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의 위대한 국모

마리아 테레지아

Maria Theresia

독일-오스트리아 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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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테레지아 마리아 테레지아
마리아 테레지아
출처 :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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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마리아 테레지아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6세의 장녀로 태어나 합스부르크 왕가의 유일한 여성 통치자가 되었다. 그녀는 카를 6세의 국사조칙에 따라 합스부르크의 상속권을 넘겨받았으나, 합스부르크와 친족관계를 맺은 유럽 열강의 이의 제기로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에 휘말렸다. 결국 그녀는 1748년 10월 체결된 아헨 평화협정에 의해 모든 유럽 국가로부터 합스부르크의 상속권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여성이 승계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마리아 테레지아는 남편 프란츠 슈테판을 명목상의 황제로 즉위시켰으며, 그녀는 실질적인 통치자로 오스트리아 및 신성로마제국의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특히 그녀는 왕위계승 전쟁 이후 쇠약해진 오스트리아의 국가 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으며, 18세기 유럽 열강의 세력 각축전에서 오스트리아를 견고히 지켜낸 뛰어난 정치가였다.

  • 왕가 합스부르크 ▶
  • 직위 황후, 대공
  • 외국어표기 Maria Theresia
  • 공식칭호 마리아 테레지아 황후
  • 지역 오스트리아
  • 재위기간 1745년 9월 13일 ~ 1765년 8월 18일 (신성로마제국 황후), 1740년 10월 20일 ~ 1780년 11월 29일 (오스트리아 대공)
  • 출생 - 사망 1717년 5월 13일 ~ 1780년 11월 29일
  • 가족관계 부친 : 카를 6세(Karl Ⅵ)
    모친 :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Elisabeth Christine)
  • 계보 전임자 : 카를 6세(Karl Ⅵ)
    후임자 : 요제프 2세

출생과 성장 과정

마리아 테레지아는 1717년 5월 13일 빈에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6세와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가문의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의 장녀로 태어났다. 그녀가 태어나기 한 해 전인 1716년에 출생했던 장남이 유아기에 사망한 후, 카를 6세는 계속해서 아들의 출생을 기다렸기 때문에 마리아 테레지아는 미래 군주로서의 교육을 받지 못하고 성장했다. 따라서 그녀는 세습령의 언어인 헝가리어와 체코어가 아닌 라틴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그리고 스페인어를 배웠으며, 왕가의 딸들이 받는 예절, 음악, 댄스 등의 일반적인 교육을 받았다.

카를 6세의 희망에도 불구하고 왕위를 계승할 아들이 태어나지 않자 마리아 테레지아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상속자가 되었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장차 받을 상속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여자가 계승할 수 없었기 때문에 유럽 열강들은 합스부르크 왕가와의 혼인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카를 6세는 프로이센, 스페인 그리고 포르투갈 왕가와 혼인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나, 마리아 테레지아는 이미 9살 연상의 로트링엔 가문의 프란츠 슈테판과 연애를 하고 있었다. 카를 6세는 두 사람의 결혼을 허락하였고, 1736년 2월 12일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한편, 카를 6세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장래 및 영토를 지키기 위해 합스부르크의 혈통과 영역을 유지하는 데 큰 힘을 쏟았다. 이와 관련한 법령 ‘국사조칙’이 1713년 공포되었다. 카를 6세는 이 법령을 통해 합스부르크 왕가의 남자 후계자가 없을 경우, 장녀가 왕위계승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그리고 국사조칙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목적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통치권 내에 포함된 국가 각각의 고유한 특성들로 인해 드러난 차이, 즉 인종적, 문화적 이질감을 통합하는 것이었다. 끝내 남자 후계자를 얻지 못한 카를 6세는 부단한 외교적 노력을 통해 열강과 신성로마제국의 연방 군주들로부터 마리아 테레지아가 합스부르크의 왕위를 계승할 수 있도록 승인을 얻어냈다.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 및 7년 전쟁

1740년 10월 20일 카를 6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마리아 테레지아가 국사조칙에 따라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장이 되었다. 그 당시 유럽 내에서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향력은 많이 약화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카를 6세의 사망 후 합스부르크와 친족관계를 맺은 유럽 열강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재산 상속권에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바이에른의 선제후 카를 알브레히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요제프 1세의 딸, 즉 마리아 테레지아의 사촌과 혼인을 통해 합스부르크 왕가와 동등한 상속 권리를 주장했다. 더욱이 바이에른, 작센 그리고 프랑스는 합스부르크의 분할을 위해 동맹을 맺었다.

1740년 프로이센의 젊은 왕 프리드리히 2세(훗날 프리드리히 대왕)가 선전포고 없이 군대를 이끌고 합스부르크의 북동쪽 영토인 슐레지엔을 침범하였다. 이 사건은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1차 슐레지엔 전쟁은 1742년까지 지속되었고, 결국 프로이센의 승리로 오스트리아는 슐레지엔의 영토를 잃게 되었다.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침공 이후 다른 열강들도 합스부르크의 영토를 침범하기 시작하면서 전쟁은 본격화되었다. 1741년 프랑스와 바이에른 연합군은 오버외스터라이히와 보헤미아를 점령했다.

한편, 마리아 테레지아는 1741년 6월 25일 헝가리 여왕으로 즉위하면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시킬 기회를 얻었다. 그녀는 헝가리 의회의 승인을 얻어내 거듭되는 전쟁으로 바닥난 전비를 마련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2만 명의 군대를 지원받았다. 그러나 1741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선출에서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 프란츠 슈테판이 바이에른의 선제후 카를 알브레히트에 패배하면서 신성로마제국 내 합스부르크의 명예는 실추되었다.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이름뿐인 지위에 불과했지만 합스부르크 왕가가 15세기 중반 이후부터 세습해왔기 때문에 황제 선출 결과는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굴욕감을 선사하기에 충분했다.

1742년 2월 카를 알브레히트가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7세로 즉위한 다음 날 바이에른의 수도 뮌헨은 오스트리아 군대에 점령되었다. 1743년 마리아 테레지아의 군대는 프랑스의 점령지였던 보헤미아의 수도 프라하를 빼앗는 데 성공하였고, 그 해 5월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라하에서 보헤미아 여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평화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1744년 8월 프로이센의 군대가 다시 보헤미아를 침공하면서 2차 슐레지엔 전쟁이 시작되었다. 1745년 1월 8일 프로이센에 대항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영국, 네덜란드 그리고 작센-폴란드가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이 전쟁에서 패배하여 드레스덴 조약을 통해 슐레지엔을 프로이센의 영토로 인정하였고, 프로이센은 이에 대한 회답으로 프란츠 슈테판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제위를 인정하였다. 이 전쟁은 1745년 12월 끝이 났다.

1745년 1월 20일 카를 7세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 막시밀리안 3세는 여러 차례 마리아 테레지아와의 전투에서 패배했다. 그 결과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 즉위할 수 있었으며, 바이에른은 왕위계승 전쟁에서 이탈하였다. 프란츠 1세의 신성로마제국 황제 즉위 이후 프로이센은 사실상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네덜란드, 독일, 이탈리아에서 전개되는 프랑스와 영국-오스트리아 동맹국의 전쟁도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결국 양측은 1748년 10월 아헨에서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전쟁을 종식시켰다.

1748년 10월 체결된 아헨 평화조약을 통해 마리아 테레지아는 국사조칙에 근거한 자신의 상속권을 모든 유럽 국가로부터 승인받게 되었다. 마침내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이 끝이 났으며, 이 전쟁을 통해 마리아 테레지아는 슐레지엔을 제외한 자신의 영토를 방어할 수 있었다. 그리고 프로이센은 중부 유럽 내에서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적할 경쟁자로 부상하였다. 반면, 신성로마제국의 명성은 더욱 실추되었다.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이름뿐인 지위에 불과했지만, 황제 칭호가 결국은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주어진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왕위계승 전쟁에서 프로이센에 빼앗긴 슐레지엔을 되찾기 위해 내정 개혁과 군사 개혁을 이끌었다. 또한 1756년 프로이센과 영국이 동맹을 체결하자, 이에 대항하기 위해 오스트리아는 15세기 중반 이후부터 오랜 숙적이었던 프랑스와 화해를 도모하여 1756년 동맹을 맺었다. 엘리자베타 여왕이 통치하던 러시아를 동맹에 참여시켜 반(反)프로이센 전선을 구축하였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프랑스 루이 15세의 애첩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던 퐁파두르 부인, 합스부르크의 마리아 테레지아, 러시아의 엘리자베타 여왕이 연대했음을 가리켜 ‘3자매의 패티코트 작전’으로 부르고 있다.

이 동맹을 통해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 프랑스, 그리고 러시아 동맹세력에 둘러싸이게 되었다. 이에 위협을 느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1756년 8월 29일 선전포고 없이 작센을 침공하였다. 이것이 3차 슐레지엔 전쟁으로 불리는 7년 전쟁의 시작이었다. 이 전쟁은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중 어느 나라에도 결정적인 성과를 안기지 못한 채 여러 해 동안 계속되었다. 결국 이 전쟁은 1763년 후베르투스부르크 평화협정을 통해 종식되었고, 슐레지엔은 최종적으로 프로이센의 소유가 되었다.

7년 전쟁 종식 후 마리아 테레지아는 슐레지엔의 영토 상실을 부분적으로 보전하기 위하여 1772년 폴란드의 분할에 참여했으며, 그로 인해 그녀는 갈리치엔과 로도메리엔 지역을 획득할 수 있었다.

통치

마리아 테레지아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장이었지만, 여성의 계승을 금지한 신성로마제국 황제에는 즉위할 수 없었다. 오스트리아 군대가 바이에른을 점령한 이후 망명 중이던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7세가 1745년에 사망하자 이를 계기로 마리아 테레지아는 남편 프란츠 슈테판을 신성로마제국 황제에 즉위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마리아 테레지아 남편 프란츠 1세는 명목상의 황제이기도 했지만 정치적인 능력과 관심도 없었다. 그리하여 마리아 테레지아가 모든 국정을 담당하였다.

특히 마리아 테레지아는 왕위계승 전쟁 이후 쇠약해진 오스트리아의 국가 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우선 그녀는 자문위원회의 프리드리히 빌헬른 폰 하우크비츠의 계획을 수용하여 전쟁으로 인해 바닥난 오스트리아의 재원을 마련 및 군대 확장에 따른 재정 확보를 위해 재산세를 인상하였고, 조세제도를 개편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유럽 열강의 군사 체제에 부합하는 근대화된 군대 양성을 위한 것이었다. 조세제도 개편에 따라 영주들이 누렸던 면세특권이 폐지됨으로써 처음으로 귀족과 성직자도 세금 납부의 의무를 갖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세금 징수를 위한 토지대장이 도입되었다. 그리고 교육정책 개편을 담당할 중앙기구가 1760년에 설립되어, 전국에서 초등학교 의무교육이 실시되었다.

1765년 프란츠 슈테판이 서거하자 마리아 테레지아는 큰 충격을 받았고, 짧은 머리에 늘 상복을 입고 다녔다. 그녀는 점차적으로 공개석상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정치적 권력은 변함없이 행사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장자 요제프 2세와 합스부르크 왕가를 1765년부터 그녀가 사망할 때까지 공동으로 통치하였다. 이러한 지배 구조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역사에서 단 한 번도 시행된 적이 없는 정부 형태였다.

이러한 통치 구조로 인해 모자간의 불화가 시작되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정치적 보수 성향은 요제프 2세가 표방하는 계몽주의와 부딪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가 여전히 오스트리아의 통치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요제프 2세의 정치적 활동 및 계획은 그녀에 의해 제약을 받았다. 결국 요제프 2세는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의 비판자가 되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여자라는 불리한 점을 극복하고 합스부르크 왕가의 유일한 여성 통치자로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통치 기간 동안 오스트리아는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문화적으로 번성하였으며, 왕정의 근대화를 이루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18세기 유럽 열강의 세력 각축전에서 오스트리아를 견고히 지켜낸 뛰어난 정치가였다.

서거

마리아 테레지아는 중년부터 시작된 과체중으로 인해 노년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 때문에 1743년 ~ 1749년까지 보수를 끝낸 쉔부른 궁전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1780년 11월 29일 폐렴으로 빈의 호프부르크 성에서 사망하였다. 그녀의 시신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묘소인 카푸치너 성당에 남편 프란츠와 함께 안치되었다.

마리아 테레지아와 남편 프란츠 슈테판의 묘

가족 관계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슈테판(황제 프란츠 1세)은 놀랍도록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다. 둘 사이에 딸 11명, 아들 5명을 두었으나, 마리아 테레지아가 살아 있는 동안 모두 6명의 자녀가 사망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로이센에 대항하기 위해 오랜 숙적이었던 프랑스와의 화해를 도모했다. 그런 까닭으로 그녀는 자녀들을 대부분 프랑스, 스페인 그리고 이탈리아의 부르봉 왕가와 정략결혼을 성사시켰다.

• 배우자 프란츠 슈테판(Franz Stephan, 1708년 ~ 1765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란츠 1세

• 자녀
- 마리아 엘리자베트(Maria Elisabeth, 1737년 ~ 1740년), 유아 사망
- 마리아 안나(Maria Anna, 1738년 ~ 1789년), 몸이 불편해 결혼 못함(수도원 생활)
- 마리아 카롤리나(Maria Karolina, 1740년 ~ 1741년), 유아사망
- 요제프 2세(Joseph Ⅱ. 1741년 ~ 1798년), 마리아 테레지아의 후계자
- 마리아 엘리자베트(Maria Elisabeth, 1743년 ~ 1808년), 인스부르크의 수도원장
- 카를 요제프(Karl Joseph, 1745년 ~ 1761년), 대공(16세 사망)
- 마리아 아말리아(Maria Amalia, 1746년 ~ 1804년), 파르마 가문 페르디난트 공작과 결혼
- 페터 레오폴트(Peter Leopold, 1747년 ~ 1792년), 스페인 카를 3세의 딸, 마리아 루도비카와 결혼
- 마리아 카롤리네(Maria Karoline, 1748년 ~ 1748년), 유아 사망
- 요한나 가브리엘라(Johanna Gabriela, 1750년 ~ 1762년), 천연두로 12세에 사망
- 마리아 요제파(Maria Josepha, 1751년 ~ 1767년), 16세 사망
- 마리아 카롤리나(Maria Karolina, 1752년 ~ 1814년), 스페인 카를 3세의 아들 페르디난트 1세와 결혼
- 페르디난트 카를 안톤(Ferdinand Karl Anton, 1754년 ~ 1806년), 이탈리아 모데나-에스테 가문의 마리아 베아트리체와 결혼
- 마리아 안토니아(Maria Antonia, 1755년 ~ 1793년), 프랑스 왕 루이 16세의 부인(마리 앙투아네트)
- 막시밀리안 프란츠(Maximilian Franz, 1756년 ~ 1801년), 대주교, 쾰른의 선제후

참고문헌>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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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 번즈/R. 러너/S. 미첨 (손세호 번역), 『서양문명의 역사: (하) 근대에서 우주 시대의 개막까지』, 소나무, 2010년.
Herre, Franz : Maria Theresia. Die große Habsburgerin, Köln 1994년
Iby, Elfriede : Maria Theresia (1717-1780). Biographie einer Kaiserin, Wien 2009년
위키피디아
합스부르크의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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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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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자

    성균관 대학교 인문학부 역사학과 초빙교수.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교에서 정치학, 철학 그리고 역사학으로 석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동 대학에서 아른트 바우어켐퍼 교수의 지도 아래 나치의 문화 외교 정책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나치의 문화 외교 정책에서 반유대주의와 반공산주의>> 출판 및 논문 발표. 현재 나치의 문화 외교 분야에서 선동 정책, 반유대주의, 반공산주의, 대일 문화 외교, 극장과 도시 등에 관해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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