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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프롤로그

프롤로그2020.06.15.

프롤로그 1. 미친개가 짖을 땐 물어버려야 했어. *2020년 3월 한 여학생이 화장실에 들어가 문을 잠그려 할 때 싸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학생은 경계하며 조용히 변기 위에 올라섰다. 조심스레 화장실 문밖을 살펴보았다. 누군가 문 앞에 서 있었다. '하나.. 둘, 셋!' 속으로 숫자를 센 후 날아오른 학생은 그대로 문을 걷어찼다. "아악ㄱㄱㄱㄱㄱㄱ!!!" 문밖에서 물동이를 들고 있던 여학생 두 명이 나자빠져 허우적댔다. "으휴, 한심한 것들." 문을 걷어찬 학생은 그들을 한심한 듯 쳐다보고 바닥에 나뒹구는 물동이를 들고 나갔다. 뚜벅뚜벅. 거침없이 걸어가던 그녀는 화장실 옆 카페에 도도하게 앉아 있던 율리아의 머리 위로 가차 없이 물을 쏟아부었다. "악!!! 너 뭐 하는 거야?" "미친개가 짖을 땐 확 그냥 물어 버렸어야 했는데. 몇 번 봐주니까 네가 사람인 줄 알았지?" "뭐?? 이런 미친년이!!!!" 분노한 율리아가 그녀의 뺨을 때리려 손을 올리자 그녀는 재빨리 그 팔을 쳐내고 상대의 머리채를 잡아 쥐었다. "더 까불면 그 상판때기 확 재개발 해버린다." 그녀가 잡고 있던 머리채를 내동댕이치자 율리아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율리아는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 그녀를 노려보았다. "..너 미쳤어?" "닥쳐. 싹 다 갈아 엎어버리기 전에. 확 그냥!" 그녀가 손을 들어 올리자 율리아가 쫄아 제 몸을 감싸 안았다. "아오, 한주먹거리도 안되는 게." 그녀는 빈 물동이를 가볍게 어깨 위에 걸쳐 매고 자리를 떠났다. 프롤로그 2. 결국 선배는 오지 않았다. *2020년 2월, 미라클 예술학교 공연학부 졸업식 극장에서는 학교를 빛낸 졸업생들의 시상이 이어지고 있었다. 올해 수석은 연극과의 차선우. 객석에는 같은 과 동기들과 선후배들, 선우의 팬을 자처하는 타과생들까지 그의 졸업을 축하하러 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드디어 선우의 이름이 호명되자 환호성이 터졌다. 하지만 이내 객석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가 졸업식에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뭐야... 선배 무슨 일 있나? 은아야, 연락 한번 해 봐." 작고 갸름한 얼굴에 동그란 눈. 무용수같이 길고 가느다란 팔다리. 눈에 확 띄는 비주얼은 아니지만 말을 걸면 친절하게 답해줄 것 같은 선한 이미지의 그녀, 은아에게 한 학생이 선우의 행방을 물었다. 은아는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너 어디가? 이따 졸업파티도 있는데." "주인공 없는 파티가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뭐?" "선우 선배, 오늘 안 와요." "뭔 소리야? 야!! 도은아!! 어디 가냐니까!! 은아는 빠른 걸음으로 졸업식장을 빠져나왔다. 야외에서는 학사모를 쓴 졸업생들이 각양각색의 포즈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밝고 활기찬 분위기와는 반대로 은아는 울고만 싶었다. 1년 전, 같은 건물, 같은 무대 위에 선우가 서 있었다. 그 이후 은아가 1년 동안 가장 믿고 의지했던 사람이 학교를 떠났다. 아니, 연극을 버리고 동료를 버리고 영영 떠나버렸다. *2019년 3월(1년 전), 연극과 신입생 환영회 "기적이 시작되는 곳, 미라클 예술학교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또렷한 이목구비와 훤칠한 키, 무표정일 땐 얼음처럼 차갑지만 웃으면 세상 따뜻한 미소를 지닌 연극과 회장 선우가 무대에 서서 환영 인사를 하고 있었다. 중저음의 목소리는 그의 지적인 매력을 더해 주었고 그의 표정, 행동 하나하나에서 짙은- 에스프레소의 향기가 느껴졌다. 은아는 그 고혹적이고도 치명적인 카리스마에 빠져들고 있었다. "여기까지 오느라 힘들었을 텐데, 앞으로는 더 고생할 일이 많아서 어쩌죠? 하지만 그만큼 많은 걸 배우고 얻게 될 거라 믿습니다. 다시 한번 입학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은아는 벅찬 마음으로 선우의 환영 인사를 들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재수까지 힘든 시간을 지나 합격한 곳이었기 때문에 그 감회가 남달랐다. 미라클 예술학교. 음악, 미술, 공연학부로 나눠져 있는 이곳은 스타즈 예술학교 다음으로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예술학교이다. 높은 경쟁률을 자랑하는 곳이지만 오히려 그 자부심 때문에 각 과들은 철저히 분리돼있고 폐쇄적이다. 예를 들어 공연학부에 속해 있는 연극과와 영화과는 겉으로는 하나인 것처럼 보이지만 교수들의 골 깊은 갈등으로 사실상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이러한 보수성으로 인해 미라클은 2등 학교에 머물러 있다. 비록 2등 대학이기는 하지만 은아에게 있어 미라클 합격 결과는 과분한 것이었다. 예중, 예고 출신의 화려한 경쟁자들과 재수, 삼수생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지금 눈앞에 있는 선우처럼 멋진 선배와 함께하는 대학 생활이라니. 앞길이 지뢰밭이라도 꽃잎처럼 사뿐히 즈려밟고 다닐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안녕? 연극과는 처음이지?" 은아가 선우의 목소리에 한창 젖어 들고 있을 때, 한 학생이 은아에게 말을 걸었다. 뽀글머리에 뿔테안경을 쓴 그는 얼굴에 장난기를 가득 담고 있었는데 어찌 보면 인싸같고 또 어찌 보면 아싸같은 독특한 느낌을 주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는 개그맨 시험에서 고추장 먹은 쥐를 연기해 최종까지 간 경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어... 안녕." "연기전공? 이름이 뭐야?" "응, 난 도은아. 넌... 연출전공?" "연기전공 18학번 김호천이라고 해. 호기심 천국, 호천. 외우기 쉽지?" "앗, 선배님 죄송해요. 신입생인 줄 알았어요." "괜찮아, 내가 원래 베이뷔 풰-이스니까." '아니요, 그건 아니지만.'이라는 말을 꾹 삼키고 은아는 계속해서 선우의 학과 안내에 귀를 기울였다. 은아가 기다리던, 은아의 상상 속 선배의 전형. 저 선배도 소속된 기획사가 있을까? 아니 없더라도 곧 스타가 될 관상이다. 그 전에 친해지고 많이 배워야지. 은아는 내심 선우의 연기는 어떨지 기대가 됐다. "선배 멋있지? 14학번 연출전공이야. 우리랑은 전공이 달라서 수업에서 볼 일은 없지만. 뭐 선배 작품 같이 하면 볼 수야 있겠다. 근데 1, 2학년은 배역 따기 거의 어렵다고 보면 돼." "아..." 기대가 아쉬움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근데 연출이 저렇게 잘생기면 반칙 아닌가? 우리 연기 전공생들은 어쩌라고...' 은아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극장 문이 열렸고,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집중되었다. 아역배우 출신 신입생이 또각또각 구두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풀메이크업에 풀셋팅을 한 화려한 그녀가 등장하자 모두가 숨죽여 바라봤다. 그녀는 그런 시선이 익숙한 듯 한편으로는 즐기는 듯 여유롭게 걸어 들어왔다. "저, 어디 앉으면 되나요?" 그 질문에 대답을 한 건 선우였다. "늦었으면 죄송합니다가 기본 아닌가? 우리 과는 시간 약속이 가장 중요합니다. 앞으로 서로에게 민폐 끼치지 않는 상식적인 대학 생활 부탁드립니다." 그녀가 무안한 듯 빠르게 자리에 앉았다. 은아는 선우의 단호함에 조금 놀라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리고 선우에게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돌려 객석을 둘러보았다. 독특한 스타일로 눈에 띄는 학생이 몇몇 있었고 묘한 아우라를 풍기는 사람들이 보이기도 했다. 아이돌과 유명하진 않지만 언젠가 드라마에서 본 것 같은 배우도 있었다. 그제서야 은아는 자신이 미라클에 온 것을 실감했다. '적어도 저들만큼, 아니 노력하면 더 나은 미래가 있겠지.' *2019년 12월 겨울, 2학기 종강파티 "학교에서 선배님을 만난 게, 이번 학기 선배님 작품을 같이 하게 된 게, 제 인생에서 가장 큰행운이었어요." 종강파티 날, 은아는 선우와 함께 회식 장소로 가고 있었다. "와, 엄청난 칭찬이네. 나도 내 마지막 작품을 너랑 할 수 있어서 좋았어." "이제 외부에서 작품 하시는 거죠? 저도 얼른 졸업해서 다시 선배님이랑 작업하고 싶어요." 선우는 잠깐 은아를 바라보더니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은아야 나, 연극을 좀 쉴 것 같아 당분간은." "...네? 그게 무슨... 왜요?" "그냥.. 시간이 좀 필요한 것 같아.." 은아는 너무 놀라 그 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날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몰라. 그럴 필요도 없고. 무튼 즐거웠어. 앞으로 잘 지내고." 선우는 손을 흔들며 은아에게 인사했다. 그리고 은아는 그날 이후 선우를 학교에서 볼 수 없었다. 선우는 학기 중이건 방학이건 늘 학교에 나와 밤낮없이 공연 준비만 하는 사람이었다. 미라클의 씬샵(무대소품 등을 제작하는 곳)을 불이 꺼지지 않는 곳으로, 미라클 극장을 1년 내내 공연하는 곳으로 만든 사람이기도 했다. 그래서 미라클의 교수진과 학생들은 선우가 잠시 쉬고 금방 돌아올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선우는 오지 않았다. <프롤로그 등장인물 정리> 도 은아(여, 21세) 원래는 무용수를 꿈꿨지만 부상을 당해 꿈을 접어야 했다. 암흑과 같던 절망의 시기를 거쳐 고등학교 연극부 선생님의 추천으로 뒤늦게 연기를 시작했다. 버티고 참는 게 취미요, 성실과 책임이 특기다. 좋아하는 것을 잘하는 것으로 만들고 싶어 늘 고민하고 노력한다. 음악만 나오면 다른 사람으로 돌변하는 반전 매력의 소유자. 쉬워 보이나 쉽지 않고 약해 보이나 약하지 않다. 삼 세 번 참고 나면 꼭지가 도는 인물. 차 선우(남, 25세)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미라클 연극과의 회장. 유명 연극 연출가의 조카로 연극판에서 나고 자랐다. 타고난 실력과 꾸준한 노력으로 올리는 작품마다 좋은 평가를 받아왔다. 모두에게 경계가 없는 듯 하나 어느 거리 이상으로는 결코 가까워지지 않는 뜨겁지만 차가운 드라이아이스 같은 인물. 김 호천(남, 21세) 호기심 많고 에너지 넘치는 재기발랄 연기전공 18학번. 존재하는 모든 것에 관심이 많고 정보도 많다. 특유의 낙천적인 성격은 분위기를 살리기도 하지만 가끔은 눈치 없이 상대방을 아프게 한다. 콩가루 집안에서 자라 그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어 연기를 시작했다. 관객에게 좋은 에너지를 주고 힘이 되고 싶다는 나름 속 깊은 신념을 가졌다. 웬만하면 세상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연기할 때만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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