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여성이 남성 총리의 뺨을? ‘1968년 정신’의 실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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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8.04.07. 오후 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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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특집

‘1968’ 50년을 말한다


1968년 거리를 뒤덮은 청년들은 단순히 새로운 정치 구조나 사회 제도를 주장한 것이 아니라 삶의 양식과 태도와 가치 전체를 문제삼았다. 그들은 모든 종류의 순응주의를 용납하지 않았다. 위키피디아


▶ 50년 전, 세상은 요동쳤다. 젊은이들은 일제히 학교와 일터를 벗어나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서유럽과 미국에서 분출한 거대한 에너지의 파장은 미약하나마 동유럽과 아시아에까지 전해졌다. 젊은이들은 전쟁과 억압, 착취에 반대하고, 온몸으로 기성 질서를 거부했다. ‘혁명’의 기운은 차츰 잦아들었으나, 사회 곳곳으로 스며들어 새로운 사회질서를 만드는 밑거름이 됐다. ‘1968년’의 현재적 의미를 되새겨 본다.



‘요즘 늙은것들은 버릇이 없다.’

고대 그리스의 소크라테스와 중국의 한비자, 심지어 수메르 문명의 점토가 남긴 청년들에 대한 한탄을 한번은 뒤집어야 진실에 한발짝 더 다가설 수 있다. 청년들은, ‘언제나’는 아니지만 ‘자주’, 기성세대와 기존 사회질서에 몸서리쳤다. 나이는 성찰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채 권위의 뼈다귀만 남겼고, 전통은 경험 축적의 지혜로 거름이 되지 못한 채 폐습의 악취만 풍겼기 때문이다. 1968년이 조금 달랐다면, ‘요즘 늙은것들은 버릇이 없다’고 생각했던 청년들이 ‘세계 도처에’, 그리고 ‘동시에’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당시 지구촌 곳곳의 청년들은 ‘늙은것들의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을’ 심산이었다. 1968년 세계 각 지역의 청년들은 언어나 외양이 달라도 순식간에 통했고, 작은 몸짓도 금세 따라 했다. “반란이냐?”는 구체제의 물음에 그들은 “혁명!”이라고 답했다.

물론, 말을 옮기고 돌을 던지던 투사들이 ‘혁명’이라고 외쳤다고 해서, 곧장 그 사건이 혁명이 되는 건 아니다. 1968년의 청년 저항은 오랫동안 ‘68혁명’이나 ‘68(학생)운동’이라고 불렸다. ‘68혁명’이란 정명은 상황을 오해하게 만든다. ‘혁명 주체’인 청년들이 낡은 질서를 무너뜨리고 정치권력을 장악한 것도 아니고, 그들의 급진 요구와 변혁 강령이 ‘그 후’에 구현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곧 “질서가 지배했다”.

그렇다고 해서 기성 체제에 대한 저항의 급진적 성격과 사회적 특징을 지운 채 그저 ‘운동’이라고 부르는 것도 충분하지는 않다. 비록 대학생들이 저항을 이끌긴 했지만, 청소년들과 청년 노동자들의 참여도 만만치 않았다. 그렇기에 ‘청년 봉기’라는 규정이 그나마 ‘1968년’의 성격에 가장 근접해 보였다. 가장 인상적인 건 새로운 정치적 급진 세대의 등장이었기 때문이다.

1968년 2월 베를린 시내에서 열린 베트남전쟁 반대 시위 장면. 서구 청년들은 제1세계와 제3세계 사이의 불평등한 억압과 종속 관계에 눈을 떴다. 사진집 <1968>
독일의 철학자 카를 만하임의 말대로, 세대는 객관적 조건인 세대상황 외에 집단의식과 소속 감정 및 행위 양식에서 비롯된다. 세대는 그저 공통의 연령집단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 자기인지와 차별화의 결과물이다. 집단의식과 소속 감정은 다른 세대와의 차이를 의식하면서 자라나고, 집단적 행위양식은 그 차별화 과정의 결과이면서 동시에 원인이다. 1968년 세계의 여러 지역 청년들은 두 기성세대들, 즉 1차 세계대전 체험 세대 및 ‘45세대’와의 차이를 의식하며 거리를 뒀다. 1차 세계대전 체험 세대의 엘리트들은 전후 질서를 주조했고 노인정치의 주역이었다. 1920년대 초반에서 1930년대 초반 사이에 출생한 ‘45세대’는 청(소)년기에 파시즘과 제2차 세계대전을 경험했지만 전후 안정과 번영을 만끽하며 장년을 맞이했다. 그들은 전후 ‘재건’에 동참했기에 앞 세대와의 갈등을 피했다.

“서른 살이 넘은 사람은 누구도 믿지 말라!”

반면, ‘68세대’는 대략 1940년대에 출생한 이들로서 1960년대인 청년기에 급진적 정치화를 경험한 연령 집단이다. 유럽에서 앞의 두 세대는 전후 사회의 외면적 민주화와 물질적 복리에 만족했으나, 이 청년 세대는 달랐다. 양차 세계대전과 파시즘의 광포함으로 인해 지체되고 망각되었던 오래된 민주화 과제와, 냉전이 낳은 새로운 정치적 문제, 문화적 질곡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전후 재건 과정에서 권위주의적 관헌국가와 위압적인 대학 행정, 반공주의에 기초한 냉전 억압과 불관용의 정치 문화, 가부장적인 가족 내 위계질서, 억압된 성(性)과 소통, 위선적인 기성 사회의 도덕, 물신주의적 가치와 물질주의적 거만 등은 1960년대 전반 이미 다양한 신좌파 사상으로 무장한 새로운 급진 청년들에게 그 자체로 “역겨운” 것이었다. 그들은 “서른 살이 넘은 사람은 누구도 믿지 말라!”고 외치며 기성 사회에 온몸을 내질렀다. “상상력에게 권력을!”이라는 구호는 대안적 삶을 위한 가능성에 대한 갈망이면서, 동시에 현존 질서에 대한 완강한 거부였다. 심지어 그들은 “같은 사람과 두 번 자는 사람은 이미 기성 체제에 속한다”며 자유연애와 성적 해방을 실험하기도 했다. 전쟁과 억압을 일삼고는 자유니 문명이니 으스대기보다는 차라리 더 많이 자유롭게 사랑하고 자기 삶의 본능에 충실하라는 도발이었다. 요컨대, 68세대는 단순히 새로운 정치 구조나 사회 제도를 주장한 것이 아니라 삶의 양식과 태도와 가치 전체를 문제삼았다. 그들은 모든 종류의 순응주의를 용납하지 않았다.

1968년 5월 학생-노동자와 경찰 사이에 벌어진 치열한 ‘바리케이드 전투’로 인해 거리에 파괴된 차량이 늘어서 있다. ‘1968’.
그런데 세대는 청년기의 강렬한 사회적 대면과 정치적 사회화만으로 온전히 지속되지는 않는다. 청년 시기 이후에도 계속 집단적으로 자신들의 삶을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공동체화’ 과정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68세대는 독특하다. 그들은 인류 역사상 자기 자신에 대해 가장 많이 ‘말한’ 세대다. 그들은 이미 1970년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몇 수레는 족히 됨직한 분량의 자서전과 집단 전기, 연구서들을 발간했다. 한편으로 그것은 68세대의 일부가 과거의 빛나는 ‘영웅적 시간’을 내세워 기억투쟁을 수행하며 정치권력과 사회지위를 낚아채기 위해서였으리라. 한국의 ‘86세대’ 엘리트들과 마찬가지로, 서구 68세대에도 일찍부터 출세와 명성에 눈뜬 출세주의자들, 중간에 말을 갈아탄 변절자들, 계속 권력과 지위를 노리는 기회주의자들이 적지 않았다. 다른 한편으로, 68세대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끝없이 모색했기에, 소규모 공동체를 실험하며 계속 자신들의 모색에 대해 얘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을 통해 그들은 ‘1968 정신’의 의미를 묻고 실천했다. 명망가들보다는, 이들이야말로 세대 형성과 재형성의 주체다. 그들의 경험과 기억에서 ‘68’은 무슨 ‘섬광 같은 혁명의 시간’이 아니고 일상문화 변화 과정의 한 계기였다.

‘제3세계’ 저항 운동이 없었다면…

한편, 1968년의 세계 격변은 무엇보다 지구적 차원의 저항이었다. 1968년의 혁명적 사건들은 일국의 경계를 훌쩍 뛰어넘었다. 한 국가와 지역의 혁명적 사건들이 다른 국가와 지역에 직접 영향을 미치고, 다시 역으로 영향을 받는 연쇄 작용이자 상승 과정이었다. 1950년대 후반부터 쿠바와 알제리와 베트남, 앙골라와 모잠비크, 이집트와 터키를 비롯해 아시아와 아프리카와 중남미의 여러 지역에서는 반제국주의 투쟁과 저항 운동이 거셌다. 그 위세는 1968년에도 여전했다.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제3세계의 혁명 투쟁과 저항 운동이 없었다면 유럽과 미국에서 청년 봉기가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1968년 당시 프랑스의 노동자들은 역사상 최대 규모의 총파업을 통해 시위에 나선 학생들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위키피디아
서구 청년들이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와 호찌민을 ‘거인’으로 맞이한 건 혁명적 이상주의 때문만은 아니었다. 제3세계의 처절한 투쟁을 통해 서구 청년들은 제1세계와 제3세계 사이의 불평등한 억압과 종속 관계에 눈을 떴고 도덕적 책무를 자각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발 딛고 있는 세계가 무언가 근본적으로 잘못돼 있다는 생각이 퍼져 나갔다. 그 급진 의식의 지구화가 1968년에 정점에 달했다. 유럽과 미국의 청년들을 가장 화나게 만든 건 제1세계의 무모한 침략 전쟁이었고, 그들을 가장 들뜨게 한 건 제3세계의 혁명과 그 지도자들이었다. 특히 베트남전쟁 반대 투쟁은 다양한 국가들의 청년들을 하나로 묶는 결정적 주제였다. 1968년 2월17일과 18일 루디 두치케를 비롯한 서베를린의 대학생들은 ‘국제베트남회의’를 열어 미국의 베트남전쟁을 성토했고 “호, 호, 호찌민!”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벌였다. 집회에 모인 유럽 전역의 학생 투사들과 제3세계 청년 대표들은 베트남에서 “제국주의 전쟁을 끝내려면 항의를 저항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결의했다. 3월17일 파키스탄 출신의 영국 학생운동 지도자 타리크 알리는 영국 런던에서 미국의 베트남전쟁 반대 시위를 조직했다. 유럽과 미국의 학생들은 직접 북베트남을 방문해 반전 결의를 다지기도 했다.

“상상력에게 권력을!”이란 구호는
대안적 삶에 대한 갈망이면서
현존 질서에 대한 완강한 거부

‘68세대’는 단지 새로운 정치구조나
사회제도를 주장한 것이 아니라
삶의 양식과 가치를 문제삼았다

총리의 뺨을 때리며 “나치! 꺼져라!”
20대 여성이 남성 권력자를 후려친
이 사건은 ‘1968년 정신’의 실재


물론, 서구 대학생들이 가장 민감하게 느낀 고통은 대학 행정 당국의 권위주의와 비민주성이었다. 유럽과 미국의 대학은 1960년대 초 급격히 늘어난 학생들을 감당하지 못했다. 강의와 수업도 급진 학생들의 비판적인 지적 관심을 반영하지 못했다. 교수와 대학 직원들은 권위와 효율을 내세워 학생들을 통제하기에 바빴다. 그렇기에 대학생들은 직접 나서 ‘대안 대학’이나 ‘비판 대학’이란 이름으로 새로운 지적 실험과 문화적 전환을 전개했다. 특히 런던과 베를린, 프랑크푸르트의 대학생들은 강의와 학과 운영에서도 일방적 통제와 권위 구조를 깨고 ‘동등한 참여권’을 정착시키고자 노력했다.

1968년 5월13일 베를린자유대학 대강당에서 열린 토론회 장면. 책상 가운데 앉아 있는 사람은 68운동에 많은 영향을 준 사회철학자 허버트 마르쿠제. 사진집 <1968>
남성 총리의 뺨을 때린 20대 후반의 여성

그럼에도 불구하고, 1968년은 유독 ‘5월’에 가장 빛났고, 그것은 파리의 시간이었다. 독일 출신 유대계 학생인 다니엘 콘벤디트를 중심으로 한 학생들의 시위에 파리 경찰은 폭력으로 대응했다. 학생들은 돌을 던지며 맞섰고 5월10일 거리에 바리게이트를 쳤다. 경찰과 학생시위대 사이에 ‘무자비한 전투’가 진행되자 노동자 조직들이 총파업을 통해 학생들을 지지하고 나섰다. 역사상 최대 규모의 파업이었고 프랑스의 지배 질서는 마비될 듯했다. 6월에는 이탈리아에서 학생들이 투쟁의 파고를 높였고, 프랑스를 본받아 ‘학생 노동자 연합’을 결성했다. 하지만 학생운동 내부의 분파 투쟁, 노동자 조직들의 배반 및 지지 감소, 그리고 국가 권력의 새로운 공세로 인해 프랑스와 이탈리아 모두에서 혁명 투쟁의 파고는 차츰 가라앉았다. 1969년 초까지도 시위와 점거는 이어졌지만 혁명의 불꽃은 더 활활 타지 못했다.

1968년 청년 봉기가 초국가적인 보편적 배경과 지구적 성격을 지녔다고 해서 국가별 특수한 조건과 고유한 쟁점이 없진 않았다. 미국의 청년 봉기에서는 베트남전쟁 외에도 자유언론운동과 흑인 민권 투쟁이 항상 중요한 주제였고, 프랑스에서는 권위주의적 드골 체제에 대한 저항이 출발점이었다. 서독 청년들은 홀로코스트(유대인 학살)의 과거사 범죄에 대한 기성세대의 침묵을 참지 못했다. 이를테면, 1966년 말 나치 전력자인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거가 연방총리로 지명되었을 때, 청년들의 저항은 격렬한 방식을 띠게 되었다. 당시 나치 과거의 유산을 추적해 가고 있던 여성 언론인 베아테 클라르스펠트(1939년생)는 1968년 11월 집권당인 기민련(CDU)의 당 대회에서 단상에 앉아 있던 키징거 총리의 뺨을 때리며 “나치! 나치! 꺼져버려”라고 외쳤다. 20대 후반의 무명 여성이 남성 최고 권력자의 뺨을 후려친 이 사건은 ‘1968년 정신’의 실재였다. 그것은 기성세대에 대한 당시 청년세대의 환멸을 표현하기에 충분했다.

1968년 11월6일 기민련(CDU) 전당대회 현장에서 20대 여성 언론인 베아테 클라르스펠트가 갑자기 단상에 뛰어들어 쿠르트 키징거 총리(얼굴 감싸쥔 사람)의 뺨을 때린 뒤 당 관계자들의 제지를 받고 있다. 클라르스펠트는 키징거가 나치 정권 시절 괴벨스 선전상 밑에서 주도적으로 일한 경력을 들어 “나치! 꺼져버려!”라 외쳤다. 사진집 <1968>
1968년이 지나자 청년들은 혁명의 열기를 더는 유지하지 못했다. 저항을 주도했던 학생운동 조직은 이념 투쟁을 겪으며 내분을 거듭하고 분화됐다. 그중 일부는 억압적인 국가와 기만적인 사회 및 속물적인 대중들과 도저히 화해할 수 없었다. 1970년대 독일(적군파)과 이탈리아(붉은 여단)의 ‘테러주의자’들은 스스로 고립의 길을 걸어갔다. 극좌 테러주의는 대다수 68세대들에게 딜레마였다. 그들은 테러 행위와 테러를 통한 사회전복 전략에 동조할 수 없었지만, 기성 체제와 보수 언론이 테러 조직을 악마화하면서 ‘68 정신’의 의미를 모독하는 것을 마냥 감내할 수도 없었다. 그나마 1970년대 유럽 곳곳에서 정치 민주화가 확대되고 일상문화에서도 혁신이 일어난 것은 그들에게 위로가 되었다.

68세대는 단지 새로운 정치구조나 사회제도를 주장한 것이 아니라 삶의 양식과 가치 전체를 문제삼았다. 사진집 <1968>
68세대가 창립하고 주도한 시민단체는 급격히 늘어났고, 신사회운동이란 이름으로 불렸다. 68세대의 정당 정치 참여와 권력 분점으로 권위주의 정치 문화도 꽤 변했다. 특히 68세대가 가장 많이 진입한 교육과 문화 영역에서 가장 인상적인 변화가 나타났다. 대학 행정과 운영에 학생들의 참여가 보장됐고, 교수와 학생 간의 관계도 개선됐다. 대안 생활공동체와 하위문화도 융성했다. 다만 여기서 한가지 유의할 대목이 있다. ‘정치적으로는 실패했지만 문화적으로는 성공했다’는 식의 68에 대한 평가는 학문적인 것이 아니라 68세대 일부가 집단 결집을 유지하기 위해 만든 슬로건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정치와 일상문화를 서로 떨어진 것인 양 둘로 나누는 접근이야말로 68세대가 극복하려고 했던 인식 태도였기 때문이다. 68세대는 모든 삶의 영역에서 힘겹지만 부분적 성취를 이뤄냈다.

곳곳에 뿌리내린 68의 ‘현재화’ 작업

그로부터 50년이 지났다. 2018년 벽두부터 유럽 대륙 곳곳에선 ‘68’을 기억하는 마당이 활짝 열리고 있다. 2017년은 러시아 10월혁명 100주년을 맞는 해였고, 내년은 1989년 동유럽 공산주의 체제 붕괴 30주년이 되는 해다. 그 사이에서 ‘68’ 50주년을 맞는 경험은 가히 특별하다. ‘17’과 ‘89’ 사이에서 과연 68이란 어떤 의미를 지닐지에 대해 숙고할 더없이 좋은 기회다. 1968년 청년 봉기는 어느새 역사 전시를 통한 공적 기억의 대상이자 문화적 전승의 주제가 됐다. 유럽에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1968년 청년 봉기를 주제로 한 전시가 여러 지역에서 잇달아 열리고 있다. 크고 작은 역사박물관과 전시관 행사를 다 합치면 올해 대략 열 개가 넘는 ‘1968’ 기획 전시가 열린다.

흥미로운 점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1968년 청년 봉기의 거점 도시인 파리와 베를린만이 아니라 그동안 68과 관련해 잘 알려지지 않았던 도시들도 68의 현재화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독일만 놓고 봐도 슈투트가르트, 브레멘, 뮌스터와 카를스루에, 뉘른베르크 시의 박물관들이 ‘1968’ 특별 전시를 마련했다. 스위스의 수도 베른에 있는 역사박물관도 지난해 11월 중순부터 ‘1968 스위스’라는 제목으로 흥미로운 기획 전시를 열고 있다. 베른역사박물관의 기획 전시는 68세대의 생애사를 부각하고 있는데, 유례가 없을 정도로 많은 방문객이 찾고 있다.

스위스 베른이나 독일의 몇몇 중소 도시에서 68을 기억하는 전시가 열리는 사실 자체가 이미 68의 성격을 잘 드러낸다. 1968년 당시 스위스의 경우엔 드골 식의 권위주의 억압이나 서독의 긴급조치법 도입 같은 정치적 억압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대학 행정의 권위주의나 학생 자치권의 제약, 성적 억압과 문화 욕구의 억제, 동성애자에 대한 탄압, 여성 차별 등은 고스란히 스위스 청년들의 비판 대상이었다. 그들도 거리에서 베트남 전쟁 반대를 외쳤고 롤링스톤스의 록 음악을 따라 불렀다. 전시는 위로부터의 직접적인 정치 억압의 유무가 아니라 청년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저항의 거점이 되었음을 똑똑히 알린다. 더 많은 자유와 문화 충족에 대한 청년들의 욕망이 넘쳤기 때문이다.

베트남전쟁 반대 투쟁은 여러 나라 청년들을 하나로 묶는 결정적 주제였다. 1968년 당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벌어진 반전 시위 모습. 위키피디아
독일 남부 바덴뷔르템베르크주의 수도 슈투트가르트 중앙역 근처엔 멋진 주립 역사박물관이 있다. 이 ‘바덴뷔르템베르크 역사의 집’은 지난해 12월22일부터 ‘바덴뷔르템베르크의 60년대’라는 제목으로 특별 전시회를 마련했다. 부제는 밥 딜런의 대표 곡인 ‘시대는 변하기 때문에’(The Times They Are a-Changin’)다. 이 기획 전시는 전시 공간의 4개 면을 7개로 나누어 1960년대의 가장 중요한 세계사 사건을 짧은 다큐 영상으로 연달아 보여준다. 독일 남부 지방의 68이 지닌 국제적 맥락을 부각하기 위한 장치다. 특히 이 전시는 ‘장기 60년대’라는 역사학의 새로운 시대 규정을 받아들여, 1958년부터 1973년의 석유 위기까지를 포괄했다. 약 300개의 전시품은 장기 60년대에 청년들이 새롭게 창조하고 수용했던 사회문화의 변화가 무엇인지를 잘 드러낸다.

‘변한 건 더 앞서, 변화는 더 오래…’

전시의 세부 주제는 록 음악과 정치, 성도덕의 변화와 젠더 관계, 미니스커트와 유행의 변화, 서독 비상조치법과 그에 맞선 저항, 대학 내 갈등 그리고 사적 자유공간과 클럽 문화 등 여섯 가지다. 그것은 68이 근본적으로 중앙 정치나 국가권력의 문제만이 아니라 청년들의 삶의 문제였음을 부각한다. 60년대 청년들의 새로운 일상문화는 단순히 그 세대의 취미나 기호의 문제가 아니라 기성세대를 향한 도발과 대결의 도구였다. 이를테면, 당시 서베를린에서 록 밴드를 이끌었던 볼프강 자이델은 “영어로 노래를 부르는 것만으로도 기성세대가 전쟁에서 다시 한 번 패하도록 만들기에 충분했다”며 일상문화의 저항성을 강조했다. 전시가 그렇게 일상문화에 초점을 맞추니 68이 ‘혁명’이라기보다는 ‘역동적인 장기 60년대’를 함축하는 상징으로 간주되는 것은 너무 자연스럽다.

당시 청년들은 “서른 살이 넘은 사람은 누구도 믿지 말라!”고 외치며 기성 사회의 모든 것을 온몸으로 거부했다.
물론, 5월 파리의 바리케이드를 기억한다면 1968년을 빛나는 ‘혁명의 날들’로 기억할 수도 있다. 슈투트가르트와 베른의 역사 전시는 그것을 배제하지 않는다. 두 전시는 모두 1968년의 강렬함을 전달한다. 그렇지만 기성 체제와 문화의 거부 및 새로운 삶의 실험과 모색에 초점을 맞추면, 청년 세대의 경험과 기억에서 1968년은 그렇게 결정적이지는 않았다. 일상문화가 변하기 시작한 것은 더 앞선 일이었고 변화의 흐름은 더 오래갔기 때문이다. 삶에 대한 새로운 태도와 생활환경의 변화를 위한 모색은 장기 60년대 내내 진행됐다. 장기 60년대는 1968년의 혁명을 낳은 씨앗이거나 배경이 아니라 오히려 ‘1968’의 구체적 실재다. 베른과 슈투트가르트의 역사 전시가 보여주듯이, 1968년은 결정적 전환, 즉 “모든 것을 바꾼 해”가 아니라 1960년대 지역과 국가에 따라 다양하게 진행된 여러 혁명적 분출과 삶의 구체적 변화들을 함축하는 암호였다.

이렇듯 68을 장기 60년대로 전환하는 해석이 지니는 의의는 일시적인 혁명적 분출보다는 일상문화의 해방과 새로운 삶의 모색 노력을 더 부각하는 데 있다. 사실 1968년 봉기 때 청년들의 목표는 특정한 정치 강령을 구현하는 전통적인 의미의 사회혁명이나 정치혁명이 아니었다. 1968년 청년 봉기는 행동 강령을 지닌 혁명 투쟁의 발현이라기보다는 억압에 대한 다양한 분노와 대안 모색의 우발적 연쇄 작용이었다. 아울러 그것은 지속적으로 기성 가치와 문화 규범에 맞서 더 많은 자유와 연대와 해방을 찾아 나섰던 장기 투쟁의 중간 정점이었다.

“마지막 뜨거운 혁명, 최초의 쿨한 봉기”

같은 맥락에서 프랑스 역사학자 폴 벤느는 ‘1968’을 “마지막 뜨거운 혁명적 사건이자 동시에 최초의 쿨한(cool·차분한) 봉기”라고 말했다. 1968년 청년 봉기는 분명 국가 권력에 맞서 싸우며 대안을 구현하려는 지향을 포함했다. 베트남전쟁 반대와 대학 행정의 민주화 및 정치 억압의 해제는 그것에 해당된다. 그런 한에서 “뜨거웠”고 전통적인 혁명 모델을 따랐다. 그러나 1968년 청년 봉기는 지배의 변화만을 목표로 삼지 않았다. 사회적 삶의 모든 영역을 문제 삼았고 가정과 학교와 직장과 사회관계의 모든 영역에서 인간화와 민주화를 요구했고 삶의 방식 전체를 다르게 만들고자 했다. 그것은 국가 권력의 변화가 아니라 삶 자체의 갱신을 모색했다. 모든 종류의 권력 관계와 위계 질서가 낳은 두려움과 불안 및 위협과 위험에 대한 저항이었고 삶에 대한 자기결정과 공동결정이었다. 그렇기에 그것은 단기간에 활활 타는 ‘뜨거운’ 혁명이라기보다는 ‘쿨’하게 장기 지속될 투쟁이었다.

‘68’은 분노와 대안 모색의 연쇄 작용
더 많은 자유와 연대와 해방을 원했던
장기 투쟁의 중간 정점이었다

‘장기 60년대’는 68년의 혁명을 낳은
씨앗이거나 배경이 아니라
오히려 ‘1968년’의 구체적 실재

‘68’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함의는
두려움과 소심함을 극복하고
삶의 조건에 균열을 내는 용기


프랑스 파리 ‘쇼아 추념관’ 올해 기획전시장 모습. 20대 여성 언론인 베아테 클라르스펠트가 독일 총리의 뺨을 때린 사건과 관련된 내용이 전시돼 있다. 이동기 제공
‘1968’ 50주년을 맞아 ‘더 나은 세상은 가능하다’며 새로운 정치 동원과 연대 운동의 결집을 강조하는 일은 가능하고 필요하다. 자본주의 모순과 제국주의 전쟁에 맞서고 공산주의의 억압도 비판했던 신좌파의 대안 사상과 운동 전략의 함의는 작지 않기 때문이다. 노동자와 학생들이 함께 지배질서를 멈추었던 ‘파리의 5월’을 잊을 수는 없다.

하지만 신좌파들의 유토피아 정치사상을 복원하려는 시도는 그다지 유용하지 않다. 총체성에 의거한 사회이론, 이상주의적 ‘새로운 인간’ 또는 섬광 같은 ‘메시아적 시간’ 등의 개념과 구상은 ‘그 후’ 68세대 자신들에 의해 거두어졌다. 설령 유토피아 지향과 이상주의 열정이 없더라도, 모든 종류의 억압 현실과 비민주적 권력 관계에 완강하게 도전할 수 있다. 자신의 삶에 대한 주체적 형성 능력과 사회관계에 대한 개입 의지를 확대할 수 있는 문화적 힘이야말로 진정 필요하다. ‘68’, 다시 말해 장기 60년대가 21세기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함의는 기성 질서와 체제가 안겨준 두려움과 소심함을 극복하고 주어진 삶의 조건과 악습에 균열을 내는 용기다. 68은 기성 질서와 권력 관계에 계속 의문을 던지고 복종하지 않고 도전하는 삶의 문화를 알렸다. 작은 삐딱함이 큰 혁명을 만든 동력이었다. 권력의 횡포와 권위의 폐습에 맞서는 일이 21세기에 제2차 장기 60년대를 내는 길이다. 일상에서 자기 삶을 바꾸는 과정에서 비로소 국가 권력과 세계 자본주의 현실에 대해서도 급진적 요구를 새롭게 벼릴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역동적인 장기 60년대는 우리에게 지구적 연관성과 상호작용이 지닌 동력을 일깨웠다. 1960년대 한국의 민주주의 운동도 서구의 장기 60년대 발전에 영향을 줬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베트남전쟁 반대 흐름에 한국은 동참하지 못했다. 회고적으로 보면, 한국군의 베트남 양민 학살 못지않게 세계적 반전 투쟁이 한국에 전이되지 못한 이유와 맥락도 비판적으로 따져 봐야 할 것이다. 68의 세계사적 동시성에 한국 사회가 함께하지 못한 건 그 후의 정치적 질곡과 문화적 지체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최근 ‘미투’(#me Too) 운동에서 알 수 있듯이, 저항과 봉기는 지구적 연대와 동시적 전이를 통해 더 큰 폭발력을 갖는다. 한국 사회의 가부장 질서와 남성 지배의 문화를 염두에 둔다면, 세계적 동시성과 확산 과정이 없었을 경우 그것이 이 땅에서 과연 순조롭게 발현될 수 있었을까 의문이 든다. 세계적 상호작용과 전이 가능성을 높이면, 저항 방식과 투쟁 기회가 더 많이 발견되고 발명될 것이다. 21세기 지구적 연관성이 강화되면서, 삶에 대한 자기결정과 사회관계에 대한 공동결정의 학습 과정이 새로운 단계로 진입했다. 어쩌면 삶의 많은 영역에서 남성(!) 권력자들의 ‘버릇을 고칠’ 기회가 다시 찾아오는 듯하다. 밥 딜런이 노래한 것처럼 “시대가 변하기 때문에”.

파리·베를린·슈투트가르트/이동기 강릉원주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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