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과학혁명의 완성자

아이작 뉴턴

Sir Isaac Newton

과학인물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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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혁명의 완성자, 아이작 뉴턴.
  • 이름 Sir Isaac Newton

  • 생몰
    1642.12.25.~1727.3.20.(율리우스력),
    1643. 1. 4.~1727.3.31.(그레고리력)

  • 출생
    영국 울즈소프
  • 국적 영국

뉴턴은 코페르니쿠스로부터 촉발된 17세기 과학혁명(Scientific Revolution)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사건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1687년에 출판된 『프린키피아』(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를 통해 근대역학과 근대천문학을 확립했다.

그는 지구와 사과 사이에, 지구와 달 사이에, 태양과 목성 사이에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인력이 작용한다는 점을 밝히고, 이것과 자신의 3가지 운동법칙, 즉 관성의 법칙, 힘과 가속도의 법칙, 작용-반작용의 법칙을 결합해서 행성의 타원 운동은 물론 지상계와 천상계의 여러 운동들을 수학적으로 설명했다.

뉴턴은 1660년대부터 빛과 색깔에 대한 독창적이고 근대적인 이론을 주창했고, 이를 1704년에 『광학』에 집대성했다. 코페르니쿠스로부터 15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과학의 여러 분야에서 일어났던 다양한 변화들은 뉴턴이라는 하나의 수렴점을 거쳐 근대과학이라는 통일된 체계로 태어났던 것이다.

1 뉴턴의 어린 시절

뉴턴은 갈릴레오가 사망하던 1642년 12월 25일(당시 사용되던 율리우스력에 따름, 그레고리력 1643년 1월 4일)에 링컨셔 지역의 울즈소프(Woolsthorpe)라는 시골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농부였던 뉴턴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 3개월 전에 사망했으며, 조산아였던 뉴턴은 몸집이 매우 작았다.

3년 뒤에 어머니가 성직자와 재혼하면서 뉴턴은 농장의 할머니에게 맡겨졌다. 뉴턴은 다른 아이들과 떨어져 혼자 지내면서 내면세계에 깊이 침잠해 들어갔고, 자연스럽게 호기심을 키워나가는 시간들을 많이 가질 수 있었다. 그는 자기 자신과 대화하기를 좋아했는데, 이는 평생에 걸친 뉴턴의 성격이 되어 버렸다.

그는 12살부터 울즈소프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인 그랜섬에 있는 킹즈 스쿨(King's School)을 다녔는데, 그랜섬에는 개천이 많아서 사람들은 곡식을 찧기 위해 물레방아를 사용했으므로 풍차는 보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당시 근처에 풍차가 하나 세워지자 사람들은 신기해하면서 이 볼거리를 화제로 삼곤 했다.

당연히 호기심이 많았던 뉴턴도 진기한 풍차에 흥미를 느끼고 그 작동 원리를 연구했다. 어린 나이였음에도 뉴턴은 움직이는 풍차 모형을 정확히 만들었고, 뉴턴이 만든 모형 풍차는 바람을 받아 잘 작동했다. 풍차의 원리를 이해하고 그것을 작동이 가능할 만큼 재현해 내는 능력을 보고 뉴턴의 선생님은 크게 감동을 받았다.

재혼한 남편과 사별한 뉴턴의 모친은 뉴턴을 농부로 만들려 했는데, 이때 뉴턴의 선생님이 어머니를 설득해서 뉴턴이 대학교에 갈 수 있도록 도왔다. 19살이 되던 1661년에 뉴턴은 케임브리지 대학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했다.

당시 대학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 그중에서도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전수하는 일에 몰두해서 당시 새로 등장하고 있던 갈릴레오나 케플러, 데카르트의 견해를 소개하는 데는 인색했다.

게다가 실험이나 수학을 중요시하는 오늘날과 달리, 당시에는 논리에 따라 주장을 펴 나가는 논쟁, 토론 등을 중요하게 여겼다. 따라서 기계 만드는 것을 좋아하고 최신의 학문을 배우고자 했던 뉴턴에게 정작 대학은 많은 실망만을 안겨 주었다.

그렇지만 뉴턴은 1663년 당시 최초의 루카스 수학 석좌교수로 막 부임한 배로(Isaac Barrow)의 기하학과 광학 강의를 들었으며, 독학으로 갈릴레오의 역학, 케플러의 광학과 천문학, 보일의 색깔론, 데카르트의 기계적 철학, 광학과 기하학에 대한 저술을 공부했다. 뉴턴은 자연현상을 물질과 운동으로 설명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를 비판했던 데카르트의 기계적 철학에 매료되었다.

뉴턴은 1664년에 장학금을 받아서 4년간 대학교에 더 머물 수 있게 되었으며, 1665년 8월에 학사학위를 받고 졸업을 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런던에서 흑사병이 돌았고, 케임브리지 대학은 예방의 차원에서 학교를 휴교했다. 뉴턴은 이 때 고향인 울즈소프에 내려가서 1667년 4월에 대학이 다시 개교할 때까지 혼자서 광학, 역학, 수학을 공부했다.

이 시기 동안에 뉴턴은 빛과 색깔에 대한 기존의 이론과는 다른 이론을 고안해 냈고, 물체의 운동(특히 원운동)에 대해 깊게 생각했으며, 미적분의 기초를 만들었다. 이런 이유에서 이 1665~1666년은 ‘기적의 해’라 불린다.

그렇지만 과학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뉴턴이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 개념을 창안했다는 일화는 과장되었거나 사실이 아니었을 개연성이 농후하다. 오히려 이 시기 그의 연구 목록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던 주제 중의 하나는 ‘빛’이었다. 특히 그는 프리즘을 가지고 빛에 관한 중요한 성질을 밝혀냈다.

2 빛과 색깔에 대한 새로운 이론에 도달하다

뉴턴과 빛의 관계는 뉴턴이 1663년 스터브리지 박람회(Sturbridge Fair)에 갔다가 점성술 책을 집으면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뉴턴은 점성술의 원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케플러와 데카르트의 기하학 및 광학을 독학하기 시작했다.

이후 뉴턴은 빛의 반사나 굴절이 일어난 후 상의 위치를 결정하는 기하 광학을 공부하는 한편, 빛이 어떻게 움직이고 어떻게 눈에 보이게 되는지, 반사와 굴절 같은 빛의 현상들은 어떻게 나타나는지와 같은 빛의 물리적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뉴턴의 광학 노트.

뉴턴은 스스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색깔 이론과 보일, 후크, 그리고 데카르트의 빛과 색깔에 관한 논의도 공부해 나갔다. 무엇보다도 뉴턴은 데카르트의 빛과 색깔 이론에 큰 관심을 보였는데, 데카르트의 『철학의 원리』(Principia philosophiae, 1644)와 함께 그의 광학적 견해가 담긴 『굴절광학』(La dioptrique, 1637), 『기상학』(Les météores, 1637), 그리고 『기하학』(La géométrie, 1637)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다.

뉴턴에게 의문을 심어 준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와 데카르트였다면, 그 의문을 해결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보일이었다. 보일의 영향을 받은 뉴턴은 실제로 프리즘이나 렌즈를 가지고 직접 실험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의문을 해결하고자 했으며, 신중하게 실험을 계획한 후 이를 용의주도하게 수행하고, 같은 실험을 수차례에 걸쳐 반복한 후 그 결과를 기록하곤 했다. 보일은 실험과학의 선구자였고 뉴턴의 모델이 될 수 있었다.

뉴턴이 처음으로 망원경에 관심을 가질 무렵인 1664년에, 그는 프리즘을 구입해서 빛의 굴절을 관찰하기 시작했고 이는 40년 후인 1704년에 뉴턴의 『광학』(Opticks)이 탄생할 수 있었던 초석이 되었다.

특히 뉴턴은 1665~1666년의 기간 동안에 집에 머물면서 암실을 만들어서 방을 어둡게 한 뒤에 창에 만든 둥근 구멍을 통해 한 줄기의 태양 광선이 들어오게 한 후 그것을 프리즘으로 굴절시켜서 길쭉한 무지개(스펙트럼)가 만들어지는 것을 관찰했다.

뉴턴의 호기심은 동그란 모양의 광선이 프리즘을 통과한 뒤에 길쭉하게 변하고, 다른 색깔로 염색한 실이 프리즘을 통해서 보면 분리된 것처럼 보인다는 현상에 의해서 자극을 받았다. 그는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를 깊이 생각했고, 결국 빛과 색깔에 대한 기존의 이론들이 이런 현상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1)

뉴턴은 이런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이론을 찾으려고 했으며, 오래지 않아서 “백색광에는 원래 굴절률이 다른 여러 색깔의 광선이 존재하며 이것들이 프리즘을 통과한 후 서로 다른 각도로 굴절되기 때문에 길쭉한 스펙트럼을 만든다”라고 결론 내렸다.

뉴턴은 자신의 결론을 확인하기 위해서 그가 “결정적 실험(experimentum crucis)”이라고 부른 또 다른 프리즘 실험을 구상했다. 그는 여러 가지 색깔을 띤 빛은 이미 백색광 안에 존재하고 있으며, 한 가지 색, 가령 파란색 광선이 일단 분리되면 여기에 어떤 조작을 가하더라도 계속 파란색을 띤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는 색깔의 폭을 넓히거나 줄여서 연하게 만들거나 진하게 만들 수는 있지만 색깔만은 바꿀 수 없다고 말했다. 색깔은 아리스토텔레스나 데카르트가 주장했듯이 백색광이 변형되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원래 백색광 속에 “숨어있던” 색깔을 띤 광선이 굴절률을 달리 하면서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는 두 개의 프리즘을 사용해서 서로 다른 굴절률을 가진 색깔들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였다.

뉴턴은 자신의 이론에 근거해서 반사 망원경을 직접 제작했고, 이로 인해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과학계에 널리 알릴 수 있었다. 그의 이론에 의하면 렌즈를 사용하는 광학기기들은 백색광을 분리해서 단색광으로 분해하기 때문에 ‘색수차(chromatic aberration)’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뉴턴은 렌즈 대신에 거울을 사용한 반사 망원경을 제작했고, 이 소식은 런던의 왕립학회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에 뉴턴은 1671년에 더 성능이 좋은 반사 망원경을 제작해 왕립학회로 보냈다. (이것은 오늘날 왕립학회의 가장 귀중한 소장품으로 남아 있다.)

왕립학회는 뉴턴에게 반사 망원경을 지면으로 설명해줄 것을 요청했고, 이에 뉴턴은 망원경보다도 훨씬 더 흥미로운 자신의 광학적 이론과 발견을 담은 논문을 써서 보냈다. 이 논문은 1672년 초에 왕립학회의 『철학 회보』(Philosophical Transactions)에 발표되었다.

이렇게 해서 1664년에 빛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던 뉴턴은 거의 8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난 뒤에 「빛과 색에 관한 새로운 이론」(New Theory of Light and Colours)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영국은 물론 대륙의 과학자들도 뉴턴의 논문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당시 최고의 물리학자로 꼽히던 호이겐스는 뉴턴이 빛의 입자 이론을 주장한다고 생각했고 이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 뉴턴을 비판했다.

뉴턴은 자신이 제안한 이론이 추론된 것이 아니라 직접 실제로 실험을 해 본 결과로부터 만들어진 것이라고 논박했다. 1675년 뉴턴은 빛에 대한 두 번째 논문을 왕립학회에 보냈는데, 이 논문을 놓고 다시 왕립학회의 큐레이터(curator)였던 로버트 후크와 부딪쳤다.

이러한 논쟁들에 힘들어했던 뉴턴은 광학과 관련된 논문이나 저술을 출판하지 않고 있다가, 3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인 1704년이 되어서야 자신의 책 『광학』(Opticks)을 출판했다. 20대에 시작한 광학 연구가 60대가 되어서야 그 결실을 맺은 것이다.

1662년 케플러의 광학을 읽으면서 광학에 대한 관심의 싹을 키우기 시작했던 그는 10년이 지난 1672년에야 빛의 구성에 관한 최초의 공식적인 논문을 발표했으며, 이로부터 30년이 지난 1704년에야 『광학』을 출판했다. 뉴턴은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한 문제에 대한 자신의 논의를 꾸준히 발전시켜 나갔던 것이다.

3 만유인력 개념을 통해 태양계의 운동을 설명하다

만유인력은 모든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인력 개념을 도입하고 그것의 수학적 크기와 특성을 제시함으로써, 천상계의 물리학과 지상계의 물리학을 단일한 기반에서 설명할 수 있는 도구를 제공했다. 뉴턴의 만유인력 개념은 크게 세 단계를 거쳐서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발전된 개념이다.

첫 번째 단계는 흔히 ‘기적의 해’라고 불리는 1665~1666년 사이에 이루어진 것으로, 이 단계에서 태양과 행성에 작용하는 힘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수학적인 개념이 등장했다. 두 번째는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1679~1680년으로, 뉴턴이 후크가 보낸 편지에 자극을 받아서 힘의 방향, 즉 구심력의 개념을 형성하는 단계다.

세 번째 단계는 1684~1687년까지로, 천문학자 핼리의 청으로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힘이 작용할 때 행성의 운동궤적이 타원이 된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 계기가 되어 『프린키피아』를 쓰면서 만유인력 개념을 완성한 단계다.

과학사학자들은 뉴턴의 노트에 근거해서 ‘기적의 해’에 뉴턴이 알아낸 것에 대해 ‘만유인력’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 아직은 이르다고 평가하고 있다. 뉴턴은 사과가 떨어지는 것과 달의 운동을 비교한 뒤에 거리의 역제곱에 비례하는 힘이라는 개념을 알아냈다고 주장했지만, 과학사학자들은 이런 회고에 신빙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설령 이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무엇보다도 당시 뉴턴의 사고에는 “힘”이라는 생각 자체가 결여되어 있었고 따라서 당연히 인력이나 힘의 방향과 같은 만유인력의 기본적인 특징들도 존재할 수 없었다.

원운동하는 물체를 보면 중심에서 잡아당기는 구심적 경향보다는 중심으로부터 달아나려고 하는 원심적 경향이 훨씬 쉽게 감지되며, 당시 과학자들 대부분은 이 원심적 경향에 주목했다.

데카르트는 원운동의 원심적인 경향을 분석했고, 이에 영향을 받은 뉴턴 자신도 1665~1666년에는 원심적 경향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했다. 따라서 이 시기 뉴턴이 거리제곱에 반비례하는 힘을 유도했다고 해도 그는 그 생각을 만유인력의 개념으로 더 발전시키기 힘들었을 것은 분명해 보인다.

뉴턴의 생각은 1679~1680년 사이에 후크와의 서신 교환을 통해 원운동을 하는 물체를 중심에서 잡아당기는 구심력의 개념에 도달함으로써 크게 발전했다. 그는 천문학자 핼리의 방문을 받은 뒤에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서 1687년에 『프린키피아』를 출판했다.

당시 핼리는 행성과 태양 사이에 어떤 힘이 존재하면 행성이 타원운동을 하는가를 뉴턴에게 물어봤는데, 뉴턴이 너무도 분명하게 거리의 역제곱에 비례하는 힘이라는 답을 했고, 이런 만남을 계기로 뉴턴에게 책을 쓰기를 권했다.

그렇게 나온 뉴턴의 책은 세 권으로 되어 있었는데, 1권에서는 역학의 기본적인 개념인 질량의 정의부터 시작하여 마찰이 없는 이상적인 상태에서 일어나는 물체의 운동을 관성의 법칙, 운동의 법칙(F=ma), 작용․반작용의 법칙이라는 뉴턴의 세 가지 운동법칙으로 설명했다.

2권에서는 데카르트의 소용돌이 이론을 비판하고, 마찰이 있는 공기와 같은 유체 내에서 움직이는 물체의 운동을 다루었다. 본격적으로 만유인력이 도입되고 이에 바탕해 천체의 운동이 논의된 것은 바로 3권이었다.

여기서 뉴턴은 만유인력의 개념을 공식적으로 표명하고 만유인력이 구심력으로 작용하는 천체는 케플러의 세 가지 행성 운행 법칙을 따른다는 것을 증명하고 달의 운동, 세차 운동, 조수 등을 분석했다.

뉴턴의 『프린키피아』 표지.

뉴턴의 과학적 업적에서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역시 데카르트다. 『프린키피아』의 원제목인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도 데카르트의 『철학원리』(Principles of Philosophy)를 염두에 두고 정해진 제목이라는 사실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그의 출발점은 데카르트였다.

이보다는 못하지만 케플러, 갈릴레오, 보일 같은 과학자들도 뉴턴의 연구에 영향을 미쳤다. 뉴턴은 위에서 언급한 방식대로 이들의 책을 읽고 정리하고 확장시켰으며, 이들을 넘어섰다. 그러나 만유인력 연구에 영향을 미친 것이 비단 이들 과학자들의 연구에 한정되지는 않았다.

고대 그리스·로마의 시, 성경, 르네상스에 유행한 고대의 신비주의 사상들, 연금술 연구도 과학자들의 연구만큼이나 뉴턴에게 중요한 아이디어의 원천으로 기능했다. 특히 연금술은 그가 ‘힘’이라는 개념을 새롭게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뉴턴의 연금술 연구는 20세기 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다가 뉴턴의 자료를 사들였던 유명한 경제학자 케인즈에 의해 세상에 널리 소개되었다. 그는 방대한 양의 연금술 연구 노트를 보고 뉴턴은 근대적인 과학자가 아니라 “최후의 연금술사”였다고 했다.

이로써 빛을 보게 된 뉴턴의 연금술 연구에 많은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뉴턴은 많은 연금술 책들을 섭렵했고 실험에도 몰두했다. 이런 신비주의적인 연구를 뉴턴이라는 ‘과학적인’ 인물이 했다는 점이 무엇보다도 사람들에게 의외의 사실로 다가왔던 것이다.

그러나 뉴턴을 연구하던 과학사학자 중 일부는 연금술 연구를 통해 그의 원거리 작용(action-at-a-distance)의 근원에 대한 단서를 잡을 수 있었다. 뉴턴에 대한 가장 권위 있는 전기를 낸 과학사학자 웨스트폴(Richard Westfall)은 원거리 인력이라는 개념의 근원을 뉴턴의 연금술 연구에서 찾았다.

그는 뉴턴이 연금술 연구를 활발히 했던 시기와 만유인력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던 시기가 서로 겹친다는 사실과 연금술에서 많이 사용하는 “활동적인 원리(active principle)”라는 개념과 만유인력의 원거리 인력 사이의 개념의 유사성을 들며 만유인력 개념 형성에 미친 연금술 연구의 영향을 제시했다.

또 다른 과학사학자 돕스 역시 연금술에서의 특정한 개념과 만유인력 개념 사이의 유사성을 근거로 연금술 연구의 영향을 거론했다. 이들의 연구는 만유인력 개념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뉴턴이 수리물리학적인 이론이나 테크닉 외에도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아이디어들을 이용해서 과학적인 발견을 하나로 완성시켜 나갔음을 보여 준다. 연금술의 아이디어들이 과학적인 발견으로 수렴하는 과정에서도 뉴턴의 비판적인 수용의 특성이 잘 드러난다.

뉴턴의 연금술 노트의 일부.

『프린키피아』 출판 이후 뉴턴은 점점 더 유명해졌다. 그는 1688년의 명예혁명 이후에 케임브리지 대학 대표로 하원에 진출해서 정계에 입문했으며, 위조 동전을 방지하는 기술을 발명해서 1691년에 조폐국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1703년에는 왕립학회 회장으로 선출되어, 카리스마적인 리더십으로 왕립학회를 통치했다.

1705년에는 영국 왕실로부터 기사(knight)에 서훈되었는데, 이는 과학적 업적 때문에 과학자가 작위를 받은 첫 번째 사례였다. 뉴턴은 1727년 3월 20일(그레고리력 1727년 3월 31일에 해당)에 사망했으며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 영국의 시인 알렉산더 포프는 뉴턴의 조사를 다음과 같이 읊었다.

자연과 자연의 법칙은
어둠 속에 숨겨져 있었네.
신이 말하길, 뉴턴이여 있으라.
그러자 모든 것이 광명이었나니.
참고문헌
  • 홍성욱 외, 『뉴턴과 아인슈타인: 우리가 몰랐던 천재들의 창조성』 창작과 비평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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