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정역 8번 출구 빨래방…댓글 보려고 매주 빨래하러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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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0.02.17. 오후 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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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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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커버스토리
코인 빨래방 공동 일기장

지난해 여름 빨래방에 노트 놓자
댓글 이어져 공동 일기장 탄생
50쪽 공책에 손글씨와 그림 가득

서울살이, 일의 기쁨·슬픔부터
‘혼삶’의 자유와 쓸쓸함까지

차가운 도시의 얼굴 없는 사람들
따뜻한 이웃 만나는 유일한 통로
그래픽 박향미 기자 phm8302@hani.co.kr






▶가수 유산슬의 노래 ‘합정역 5번 출구’에서 “정이 많아 정이 넘쳐 ‘합정’”이라고 했다. 합정동 사람들의 코인빨래방 공용 노트에는 노랫말처럼 ‘다정도 병인 양’ 감성 어린 글이 넘친다. “밥은 잘 드시는지 궁금합니다.” “환절기 감기 조심하세요.” 원룸과 오피스텔, 빌라가 많은 이 동네 사람들은 ‘혼삶’의 자유 속에서 ‘느슨한 연대’를 찾고 있었다. 서울의 ‘힙한’ 동네 코인빨래방에서 차가운 도시를 얼굴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따뜻한 이야기를 읽었다. 글·사진 김미향 기자 aroma@hani.co.kr





500원짜리 동전 열 개로 한겨울 찌든 때를 벗겨내는 곳, 잿빛인 줄 알았던 이불이 하얗게 변신하는 곳, 이곳은 바로 코인(동전)빨래방이다. 근처에 프랜차이즈 세탁소가 있지만, 세탁부터 건조까지 1만원이면 충분한 이곳에서 동네 사람들은 오늘도 빨래를 한다.

지난 10일 방문한 서울 마포구 합정동 코인빨래방 ‘오늘은 빨래’에서 봄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직장인 김진아(가명·26)씨는 하루 전 서울에서 세 번째 이사를 했다. 스무 살 때부터 시작된 김씨의 서울살이는 2월 이사철이 되면 빨랫감으로 한바탕 전쟁을 치른다. 김씨는 자취방 작은 세탁기로는 해결되지 않는 이불, 요 두 장, 베갯잇을 한가득 안고 집 근처 빨래방에 왔다. 김씨는 새 동네로 이사할 때마다 설렘과 두려움이 교차한다고 했다. 여기서 잘 지낼 수 있을까. 잦은 이사를 경험하며 ‘동네 친구’ 한 명이 그렇게 그리웠다.

김씨 같은 마음을 가진 이들이 많았던 것일까. 빨래방 사장이 탁자 한켠에 던져놓은 노트 한 권은 그렇게 동네 사람들의 ‘공동 일기장’이 됐다. 늘 가게를 지키는 빨간색 노트에 손님들은 일기처럼 자신의 일상을 적고 갔고, 다음번 손님은 그 글에 댓글을 달았다. 짧게는 한 문장, 길게는 한 쪽을 가득 채운 글들과 공감의 이모티콘, 명랑한 손그림들은 반년 사이 50쪽 분량의 노트 한 권을 가득 채웠다. 동네 사람들이 반년간 함께 적은 이 시대의 기록이 됐다.

의도한 사람은 없었다. 종업원이 상주하지 않는 무인 가게에 지난해 여름 이상기(40) 사장은 공책 한 권과 볼펜 한 자루를 갖다 놨다. 불편한 점이 있으면 써두라는 용도였다. 처음엔 건의사항이 주로 적혔다. “게임기가 동전을 먹었어요” “비 오는데 우산꽂이가 없어요” 같은 것이었다. 그러다 슬슬 노트에는 하나둘 사람 사는 이야기가 적히기 시작했다. “점심때를 놓쳐서 빨래방에서 햄버거를 잠깐 먹었는데, ‘음식 반입금지’ 문구를 이제야 봤네요. 사장님 죄송해요” 같은 귀여운 고객의 목소리가 적히는가 하면 이 공간을 사랑하는 이들의 목소리도 들렸다. “자취방에 세탁기가 없어 이곳에 와 빨래하는 게 참 귀찮은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노트를 보니 여기 오는 게 마냥 번거로운 일만은 아니네요” 같은 식으로 말이다. 2년 전 이 빨래방을 차린 이 사장은 “동네에 오래 살다 보니 이 근처에 빨래방을 차리면 수익이 나겠다 싶어 시작했는데, 지금은 단순히 돈을 버는 공간 그 이상의 가치를 느낀다. 따뜻한 빨래를 받아들고 좋아하는 동네 사람들과 훈훈한 사연이 담긴 이 노트를 보며 장사하는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지난 10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 코인빨래방 ‘오늘은 빨래’에서 동네 주민 김단비(가명)씨가 노트에 글을 적고 있다.


빨래방 노트에는 동네 주민들이 손으로 쓴 글과 이모티콘, 그림들이 가득하다.




합치면 정이 되어 ‘합정’이라는데

가수 유산슬이 부른 노래 ‘합정역 5번 출구’에선 “합치면 정이 된다” “정이 많아 정이 넘쳐 ‘합정’”이라고 했다. 실제 합정동은 합할 ‘합’자에 샘 ‘정’자의 조합으로, 샘이 있는 동네란 뜻이다. 하지만 합정동 사람들이 함께 적어 내려간 쪽글을 보면 노랫말처럼 ‘다정도 병인 양’ 감성 어린 글이 많았다. 구불구불한 손글씨로 가득 채운 일기장에는 동네 사람들이 밥은 먹고 다니는지, 날씨가 쌀쌀한데 건강은 괜찮은지 소소한 관심으로 가득했다.

“일기장을 보니 정이 넘쳐흐르는군요. 밥은 잘 드시는지 궁금합니다.”(2019년 ○월○일)

“바람이 차가워 겨울이 코앞이구나 하네요. 환절기 감기 조심하세요. 덧, 저는 오늘 저녁으로 떡볶이를 해먹을 거예요.”(2019년 11월16일)

공용세탁기가 있는 빨래방은 동네의 사랑방 같은 존재다. 사랑방에 놓인 노트는 혼자 사는 사람들을 연결해준다. 음악을 듣는 게 취미인 누군가가 ‘인생 노래’ 추천 리스트 10곡을 내리 적어놓고 가면 다음 사람이 와 “꼭 다 들어볼게요”라고 답한다. 웹툰 작가가 꿈이라는 이가 한 쪽 가득 만화를 그려놓고 가면 “그림 멋져요”라고 호응해준다. 동네 주민 김단비(가명·32)씨는 “빨래도 빨래지만 노트에 쓴 내 글에 무슨 댓글이 달렸나 보는 재미에 매주 빨래방에 온다”며 “누가 썼는지 모르니 편하게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다. 마치 낯선 곳에 여행 갔을 때 친구에게 엽서를 끄적이는 기분”이라고 했다.

가장 인기글은 집단지성으로 모은 ‘동네 맛집’ 리스트. 누군가 “이곳 맛있어요” 소개하면 다른 이가 다녀와서 그 소감을 적어둔다. “야채곱창 먹고 싶다. 맥주랑” 이렇게 적으면 또 누군가 와서 “합정역 부근 ○○막창 맛나요”라고 호응한다. “다들 이 근처에 맥주 맛집 아시나요?”라는 질문에 “저두 몰라서 혼술해요. ‘편맥’(편의점 맥주) 해요.ㅋㅋ”라고 답이 온다.

때론 얼굴 모르는 동네 이웃도 설레는 일상을 전하고 싶은 사람이 될 수 있다. “최근에 좋은 사람을 만났다”며 운을 뗀 한 쪽글에는 “나를 아껴준다/ 나를 계속 뛰게 해준다/ 나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넌 오래 보고 싶은 사람이다”라며 운율 맞춘 자기 고백이 담겨 있었다.

원룸과 오피스텔, 빌라가 많은 이 동네 사람들은 ‘혼삶’의 자유 속에서도 느슨한 연대를 찾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일주일 만에 돌아온 알바 음악 23입니다. 요즘은 음악 만드느라 한창 바빠요. 혼자 작은 방에 살다보니 가끔 치킨이나 고기 먹고 싶을 때 못 먹는 게 너무 아쉬워요. 글 남겨주세요”라고 누군가 끄적였다. 그러자 사람들은 “저랑 놀아유” “오픈채팅방 만들었어요. 오세요” “합정동 자취모임 있음 좋겠다” “10월8일 홍대 8시 (정모)”라고 호응했다.





일의 기쁨과 슬픔

“출근하기 싫다.” → “퇴사하고 싶다. ㅋㅋ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살려주세요. 제발요.” → “난 퇴사 결심. 모두 행복하세요.”

동네 주민들이 반년간 함께 써 내려간 일기장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내용은 무엇일까. 다름 아닌 일의 고단함이다. 50쪽 분량의 노트에 ‘내일 출근하기 싫다’는 내용만 열 번 넘게 등장한다. 빨래방은 금요일 저녁부터 일요일 저녁까지 주말에 손님이 가장 몰리기 때문일까. 휴일에 밀린 빨래를 하며 다음주를 준비하는 이곳에선 너도나도 내일 출근길이 두렵다는 말들을 쏟아낸다. 누군가 “퇴사하고 싶다”를 써놓으면 주렁주렁 “나도 그렇다”는 답이 달린다. 연말 공휴일에 일하는 고통도 함께 나누면 절반이 될까. “12월25일에 출근하는 사람, 일단 나.”(2019년 12월24일)

일요일 저녁, 빨래방은 삶을 되돌아보는 명상의 공간이 된다. “내일 벌써 월요일이네요.ㅠ 쉬는 날은 왜 이렇게 시간이 빠르게 가는지… 퇴사가 너무 하고 싶은 밤이에요! 다들 삶에서 어떤 것에 행복을 찾으시는지 궁금해요.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 수 있을까요?” 한 손님의 진지한 글에 다음 방문객은 유머와 재치로 화답한다. “돈을 벌어서 막 쓰면 행복하던데…”라는 답글이 달리는가 하면, 누군가는 “나는 출근. 밤샘… 돈 벌자. 다들 대충 사세요. 200짜리 300짜리ㅠㅠ (인생)”이라고 자조 섞인 글을 이어갔다. “출근은 왜 하는 거지, 돈 벌려고 하나?”란 문장엔 “미래에 대한 투자라고 생각해야죠”라며 서로를 위로한다.

몸담은 직장을 떠나는 슬픔도 낯모르는 동네 사람들과 나누면 절반이 된다. “2년 넘게 다닌 일을 어제부로 퇴사했어요. 그동안 같이 일했던 직원들도 생각나고 그래서 시원섭섭해요. 모든 직장인분들, 화이팅.” 누군가가 적은 사연에 얼굴 모르는 이웃들은 “파이팅” “앞으로 좋은 일만 생기시길 바라요:)”라며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함께 일하는 동료를 잃는 슬픔도 빨래방 일기장에 적으면 나아질까. 지난해 10월 ‘엠에이치’(MH)는 “어제는 많이 우울했어요. 최근 1년 동안 회사 내부 사정으로 동고동락하던 선후배 동료들이 7명이나 회사를 떠났거든요.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는데 그 고통이 너무나 가까이 다가오네요. 친구, 가족보다 더 자주 봤던 ‘전우’들이었는데… 다들 각자의 자리에서 새로운 길을 걸어나가길 기원해봅니다”라며 “잘 지내세요, 모두”라고 떠난 이들의 안녕을 빌었다.







도시의 상처, 지방 사람의 서울살이

서울로 이촌향도한 이들은 익명을 빌려 도시의 상처를 이곳 일기장에 털어놓는다. 혼자 사는 젊은이가 많은 이 동네에서 따뜻한 공감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일까. 도시는 시작하는 이의 설렘과 버티는 이의 고단함, 그리고 떠나는 이의 아쉬움을 동시에 안고 달리고 있었다. 누군가는 “제주 촌놈들의 합정살이 시작. 성공하자, 섬놈들아”라고 시작하는 설렘을 내비쳤고, 누군가는 버티는 삶의 고단함에 대해 적었다.

“22살, 호텔에서 케이크를 만드는 ‘파티시에’(제빵사)이자 직장인입니다. 고향에서 올라와 혼자 살면서 회사 다니는데, 너무 외롭고 첫 사회생활은 매일매일이 새롭고 눈칫밥만 먹으면서 보내는 거 같아요.” 한 사회 초년생이 쓴 이 글에 열 살 많은 직장인은 이렇게 답한다. “저는 32살 고향에서 올라와 혼자 사는 직장인입니다:) 스무 살 때부터 집을 나와 살면서 여러 일들 겪었네요. 자취란 게 지긋지긋합니다. 그래도 친구들 덕분에 버텼어요. 힘내세요, 청춘들!♡”

노트 한켠에서 도시를 떠나는 이가 던지는 안녕의 인사말을 만났다. “촌년·촌놈 마포구 망원 합정에서만 햇수로 4년을 살았네요. 부푼 꿈을 잔뜩 가지고 올라왔지만 이것저것 쉬운 게 하나 없는 곳입니다. 올해 여름, 고향 쪽으로 내려가 작은 가게를 하려 합니다. 비록 서울에서 부자가 되진 못했지만 경험을 안고 가게 됐어요. 이제 20대 중후반이라 좌절은 안 하려구요. 그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못한, 부모님께도 말 못 했던 속마음, 여기에 끄적여봅니다.”(1월20일 ‘○○맘’)

그 누구에게도, 부모님에게도 말 못 했던 서울살이의 고단함을 왜 빨래방 일기장엔 적을 수 있었을까. “잠시라도 모두 잊고” “남김없이 비워내는 일”을 하고 싶을 땐 빨래가 최고라는 대중가요 노랫말이 있다. 가수 이적은 그의 노래 ‘빨래’에서 “무너진 가슴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하는 게 빨래라고 했다. 이들이 쉽게 말 못 했던 고민을 빨래방 일기장에 털어놓을 수 있었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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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라는 연결고리

“진눈깨비가 와요. 이불 빨래 하러 왔는데… 눈이 와서 띠로리. 다들 한 해 잘 보내셨나요?”(합정동 은블리, 2019년 12월21일)

“제 나이 39살 인생 처음 빨래방을 와봅니다. ‘라떼’는 생각지도 못한 클린한 시설에 마냥 신기하네요. 하지만 좋기는 개뿔! 내일 마흔, 불혹이라 우울합니다. 그러나 시간은 또 흐르고 계속 흐르는데 불평하면 무엇 하리오. 모두들 힙한 합정동에서 행복하시길 바랍니다.”(성산동 주민, 12월31일)

24시간 돌아가는 세탁기와 건조기를 벗 삼아 자신의 일상을 끄적이고 가는 도시의 사람들. 그 옛날 시냇가 빨래터에서 아낙네들이 서로 안부를 묻고 담소를 나눴듯, 차가운 도시의 빨래방은 노트 한 권으로 서로의 안부를 묻고 있었다. 연말연시 이웃간 인사도, 첫눈을 보는 기쁨도, 한 해를 정리하는 아쉬움도 빨래를 통해 이어진다. 창작 뮤지컬 <빨래>에선 “지치고 힘들 때 가장 따뜻한 위로가 되는 행위”가 빨래라고 이야기한다. 바람에 넘어간 빨래로 이웃과 친해진다는 내용의 이 뮤지컬처럼 빨래는 차가운 도시에서 나와 남을 이어주는 연결고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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