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우 기자의 절벽가(絶壁歌)] `국유화` 옵션이 없는 한국적 구조조정

입력
기사원문
본문 요약봇
성별
말하기 속도

이동 통신망을 이용하여 음성을 재생하면 별도의 데이터 통화료가 부과될 수 있습니다.


지난 늦여름 한진해운 법정관리와 그에 따른 물류대란 과정을 지켜보면서 여러 생각을 하게 됐다. 그중 하나가 '우리도 국유화(國有化)라는 선택권을 마련해둘 필요가 있겠다'라는 것이다.

국유화라는 단어가 주는 이미지는 아주 칙칙한 게 사실이다. 당장 필자만 해도 국유화라고 하면 아랍 민족주의를 기치로 내걸고 쿠데타를 일으킨 나세르와, 그가 강행했던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가 떠오른다. 국가권력이 발동돼 기존 주인으로부터 뭔가를 빼앗는다는 뉘앙스가 강하다.

사유재산 보호를 근본원칙으로 삼는 자본주의 국가에서 국유화가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실세계에선 국유화가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니다. 억지로 빼앗는 국유화도 있지만 마지못해 떠안는 국유화도 있기 때문이다. 국유화를 통해 국민에게 돌아갈 부담을 최소화하고, 심지어 국민에게 이익을 돌려줄 수 있다면 나름대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맞아 자본주의의 본산인 미국에서도 몇몇 거대기업들이 국유화됐다. 당시 미국내 최대금융그룹인 씨티그룹과 최대 자동차제조사였던 GM을 미국 정부가 떠안았다. 부실 규모가 워낙 컸기 때문이다.

흔히 정부 재정은 튼실하게 관리해야한다고 말한다. 씀씀이를 아껴서 국가부채를 줄이자는 얘기도 많이 한다. 왜 그래야 할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경제가 위기에 처해 기간산업이 흔들리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국유화를 통해 위기를 넘기는 것이 중요하게 된다. 1997년 IMF 외환위기를 맞은 한국도 그렇게 시중은행을 사들여 대처했다. 그래서 평소 정부 재정을 튼튼히 해야하는 것이다.

미국 정부가 국유화했던 씨티그룹과 GM의 경우에는 '해피엔딩'이었다. 미국 정부는 2008년 공적자금 450억 달러를 투입해 씨티그룹을 인수했지만 2년 후 보유지분 모두를 깔끔하게 매각했다. 미국 정부는 정부 소유 기간이 길어질 경우 경영상 비효율이 커질 수 있다는 걱정을 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미국 정부는 주식매각 차익과 배당금을 합쳐 120억 달러를 추가로 챙겼다. (한국의 우리은행과 너무 비교되지 않는가.)

GM의 민영화 과정에서는 미국 정보가 금전적인 손해를 봤다. 미국 정부는 495억달러의 공적자금을 GM에 투입했는데, 구조조정 과정을 거쳐 2010년부터 흑자를 내기 시작하자 후딱 팔아버렸다. GM 지분을 보유함으로써 미국 정부가 거둬 들인 금액은 총 390억달러로, 약 105억달러 가량의 손실을 봤다. 일부 비판 여론이 일었지만 미국 정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국유화를 통해 수십만명의 일자리를 지킬 수 있었고, 미국 제조업의 자존심인 자동차 산업도 보존했으니 그만하면 됐다는 설명이었다. 오늘 날 미국 여론은 이런 관점을 지지하고 있다. GM 국유화로 발생한 손실에 아무도 토를 달지 않는다.

물론 민간부문에서 한계에 봉착한 기간산업체를 인수해줄 수 있다면 그게 더 좋은 일이다. 글로벌 금융위기때 씨티그룹과 GM을 떠안아 줄 민간기업이 존재했다면 그 또한 좋은 해법이 됐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이 이상과 원칙을 뒷받침해주지 못할 때도 있는 법이다. 한국에선 지난 늦여름 한진해운이 바로 그랬다. 글로벌 해운업황이 워낙 안좋다보니 이 회사를 떠안겠다는 업체를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비(非)해운업체가 대형 해운업체를 덥썩 인수하는 것은 업종 전문성이 점점 더 중요시되는 요즘 트랜드와도 맞지 않는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필요한 것이 정부와 국가재정이다.

기업에 돈을 빌려준 채권금융기관과 똑같은 사고방식을 가진 정부는 존재의의가 없다. 빌려준 대출금 회수에 최우선적인 관심을 가지는 것은 채권금융기관이면 충분하다. 제대로 된 정부라면 국가경제 전체를 아우르는 시각으로, 국민경제 전반에 미칠 이해득실을 따져 판단하고 행동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게 국민세금으로 운영되는 정부의 역할이다.

이런 관점에서 국가 기간산업체를 인수할 여력이 민간부문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정부는 국유화 옵션을 진지하게 고려할 수 있어야 한다. 국유화 옵션을 살려두는 것은 한계업체의 M&A 과정에도 필연적으로 영향을 주게 된다. 정부라는 잠재적인 인수자가 존재하는 만큼 헐값 매각의 가능성이 확 줄어들게 된다. 한진해운발(發) 물류대란처럼 수십년 걸려 만들어놓은 글로벌 네트워크를 한꺼번에 날려먹을 일도 없어진다.

사정이 이렇지만 한국에서 국유화는 금기시되고 있다. 언젠가 한번은 금융당국의 최고위 관계자에게 "대우조선이나 현대상선의 최대주주는 국책은행으로 사실상 국유화된거 아니냐"며 "기왕에 이렇게 됐으니 구조조정 단계마다 진통을 되풀이할게 아니라 화끈하게 국유화 선언하고 떠안는게 어떻겠느냐"고 말한 적이 있다. 그 관계자는 한숨부터 내쉬었다. 그러더니 "우리 국민정서에 국유화가 쉽게 받아들여지겠느냐"고 반문했다. 경제적 관점에서 국유화를 바라보지 않고 정경유착(政經癒着) 차원으로 오해받기 십상이라는 설명이었다. 일개 관료가 그런 정치적 리스크를 감당할 수 없다는 얘기로 들렸다.
 
어느 정도 납득이 가는 설명이다. 하지만 국민 탓을 할수는 없다. 제대로 된 국유화 모델을 제시하지 못한 정부의 자업자득(自業自得)이기 때문이다. 국유화 옵션이 없는 한국적 구조조정의 현실이다. 

이진우 매일경제신문 기자 jeanoo@mk.co.kr

1995년 매일경제신문에 입사 후 초년병 시절에는 전직 대통령 비자금 사건 등을 취재했고,
1998년 이후 한국은행, 금감위, 은행권을 출입하면서 IMF 외환위기의 여파를 목도했다.
2001년부터는 재경부 등 경제부처를 출입하면서 경제 정책 전반에 대해 기사를 썼다.
부동산 급등기인 2005~2007년 건설, 부동산 분야를 담당했다. 2012년부터 워싱턴 특파원으로 일했다.
저서 <대한민국 1%부자들의 재테크(공저)>,<경제학애프터스쿨(공저)> 다른기사 보기

이 기사는 언론사에서 경제 섹션으로 분류했습니다.
기사 섹션 분류 안내

기사의 섹션 정보는 해당 언론사의 분류를 따르고 있습니다. 언론사는 개별 기사를 2개 이상 섹션으로 중복 분류할 수 있습니다.

닫기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