 그냥 견딘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이론과 지식은 문제를 해결한 결과이다.
문제를 해결한 결과의 주도권을 가지는 것은, 그 예민함을 유지하는 것!!

* 일레인 N 아론의 "타인보다 민감한 사람"도서가 떠오른다.
http://gracelaw.blog.me/220451795993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해야 할 것은 질문을 해야 한다.
견디는 사람들은 대답을 한다.
대답을 잘하면 똑똑한 사람이라는 신조가 우리 사회에서 몇 십년 동안 유지되고 있다.

대답은 이미 있는 지식을 그대로 먹어서 누군가가 요구할 때 그대로 뱉어내는 일이다.
이 때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지 못한다.
그대로 대답하는 과정에서 승부는, 누가 먼저 빨리 뱉어내느냐, 누가 더 많이 뱉어내느냐
누가 더 원래 모습으로 뱉어내느냐.
치명적인 것은 원래 모습인데, 원래 모습은 이미 과거이다. 미래가 아니다.

대답에 익숙하도록 훈련된 사회는 거의 모든 논쟁을 과거 논쟁으로 채운다.
왜 과거 논쟁으로 채우느냐? 과거 논쟁으로 채워야 진실하게 사는 것 같게끔 훈련되어 있다.
원래 모습이 기준이 되기 때문에 그 기준에 맞으면 참이고 안 맞으면 거짓이라고 한다.
그렇기에 모든 논쟁들이 진위 논쟁으로 빠지게 된다.
 
과거 논쟁, 진위 논쟁을 할 때 나는 진실한 삶을 살고 있구나 착각하도록 훈련되어 있다.
대답에 지식과 이론이 통과하는 중간역으로 존재하지 않도록 하라.
세계를 보는 기준이 지식과 이론에 있다면, 그 지식과 이론은 다른 세상에서 왔다.
 
지금 대한민국에 아파트를 세우면, 그 이름을 어떻게 짓습니다.
건물을 세워놓고, 그 이름을 어떻게 짓습니까?
TV 프로그램에 이름을 어떻게 짓습니까?

오 마이 베이비
아이고 내새끼야
티어스, 눈물이라고 하지 못합니다

눈물이라고 하지 못하고, 티어스가 눈물같습니다.
그것이 더 고급스럽고 내것은 촌스럽게 느끼는 시선.


우리는 도대체 누구입니까?
우리는 대답에 익숙하도록 훈련되어 있습니다.
더 나은 것은 우리 밖에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를 발견하고, 그 예민함이 유지되는 사람은 질문합니다.
질문은 내 안에 있는 궁금증과 호기심이 내 안에 머물지 못하고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이 궁금증은 세계와 공유되지 않고, 매우 사적이고 매우 고유한 것입니다.
이 우주에 가장 유일한 것은 자기 안에 일어나는 궁금증과 호기심입니다.


제가 잘 몰라서 하는 질문인데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알고 모르고가 대단히 중요한 것이 되었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가 느끼는 것, 내가 문제로 바로 알아야 한다.
이미 있는 것을 아느냐 모르냐가 그 사람의 높이를 평가하는 데 중요하게 생각하는 오류에 빠져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하는가?
우리는 문제를 발견할 예민함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아는가 모르는가에 집중한다.
문제를 느끼는가 못 느끼는가, 궁금함을 느끼는가
 
질문이라는 것은 내 안에 있는 궁금증과 호기심이 안에 머물지 못하고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이다.
여기에 세계 유일의 판단 기준이 뭐가 있을까.
질문은 밖으로 나오기만 하면 100점이다.
즉, 자기 표현력에 대한 과감함이다.
 
그래서 인간은 질문거리가 있을 때,
질문에 욕망이 있을 때
질문 할 때 만이 자기 자신으로 존재한다.
 
이야기를 다시 바꾸면
판을 짠다.’
창의성을 발휘한다.’
새로운 흐름을 만든다.’
선진국이 된다.’ 는 질문할 때만.
이것을 철학에서는 독립적 주체가 된다.
이때 비로서 주체적 존재가 나타난다.
이런 독립적 주체가 하는 활동을 자유롭다라고 한다.
그렇지 못할 때 종속적이다.’
우리는 아직 종속적 단계에 있다.
 
이제는 <독립적 주체>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다.
보통 질문과 대답을 한 세트로 보는데
대답은 기능적 활동이지만, 질문은 인격의 문제이다.
질문()
-
대답()
 
질문과 대답은 좌우가 아닌 상하로 존재한다.
자유로운 삶, 창의적인 삶, 독립적인 삶, 선진적인 삶은 독립적 주체에 달려있다.
 
너는 누구냐?
니가 너냐?
너는 자신의 궁금증과 호기심에 존재하느냐?
너는 다른 사람의 궁금증을 대신 수행하는 사람이냐?
 
너는 누구냐? 너는 어떤 삶을 살 것이냐의 근본적 질문이다.
 
선진적 활동은 인격적 활동에서만 가능하다.
 
교육의 핵심은 감화력이다.
감화력의 핵심은 내가 그런 사람이 되어 있을 때만이 나온다.
여러 실패의 시간을 거치고 나서 비로서 느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교육이 나를 가꾸고 있는가?
내가(최진석 교수) 학교 다닐 때는, 그때는 대한민국이 폭력적이었습니다.
학교에서 얼마나 때렸는지,
물론 한명도 안맞은 건 아니지만, 거의 안 때렸습니다.
 
보통 그때 시절 학교에서는
학생이 쓰레기를 버리면
너 이놈의 새끼, 쓰레기만도 못한 놈아.
 
제가 다닌 학교에서는
선생님들이 너 쓰레기 버렸다이 사실만 알려준다.
학생들은 모두 쓰레기를 주웠다. 이때 행동은 누가 했는가.
을 학생들에게 돌려주는 교육
부모, 교사의 덕입니다. 가 아님.
 
선생님들께서
너희들이 별이다
너희들이 우주에서 가장 귀하다
라는 말을 한번도 안했어요.
학생 우리의 이름을 불러주었어요.
이름을 불러줄 때, 존재로 다가왔다.
내가 너를 사랑해라는 말을 듣지는 못했지만, 우리를 무척 사랑함을 느꼈다.
 
교육자
염원자
이 정도의 자세가 아니면..
 
교육
이 시대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이 시대의 염원을 들어야 한다.
이 시대의 염원은, 독립적 염원이다.

한민수 코치
한민수 코치 일상·생각

IGL Coaching Group CEO 저는 마음과 영이 부요한 사람으로, 마음에 위로와 힘을 얻고 용기와 사랑의 의식을 일깨우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늘푸른 소나무처럼 호연지기 정신을 전하는 Korea Professional Coach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