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원 헌드레드(ONE HUNDRED)

김구 선생이 머물렀던 100년을 버텨온 고택, 강화 대명헌(大明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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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조쵸

공식

2020.10.04. 05:322,812 읽음

트래진의 '원 헌드레드(ONE HUNDRED)' 프로젝트는 한 세대, 한 세기 100년의 시간을 담고 있습니다.  
백 년 이상 된 유무형의 가치를 찾고 선별해 알리는 프로젝트입니다. 
우리나라의 지난 100년은 일제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며 버티고 살아남은 고귀한 자산입니다. 
이를 지속 가능하게 하기 위해 브랜드의 가치를 발견하고, 그 가치를 품은 여행 코스와 기념품을 만들어 

100년의 시간을 일상에서 간직하고자 합니다.

일제강점기 혼란의 시대에도 강경하게 우리나라를 지키기 위해 애쓴 곳이 있다. 강화도 남문 근처, 1928년에 지어진 고택, 그곳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여러 방면으로 독립을 지원했고, 꼿꼿한 자세로 일제의 탄압을 견뎠다. 당시 백범 김구 선생이 오갔던 고택이라 해 '김구 고택'이라 알려져 왔다. 

외국 문물이 조금씩 스며들었던 때 지어졌던 고택엔 그 독특한 흔적도 집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창에 새긴 문양 하나도 우리나라를 지키기 위한 메시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를 버텨낸 고택은 광복 후 40여 년 동안 먼지가 쌓였고, 최근 조금씩 그 모습을 되찾고 있다. 우리 문화유산을 소중히 여기는 새로운 주인장, 최성숙 씨의 손길 덕분이다. 

남문한옥 대명헌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신문길18번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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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굳건한 마음을 품은 집 

1900년 경, 백범 김구 선생이 강화도 김주경 선생의 고택을 찾았다.

그전에 김구 선생은 명성왕후를 시해했다고 여겼던 일본인 육군 중의를 살해해 사형선고를 받고 인천 감옥에 있었다. 이때 강화도에 머물던 김주경 선생은 자신의 재산으로 김구 선생을 구하려고 애를 썼고, 시를 보내 탈옥하라는 용기를 줬다. 김구 선생은 탈옥에 성공해 은인으로 여겼던 김주경 선생을 찾으러 강화도에 왔다. 김구 선생 20대, 김주경 선생이 40대의 일이었다. 하지만 김주경 선생은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을 떠난 뒤였다. 김구 선생은 이곳에서 김주경 선생을 기다리며 아이들을 모아 3개월 동안 서당을 운영했다. 글을 몰랐던 강화도 사람들에게 보탬이 되기 위해서였다.

그 후 강화도에서도 손꼽히는 부자인 황국현 선생이 집을 샀고, 1928년 지금의 모습으로 지어졌다. 광복 후, 1947년 김구 선생은 한국 임시정부 수석으로서 다시 찾았다. 독립 활동을 지지해 줬던 강화도 지인들과 기념사진을 남겼는데, 이 '한 장의 사진'으로 고택의 고귀한 의미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강화도는 1000년 전 고려 시대에 만들어진 사대문의 흔적이 아직 남아있고, 여전히 많은 이들이 오가고 있는 곳이다. 남문 근처, 1928년에 지어진 고택이 그 의미를 되찾고 있다. 고택에 들어선 작은 서점과 그릇가게, 카페는 그 일부일 뿐이다. 문안으로 들어서면 100여 년의 고귀한 시간이 겹겹이 쌓여 있다. 일제강점기 우리나라를 지키기 위해 교육에 힘썼던, 독립지사를 도왔던, 황국현 가문 사람들의 역사가 있는 곳이다. 

그들은 일제가 방해하지 못하도록 사립유치원을 지어 한글을 가르치기도 했고, 방직 공장을 운영하며 미국 선교사 아펜젤러와 함께 배재학당을 운영하기도 했다. 집 곳곳을 살피면 독립 의병을 숨겨줬을 비밀 통로와 공간도 발견할 수 있다. 

집은 본채와 문간채, 별당채, 곳간채 등으로 이뤄져 있는데 현재는 본채와 본간채가 남아있다. 본채에서 강화 특산물인 순무와 사자발쑥을 우려낸 차 한 잔과 함께 이 집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새로운 주인장인 최성숙 씨가 8년 전 집을 인수하고 현재도 하나하나 복원하고 있다. 대명헌에 대해 알고 싶다면, 예약을 통해 주인장의 해설을 듣거나 하룻밤 머무를 수 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얼마나 이 집에 대한 애정이 깊은지 절로 느껴진다. 

돌 한 조각 버릴 수 없는 집, 그 고귀함을 알기에

고려 시대 당초문양이 새겨진 선반 지지대
고려 시대 상감청자의 문양으로 새겨 넣은 주인장 최성숙 씨가 만든 소창 보자기
고려 시대 찻잎을 가는 기구
일본 오사카에서 제작한 굳건한 금고, 이 안의 서류가 아직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고택을 오갔던 김구 선생
백두산 숲속에 앉아 있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마루에 앉아 차 한 잔 마시며 고개를 들어보니 집을 이루는 뼈대가 단단해 보인다. 궁궐에 들어가는 귀한 백두산 홍송을 썼는데, 그 연유는 강화도의 부호들이 단합해 한옥을 짓기 시작했단다. 그들이 단지 부자라서가 아닌, 한옥으로 우리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마음이다. 일본을 누를 수 있는 공간, 바로 한옥이었다. 철도가 없어 배를 타고 소금물에 절여 전해진 나무는 지금까지도 100년의 시간을 변함없이 지키고 있다.

대명헌은 전체적으로 한옥의 품을 지녔지만 세세하게 살펴보면 놀랍다. 조선 시대를 기준으로 그 이전과 이후의 시간을 풍성하게 담고 있다. 희망을 상징하는 덩굴처럼 뻗어나가는 고려 시대 당초무늬는 상감청자에도 쓰였는데, 도자기와 전통문양을 전공한 주인장은 이를 활용해 강화 소창에 문양을 새겨 넣은 제품을 만들어 표창장을 받기도 했다. 동백과 호두 기름을 바른 식기장엔 채도가 낮고 고상한 색의 그림들이 그려져 있고, 고려 시대  찻잎을 곱게 가는, 일종의 그라인더 등도 놓여 있다. 또 유일한 일본 기구인 금고가 100년의 세월 동안 변함없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아무도 열지 못하는 금고였어요. 불에 타지 않는 두꺼운 쇠로 마감되었고, 열쇠 구멍이 3개나 되고요. 열쇠 전문가가 몇 번 왔었는데 매번 실패했다가, 우연히 열린 적이 있어요. 그 안에 또 반만 한 또 다른 금고가 있더라고요. 서류 뭉치가 있었어요. 실수로 문이 다시 닫히는 바람에 종이 몇 장만을 꺼냈는데, 당시 배재학당을 넘기고 남은 돈으로 산 채권이었어요." 

크리스털 창에 새겨 넣은 강화의 자연
영국 전통 헤링본 마루

한옥이지만 집 곳곳 독특한 생김을 발견할 수 있다. 강화도에 성공회 성당을 지을 때 공수했던 크리스털 유리 창은 단아하다. 이 창엔 애칭 기법으로 강화의 산과 바다 등을 섬세하게 표현했다. 또 영국 전통 헤링본 문양이 바닥을 이루고 있는데, 빛의 각도에 따라 색은 짙어지기도 연해 지기도 한다. 

먼지 쌓인 고택을 발견해 가꾸고 지키고 있는 새 주인장, 최성숙 씨

최성숙 씨의 오랜 꿈은 헤리티지 문화 사업을 하는 것이다. 문화유산 지킴이가 되고자 했다. 보존 가치가 큰 자연과 문화를 지키는 단체인 한국내셔널트러스트 초창기 100인의 멤버로 활동해온 그녀는 오래된 것이 마음을 둔다. 

강화도에 분명 보존해야 할 한옥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4년을 찾고, 8년을 가꿔 지금의 대명헌을 이어가고 있는 것. 

"8년 전 처음 이 집을 마주했을 땐, 볼품없는 섀시와 비닐이 붙어 있었고, 지붕도 기왓장도 아닌 슬레이트로 되어 있었어요. 마당은 수풀이 가득 차 있었고요. 하지만 마음속에서 그 모습을 걷어내니 가슴이 벅차오를 정도로 고귀한 집이란 걸 알아봤죠.”


집 주인은 미국에 있었다. 한국전쟁 당시, 황 씨 후손들은 강화도에 남아있으면 위험하다는 것을 직감하고 미국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학비가 넉넉하지 않아 장학금을 타며 공부해 미국과 한국 등지에서 대학교수가 되었다. 

집을 인수하고 최성숙 씨는 시멘트로 겹겹이 덮여 있는 마당을 벗겨내고 잔디를 심었다. 먼지로 덮여진 마루를 닦아내자 영국 전통 헤링본 문양이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냈고, 창을 닦자 섬세한 무늬가 반짝였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우물도 끈질기게 찾아냈고, 직접 우물 안으로 들어가 암반수를 들춰냈다. 1932년 전기가 들어오기 시작한 강화에서 21번째 전신주가 세워졌던 집. 그래서 전화번호 마지막 자리 21번을 되살려 놓기도 했다. 

복원은 계속되고 있다. 그 당시 전통 기법을 되살려 정성을 쏟는 일이다. 기왓장 하나도 섣불리 올릴 수 없는 것이다. 몇 년을 이어온 작업이지만 이는 곧, 우리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그때의 정신을 찾는 것과 맞닿아 있는 소중한 일이다.

글·사진 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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