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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산 1-37번지에 위치한 독도는 두 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남쪽에 위치한 동도는 유인 등대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해양수산 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높이는 98.6m, 둘레 2.8km, 면적 73,297m2이다. 서북쪽에 위치한 서도는 높이 168.5m, 둘레 2.6km, 면적 88,639m2이다. 서도의 주요 시설물로 주민 숙소가 있다.

독도
위치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산 1-37번지
면적 동도 : 73,297m2, 서도 : 88,639m2
길이 동도 둘레 2.8km, 서도 둘레 2.6km

독도 개요

독도는 두 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남쪽에 위치한 동도는 유인 등대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해양수산 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높이는 98.6m, 둘레 2.8km, 면적 73,297m2로 장축은 북북동 방향으로 450m에 걸쳐 경사가 60도로 뻗어 있고, 중앙부는 원형 상태로 해수면까지 꺼진 수직 홀이 특징이다.

서북쪽에 위치한 서도는 높이 168.5m, 둘레 2.6km, 면적 88,639m2, 장축은 남북 방향으로 약 450m, 동서 방향으로 약 300m 가량 뻗어 있다.

서도의 정상부는 험준한 원추형을 이루고 있고, 주요 시설물로 주민 숙소가 있다.

독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뜨는 곳이다. 대한민국 사람들이라면 독도가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일본과 어떤 분쟁을 벌이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섬이다.

물론 우리에게 소중한 영토이며 자산이다. 독도는 울릉도 동남쪽 89km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일본의 오키시마로부터는 160km의 거리에 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산 1-37번지로 되어 있다. 또한 우리나라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독도는 경제적인 측면과 지정학적인 면에서도 가치가 매우 높다. 독도 주변의 바다는 명태, 오징어, 상어, 연어 등 다양한 물고기들이 많이 잡힌다.

바닷속에도 다시마, 소라, 전복 등 해조류가 다양하게 서식하며 상당량의 지하자원이 묻혀 있는 곳이다.

독도 둘러보기

국내의 유일한 범선 코리아나를 타고 우산국(울릉도)을 복속시킨 이사부 장군의 발자취를 따라 울릉도와 독도를 답사했다.

코리아나호(선장 정채호, 136톤, 정원 72명)는 정박지가 여수인데, 일본 나가사키 범선 축제를 14번째 초청받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국위를 선양하는 국내 유일한 범선이다.

독도 주변의 범선들
범선 코리아나호에서 바라 본 독도 전경

지난 10월 18일부터 20일까지 삼척시 주관으로 이 배를 타고 울릉도와 독도를 답사했다. 20일 독도 방문을 마치고 저녁에 삼척으로 귀향하다가 뜻하지 않는 풍랑을 만났다.

다시 울릉도로 들어가 3일간 파도가 잔잔해지기를 기다리면서 울릉도 곳곳을 돌아봤는데 울릉도와 독도를 재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보다 앞서 2012년 필자는 섬탐험가 자격으로 경북도청의 초청을 받아 독도에서 1박을 하며 특강을 하는 행운을 누린 적이 있다.

2012년 10월 28일 울릉도 사동항에서 177톤급 독도평화호는 한국의 언론사 기자들과 패션모델들과 관계자 등 총 80여명을 태우고 오전 8시 독도를 향해 출발했다.

2시간 후에 독도 물양장에 상륙하여 이영희 한복 패션쇼를 감상했다.

이 워크숍 이전에 TV에서나 접했던 패션쇼를 독도에서 보는 맛은 색달랐다. 패션쇼 주제는 ‘바람의 옷 독도를 품다! 독도사랑 한복 패션쇼’였다.

디자이너 이영희 선생은 한국의 땅 독도를 배경으로 우리의 역사를 상징하는 삼국시대 왕과 왕비 등 조상들의 전통의상인 한복을 복원했다.

최초로 독도에서 시도된 이번 행사는 우리의 땅 독도와 한복의 우아함을 새롭게 세계에 알리는 기회였다.

2012년에 있었던 '바람의 옷 독도를 품다! 독도사랑 한복 패션쇼'

이영희 한복 디자이너는 “우긴다고 독도가 일본 땅이 되지는 않겠지만 우리 국민들과 함께 힘을 보태고 싶어 패션쇼를 기획했다.

독도 현지에서 우리 옷을 입고 평화로운 방식으로 우리 땅 독도를 세계에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가슴이 뿌듯하고 자긍심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독도의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바람에 휘날리는 모델들의 옷자락이 보는 이들을 압도시켰다. 독도와 한복을 연관짓는다면 둘 다 ‘우리 것’이라는 점이다.

저녁에는 독도 주민숙소에서 경북도와 동해안 5개시 군 해양수산과장 등 해양관계자 2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워크숍이 있었다.

독도와 전라도의 인연

울릉도와 독도는 전라남도 특히 거문도 지역 사람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여수지역사회연구소는 여수의 먼 바다에 있는 삼산면 어부들을 소재로 ‘남녘 어부들이 개척한 뱃길’의 역사를 연구하여 발표하였다.

또 최근에 호남대학교에서 발표한 논문에 의하면, 1880년대 울릉도 개척 당시 원주민 80%는 전라도 출신이었고 독도라는 섬 이름 역시 전라도 사람들이 부여한 지명인 것으로 드러났다.

고종 때인 1882년 이규원 울릉도 검찰사가 고종에게 올리는 보고서에 울릉도 전체 인구 141명 가운데 전라도 사람이 115명, 강원도 14명, 경상도 11명, 경기도 1명으로 기록했다.

전라도 출신의 개척민 가운데 각 지역별로는 흥양(현재 전남 고흥) 3도(죽도, 손죽도, 거문도) 출신이 61명으로 가장 많았고, 흥해(여수) 초도 33명, 낙안(순천) 21명이었다.

논문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여기에 나오는 초도 사람들은 먼 바다 한가운데 살았지만 험한 바다를 개척하는 개척자 정신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여수지방에는 노동요 술비소리가 전해온다. 이 소리는 여수의 거문도와 초도 어부들이 어구용 밧줄을 꼬는 작업을 하거나 배를 부릴 때 불러왔고 지금도 부르는 노래이다.

노랫말이 힘차고 가락 또한 여간 역동적이지 않다. 그래서 부르는 사람도 그렇지만 듣는 사람도 흥에 취한다.

그런데 이 노래 가사를 살펴보면 의미심장한 데가 있다. 멀리 울릉도와 독도의 뱃길을 개척하고 고기를 잡았던 숨은 역사가 담겨 있는 것이다.

에헤야 술비야/ 어기영차 뱃길이야
울고 간다 울릉도야/ 알고 간다 아랫녘아
(중략) 돛을 달고 노니다가/ 울릉도로 향해 가면
고향생각 간절하다 울릉도를 가서 보면/ 에헤야 술비야
좋은 나무 탐진 미역/ 구석구석 가득 찼네

이 노랫말처럼 여수시 삼산면 초도와 거문도 사람들이 울릉도와 독도로 배를 타고 나가 고기를 잡고 좋은 목재도 가져온 것이다.

동력선도 없던 때에 어떻게 그 먼 곳까지 진출하여 어장을 개척했는지 불가사의하기만 하다. 아마도 그때는 온전히 풍선배를 이용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풍향을 이용할 줄 알았다는 말인데, 얼마나 지혜로웠는지를 알 수 있다.

그것을 유추해 볼 수 있는 단서가 있다.

초도와 거문도 사람들은 옛날부터 진취적인 기질을 가졌는데, 그것은 지리적으로 손죽도와 거문도 사이가 워낙 풍랑이 드세어 이겨내려다 보니 독자적인 항해술도 익혔던 것이다.

울릉도 내왕 흔적은 초도마을에 아직도 남아 있다.

1880대에 지어진 김충석(전 여수시장)가(家)가 그 증거인데, 그 집의 마루벽이 여느 나무와는 달리 두터운 판목으로 짜여 있는 것이다.

목재가 없는 고장임을 생각할 때 어디서 가져왔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또 다른 증거로는 독도(獨島)라는 지명이다. 전라도에서는 노상 돌덩이를 보고 ‘독’이라고 하는데 독도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돌섬’이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 아닐지...

독도 기암괴석

아무튼 뱃길 개척의 역사는 흥미롭기만 하다.

그 먼 곳까지 가는 데는 풍향을 이용하였는데, 겨울철은 샛바람이나 높새바람이 불어 배를 밀어내므로 그때는 피하고, 하늬바람이나 마파람이 부는 봄철에 떠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항해코스는 지금도 많이 이용하는 손죽도와 소리도를 거쳐, 경상남도 욕지도와 부산의 절영도를 통해서 올라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독도 동굴 전경

울릉도와 독도는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도 어류를 포함한 해산물이 풍부했다. 특히 울릉도는 수목도 울창하여 질 좋은 목재가 많이 생산됐다.

그래서 고기를 잡는 한편으로 집을 지을 목재도 실어왔던 것이다.

전해오는 말로는 이때 향나무도 함께 베어왔는데 제수용품으로 귀한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문헌을 보면 조선은 섬을 비워두는 공도(空島)정책을 폈다. 태종과 세종임금 때로 왜구의 침탈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 어간에 초도와 거문도 어부들이 어장을 개척한 것으로 보인다.

참으로 장하고 우리의 자존심을 살려주는 장보고와 이순신의 후예들이 아닌가 생각한다.

지금까지 50년이 넘게 독도를 지켜 온 독도 지킴이며 이장이었던 김성도 씨가 2018년 10월 21일 지병으로 별세했다. 이제 독도에는 김씨의 부인인 제주 출신 김신열 씨만 남게 되었다.

태풍이 몰아치면서 거센 바람과 거대한 파도가 집을 집어삼켜서 한때 울릉도에 나가 살았지만 지난 2006년 정부지원금과 국민성금으로 지은 보금자리에 다시 돌아왔다.

독도지킴이 고 김성도씨와 필자

김씨는 독도가 우리나라 땅인 것을 국내외에 알리는 독도지킴이이면서 증거이며, 증인 역할을 하였다.

독도를 맨 처음 방문한 대통령도 김성도씨부터 찾았고, 역사의 중요한 순간들에도 그가 초청되어 나왔다.

지병인 간이 좋지 않아서 투병 중에도 김씨의 독도 사랑은 변함이 없었다.

투병 중에도 몸만 건강해지면 '하루 속히 독도 들어가련다' 하시던 그는 79년을 일기로 세상을 떠나 이제 영원한 독도 지킴이가 되었다.

독도의 영원한 독도 수호자요 ‘독도지킴이’ 김성도 씨가 세상을 떠나면서 그 다음 독도 이장은 누가 될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다.

마침 공석이 된 ‘독도 이장’에는 고인의 사위인 김경철(울릉군청)씨가 내년에 명예퇴직을 한 다음 부인과 함께 독도에 들어가 이장을 맡고 장모님을 모시고 살겠다는 소식이 전해져서 큰 화제가 되고 있다.

육지에서 문화 생활에 젖어 살았는데 100중에 10도 누릴 수 없는 환경 속으로 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지만 홀로 남겨진 장모님을 모시는 효심과 아울러 나라 사랑이 엿보인다.

고인인 김씨의 유언도 있었지만 고령인 김씨의 아내도 여전히 독도의 삶을 고집하시고 독도 주민으로 살고 싶어 하시는데 사위인 김경철 씨가 같이 산다면 더 없이 옳은 일일 것이다.

경상북도와 울릉군은 고 김성도 씨 세상을 떠나면서 비어있는 그 분의 집을 리모델링하고 있다. 이제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 곁에 다가올 것으로 기대된다.

독도의 최초 주민은 고 최종덕옹(87년 작고)이 작은 집을 짓고 해녀들과 함께 물일을 하며 사셨던 곳인데 지금은 현대화된 건물로 새로 지어져 있다.

필자는 2012년 10월 28일 저녁에 이 건물에서 경북도청 시 · 군 수산 관련 공무원들에게 특강을 마친 후, 다음날 새벽 서도의 대한봉에 올랐다.

숙소 입구 계단에 ‘大韓領’이라는 글자가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한국인이면서도 쉽게 올 수 없는 독도의 대한봉을 오른다는 감격에 눈물을 글썽거리며 70도의 가파른 정상을 향해 천천히 올라갔다.

독도 정상에서

예전에 독도 최초의 주민 고 최종덕옹이 직접 식수를 구하러 반대편에 있는 물골로 넘어가는 998계단을 만들었는데 지금은 길 위에 새로이 나무 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지금의 계단이 없던 시절에 가파른 절벽을 올라가서 밧줄을 타고 먹을 물을 길어오기도 하고, 파도가 잔잔한 날은 식수를 배로 실어왔다고 한다.

최종덕옹의 손길이 살아 숨 쉬는 998계단은 70도에 이르는 경사다. 매우 가팔라 밑을 내려다보면 현기증이 날 정도다.

서도의 정상은 칼처럼 가파르기 때문에 더 이상 오를 수는 없었다.

물이 있다는 물골로 계단을 타고 내려가 바닷가에 있는 샘을 둘러보고 물도 마시면서 곳곳에 있는 그 분의 삶의 흔적을 찾아보았다.

독도의 샘 물골 가는 길

필자는 섬탐험 전문가로서 우리나라 유인도 446개 섬을 세 번이나 돌아보았다. 하지만 독도에서 집을 짓고 해초 채취를 하면서 사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독도는 동해 한가운데 떠 있어 바람과 파도가 몰아닥치기 때문에 배석도 없고, 물도 많지 아니하여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다.

그런 곳에서 살다간 고 최종덕옹의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존경스러웠다.

‘한국판 로빈스크루소’인 그는 개척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정신으로 이 험한 독도에서 사람냄새가 나도록 한 것이다.

아름답고 소중한 우리 땅에서 옹골찬 개척정신이 피어나고 있어 흐뭇하다.

독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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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자
    이재언 섬 탐험 전문가

    섬에서 나고 자란 저자는 우리나라의 섬 탐험 전문가이다. 바나바선교회 섬 선교사로 파송되어 선교활동을 하던 중 섬의 중요성을 깨닫고 전국의 446개 섬을 3번이나 순회하였다. 저자는 많은 섬을 찾아다니며 섬의 기본 현황과 역사, 문화, 민속, 주업, 삶의 애환 등 수많은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사진을 촬영하여 기록을 남겼다(드론 사진 포함). 2009년부터 2019년까지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에 재직하였고, 2020년 1월부터 목포과학대학교 해양레저사업단 섬해양 선임연구원으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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