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의 낯선 사이]페이스북 시대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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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7.03.19. 오후 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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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파면 결정은 절반의 기쁨이었다. 전원일치는 다행이지만 혐의 내용 중 최순실씨 건 외에는 무죄를 선고했기 때문이다. ‘일곱 시간’ 행적 논란은 국정 최고책임자로서 박 전 대통령의 무능과 게으름을 상징한다. 평범한 사람의 불성실도 큰 사고를 초래할 수 있는데, 헌재는 박 전 대통령의 황당한 본분 망각 행위를 불법이 아니라고 본 것이다. 대통령의 불성실은 죄(sin)일까, 범죄(crime)일까.

개념상으로는 죄와 범죄는 차이가 있지만 박 전 대통령의 경우처럼 그 결과는 다를 바 없는 시대다.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세상이지만, 오히려 사회관계는 밀접해졌고 도미노 현상은 빠르고 빈번하게 일어난다. 이 문제에 대해, 마셜 맥루언의 “미디어는 메시지다”보다 정확한 말은 없을 것이다. 과연, 과녁을 명중한 명제다. 그는 미디어(매체)를 몸의 확장이라고 분석했다. 미디어 폭발 시대인 지금, 인간의 몸은 확대되다 못해 부풀어서 서로 부대끼고 있다. 친하지 않아도, 적대 관계라도 상호 영향력은 커진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인간은 기계를 만들고 기계는 다시 인간을 만든다. 미디어는 지식을 전달하는 요인(agents)이 아니라 사건을 만드는 주체다. 내용은 형식을 따른다. 맥루언은 TV나 인터넷뿐 아니라 도로, 종이, 자동차, 옷, 돈, 시계, 게임, 주택 등 모든 것이 인간의 확장으로서 미디어라고 보았다. 큰 승용차가 작은 차를 무시하는 현상은 차가 인간의 확장, 즉 자아의 확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차격(車格)이 인격”인 ‘이유’다.

자동차도 이럴진대 당대 미디어의 대표를 자임하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의 상황은 어떨까. 사람마다 SNS에 대한 접근성과 관계의 밀도는 다르므로 트위터나 페이스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감각에도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그것의 비윤리성이다. 장단점 논의와 무관한 문제다. “행사 공지가 빠르다, 내비 기능이 있다”는 식의 발상, 즉 양비론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핵심은 새로운 미디어는 인간 본성과 사회 자체를 변화시킨다는 자본의 법칙이다. 나는 SNS가 현대 자본주의의 만성화된 실업에 대한 ‘보상’, 즉 장난감이라고 생각한다. 시간 보내기에 이만한 것이 없다. 소설가 김영하는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손 안의 인터넷, 스마트폰은 ‘시간 도둑’이다. (중략) 이제 가난한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자기 시간을 헌납하면서 돈까지 낸다. 비싼 스마트폰 값과 사용료를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반면 부자들은 이들이 자발적으로 제공한 시간과 돈을 거둬들인다. 어떻게? 애플과 삼성 같은 글로벌 IT기업의 주식을 사는 것이다. 그들은 클릭 한 번으로 얼굴도 모르는 이들의 시간을 헐값으로 사들일 수 있다.”

나는 그의 의견에 ‘인간의 타락’을 보태고 싶다. SNS의 익명성과 속도는 ‘팩트’를 점검할 필요가 없다. 따르는 사람(팔로어)이 많은 이가 어떤 의도를 갖고 있는가에 따라 사회가 달라진다면? 파시즘보다 더 무서운 세상이 될 것이고 이미 그러하다. 트위터에서의 이전투구로 ‘멘붕’ 상태를 넘어 ‘생사’를 오가는 사용자가 적지 않다. 지금 이곳은 자기도취와 욕망, 무지로 무장한 인간이 판치는 지옥이다(‘헬조선’). ‘6대 종합’ 일간지 중 하나인 모신문사의 트위터 팔로어는 50만명 선인데, 80만명의 팔로어를 ‘거느린’ 개인이 존재한다. 모 노동조합의 팔로어는 300명인데, 노동조합 소속(?)의 ‘스타 노동자’는 5만명인 경우가 있었다. 그는 노조의 결정 사항을 사리사욕을 위해 번복, 허위 사실을 유포했다. ‘보통’ 사람보다 평판을 중요시하는 진보 진영, 페미니스트는 더욱 그럴 가능성이 많다. 나의 요즘 고민 중 하나도 이런 ‘페미’들이다.

페이스북의 ‘페이스(face)’는 흥미롭다. 페이스는 “얼굴, 얼굴 표정, 마주하다, 직면하다, 상황에 처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페이스북은 얼굴을 모르는 사람들이 대면하지 않은 곳이다. 이때 페이스는 가상(假想)의 얼굴이다. 가짜 얼굴이라는 뜻이 아니라 타인으로 하여금 상상케 하는 이미지다.

나는 이 매체가 부정의의 온상이라고 본다. 이곳에서의 자기 포장은 사기 수준이다. ‘실제’ 그·그녀는 후안무치에 능력은 없으면서 출세에 혈안이 된 인물인데 페이스북에서는 그런 인격자, 매력자, 실력자가 없다. 페이스북은 인격 세탁소다. 이들은 오프라인에서 그 이미지를 활용, 이익을 취한다. 억울하면 당신도 페이스북을 사용하라? 그래서 모든 이들이 페이스북에서 자기선전 경쟁을 해야 할까.

내 가정도 틀렸다. 물론 모든 사용자가 인격을 세탁하지는 않지만 페이스북에서 자신을 나쁘게 말하는 이는 없다. SNS 사용자는 자본의 위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전위가 되었다. 나더러 19세기 초반 과학의 발전으로 실업위기를 느낀 영국 노동자의 기계 파괴 운동인 러다이트(Luddite)주의자라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모두가 과학기술에 열광하고 있으니 러다이트 현상은 없다. 대중은 자본주의의 성장과 그 열매를 사랑한다.

혐오 발언은 얼굴을 맞대고 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인터넷은 그것을 가능케 한다. 사용자의 얼굴이 없기 때문이다. “얼굴을 맞댄다”는 행위는 책임감을 동반한다. SNS에 대한 열광에는 대면 윤리로부터의 도피가 포함되어 있다. 글의 서두로 돌아가면, 나는 대통령으로서 박근혜씨의 대면보고 기피가 더욱 문제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희진 |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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