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같은 부부싸움, 골프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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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골프]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대개 노후생활은 퇴직과 함께 시작된다. 직장에서 60대 정년을 맞은 사람이 새 일거리를 구하기도 하지만 이미 절반은 노후생활에 접어든 것이나 다름없다.

직장에 다니며 골프를 익혔던 사람은 퇴직을 앞두고 노후 골프생활을 반드시 염두에 둔다. 골프를 한 축으로 삼고 노후를 설계한다.

골프는 퇴직자에게 무슨 의미이며 그 지향점은 무엇인가. 노후 골프를 위해 현역시절부터 차곡차곡 골프 비상금을 모으는 알뜰파도 있다.

"건강에 별 문제없고 경제적으로도 나쁘지 않아 골프로 인간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 요즘은 점심과 저녁 모임을 자제하고 골프로 대신해."

얼마 전 골프 동반자였던 퇴직한 고교 선배가 들려준 말이다. 자녀 둘은 독립했고 연금 포함해 매월 500만원 정도 수입이 있다고 했다.

60대 중반인 그는 골프 마니아는 아니다. 그냥 직장 시절 상사 권유로 40대 후반에 골프에 입문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가 퇴직 후에도 골프를 고수하는 이유는 사회 네트워크 유지와 건강을 챙길 수 있기 때문이다. 별다른 취미나 모임활동이 없는 그에겐 골프가 사람을 이어주는 촉매이자 윤활유다.

퇴직하고 친구와 직장 동료를 자주 만나다가 이마저 3년 정도 지나면서 서서히 빈도가 줄었다. 처음엔 맛집을 찾아 점심과 저녁을 때우고 산행도 했지만 점점 주기가 길어지고 멤버도 떨어져나갔다.

건강과 경제적 이유가 가장 컸다. 60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혈관질환자가 생기고 암투병 하는 친구도 생겨났다. 까탈스럽고 모난 사람은 자연 도태됐다.

예전과 달리 정치, 경제 등 민감한 이슈로 모임에서 얼굴을 붉히거나 어색한 분위기도 연출됐다. 멤버들이 빠지면서 모임의 연대사슬이 헐거워졌다.

선배가 일반 모임을 떠나 골프에 주안점을 두는 이유다. 친하면서도 골프를 공유하는 모임 위주로 돌아선 것이다.

공무원으로 정년 퇴직한 지인은 요즘 부부 골프모임을 자주 한다. 격무에 시달리던 현역시절 아내와 함께 할 시간이 없었던 그는 퇴직 후 아내의 골프 입문으로 부부관계의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아내가 입문 1년 만에 골프에 빠져 부부 골프 모임으로 대화도 부쩍 늘었고 몸과 마음이 훨씬 여유로워졌어요. 예전엔 무심코 흘려 듣던 골프 얘기를 요즘은 아내가 먼저 꺼내기도 하죠."

골프가 가정 분위기와 부부관계를 변화시킨 케이스다. 골프라는 취미를 공유하면 일단 가정생활이 달라진다. TV 리모컨 주도권 다툼을 벌이지 않아도 된다.

불 같은 성격으로 전쟁 같던 부부싸움도 골프가 종식시켰다. 골프 채널을 틀면 서로 말 없이도 두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골프를 끝내고 귀가해 둘이 와인을 마시면서 그 날을 복기하며 행복감에 젖는다. 부부금실도 좋아졌다고 한다.

필자는 간혹 친구 모임에서 예민한 주제로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간다 싶으면 골프로 주제를 돌린다. 정치나 경제 이슈를 피해 골프 일화를 꺼내 좋았던 기억을 공유한다.

얼마 전 모임 때 친구 두 명의 의견 충돌로 돌연 험악한 분위기가 발생해 폭발 직전이었다. 듣고 있던 필자가 "150m 남기고 아이언 잡느냐, 우드 잡느냐는 논쟁"이라며 골프 날짜를 잡고 사태를 가라앉혔다.

고교나 대학, 직장 선후배와 안부 인사용으로도 골프는 유용하다. 문자나 전화로 골프 제의를 받는 자체가 기분 좋다. 동반자로의 초청에 자신을 생각하는 마음과 정성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일건(一健), 이처(二妻), 삼재(三財), 사사(四事), 오우(五友)."

행복한 노후 생활을 결정짓는 요건으로 자주 인용되는 표현이다. 중요도 순으로 나열했는데 필자가 접한 가장 일목요연한 행복방정식이다.

건강에 문제 없이 건재한 배우자와 경제적 안정을 누리면서 취미생활을 즐기고 함께할 친구가 있는 노후생활은 모든 은퇴자의 로망이다. 이 고차 방정식을 충족해야 노후 골프가 가능하다.

늘 함께 하던 골프 동반자가 잠수를 타기 시작하면 필히 건강(배우자 포함)이나 경제적 문제에 봉착했을 가능성이 높다. 필드엔 나가고 싶은데 동반자를 구하기 힘들거나 초청 제의가 없다면 본인 골프 매너에 문제가 있다는 점도 명심하자.

"골프를 오래 하려면 나이가 들수록 늘 언행과 사소한 습관마저 성찰해야 한다고 봅니다. 느림보 골퍼를 좋아할 동반자도 이 세상엔 없죠."

특히 골프에서는 타자의 시선으로 자신을 관찰하는 자세가 요구된다는 김태영 한국대중골프장협회 부회장의 말이다. 평소 인격자 소리를 들어도 골프 매너가 안 좋을 수는 있지만 훌륭한 골프 매너 보유자는 평소에도 인격자일 확률이 높다.

요즘엔 환경 변화가 퇴직 골퍼를 힘들게 하는 요소도 있다. 골프장들이 지난해부터 코로나 특수에 기대 그린피를 계속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상반기까지 수도권 1인당 주중 대중골프장 이용료는 그린피, 캐디피, 카트피 포함해 15만원 선이었다. 한끼 식비와 교통비를 감안해도 17만원이면 가능했다.

하지만 지난해 하반기부터 큰 폭으로 올라 현재는 25만원 정도로 치솟아버렸다. 주중 일주일에 한 번씩 한 달 골프비용이 100만원이다.

주변 은퇴자를 보면 일주일에 한번 라운드를 선호하는 사람이 가장 많다. 격주로 골프를 하면 감각이 무뎌지고 기다리는 간격도 길다.

일주일에 두 번 라운드는 비용 부담과 함께 다른 생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한 달 골프 비용은 60만~80만원은 수용하는데 100만원 선에 달하면 감당하기 쉽지 않다. 국민연금 수령액의 절반을 넘는다.

사람들은 60대 초반부터 70대까지 10여 년간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가장 여유롭다고 한다. 퇴직 후 여행과 등산을 그렇게 즐기다가도 70대에 들어서면 신체활동이 변곡점을 맞고 의욕도 저하된다.

골프는 걸을 힘만 있으면 80세가 넘어서도 가능하다. 노후에 건강, 배우자, 재력, 친구가 있다면 골프 자격을 갖췄고 골프를 한다면 이 모든 것을 충족했다는 뜻이다.

[정현권 골프칼럼니스트·전 매일경제 스포츠레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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