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에 앉아 차 한 잔 마시며 고개를 들어보니 집을 이루는 뼈대가 단단해 보인다. 궁궐에 들어가는 귀한 백두산 홍송을 썼는데, 그 연유는 강화도의 부호들이 단합해 한옥을 짓기 시작했단다. 그들이 단지 부자라서가 아닌, 한옥으로 우리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마음이다. 일본을 누를 수 있는 공간, 바로 한옥이었다. 철도가 없어 배를 타고 소금물에 절여 전해진 나무는 지금까지도 100년의 시간을 변함없이 지키고 있다.
대명헌은 전체적으로 한옥의 품을 지녔지만 세세하게 살펴보면 놀랍다. 조선 시대를 기준으로 그 이전과 이후의 시간을 풍성하게 담고 있다. 희망을 상징하는 덩굴처럼 뻗어나가는 고려 시대 당초무늬는 상감청자에도 쓰였는데, 도자기와 전통문양을 전공한 주인장은 이를 활용해 강화 소창에 문양을 새겨 넣은 제품을 만들어 표창장을 받기도 했다. 동백과 호두 기름을 바른 식기장엔 채도가 낮고 고상한 색의 그림들이 그려져 있고, 고려 시대 찻잎을 곱게 가는, 일종의 그라인더 등도 놓여 있다. 또 유일한 일본 기구인 금고가 100년의 세월 동안 변함없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아무도 열지 못하는 금고였어요. 불에 타지 않는 두꺼운 쇠로 마감되었고, 열쇠 구멍이 3개나 되고요. 열쇠 전문가가 몇 번 왔었는데 매번 실패했다가, 우연히 열린 적이 있어요. 그 안에 또 반만 한 또 다른 금고가 있더라고요. 서류 뭉치가 있었어요. 실수로 문이 다시 닫히는 바람에 종이 몇 장만을 꺼냈는데, 당시 배재학당을 넘기고 남은 돈으로 산 채권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