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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팝은 어떻게 차별화된 독자 장르로 자리 잡았나 (1/2)

2021.10.16. 오후 2:23
by 이규탁

세 줄 요약

  1. K팝 이전에 동아시아의 지배자는 홍콩의 칸토팝과 일본의 J팝이었다. 하지만 칸토팝은 홍콩이 영국에서 중국으로 이양되며 다양성을 잃어버렸다. J팝은 큰 내수시장에의 안주와 세계화에서 자기 색깔을 잃어버리며 자국 시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 스웨디시 팝은 트렌디하지만 서구권이라는 동질감을 공유한다. 라틴 팝 역시 영미 음악의 하위 장르로 범주화할 수 있다. 반면 K팝은 한국만의 이국적인 색채가 굉장히 강하다. K팝을 월드 뮤직으로 놓기에는, 전통성이 약하고 서구적으로 트렌디하다.

  3. K팝은 트렌디한 서구 음악의 바탕에, 한국적인 온갖 요소를 넣은 혼종적인 장르다. 음악 뿐 아니라 퍼포먼스, 소셜미디어에서의 소통, 인성 등 진정성 등 다양한 요소가 들어있다. 이런 이유로 K팝은 앞으로도 독자적인 장르로 세계시장에 자리잡을 가능성이 높다.

● 필자: 이규탁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언론정보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미국 조지메이슨대학교에서 ‘케이팝 세계화(Globalization of K-Pop)’에 관한 연구로 문화연구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2015년부터 송도국제신도시의 한국 조지메이슨대학교 교양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대중음악과 관련된 다양한 논문과 칼럼들을 학술지 및 다수의 매체에 기고해왔다. 저서로 『미디어와 문화』(2012, 공저), 역서로 『교양의 효용』(2016)이 있다.


전세계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K팝의 인기

K팝의 세계적인 성공과 인기는, 21세기 글로벌 음악 산업에서 가장 눈에 띄는 흐름이다. BTS는 미국 대표 차트 빌보드 메인 앨범 차트 ‘빌보드 200’과 싱글 차트 ‘핫HOT 100’에서 여러 차례 1위에 올랐다.

BTS와 블랙핑크 정도가 글로벌 성공으로 유명하지만, 많은 K팝 가수들이 인기를 얻고 있다. 그래서 2017년 말, 빌보드 차트 내에 ‘K팝 차트’까지 생겼다. 아이튠즈 등 글로벌 디지털 음원 서비스도 K팝을 독립된 장르 카테고리로 분류했다.

K팝 인기가 전세계에서 어느 정도로 많은지는 트위터의 발표자료에서도 알 수 있다

심지어 K팝의 글로벌한 성공은 ‘K’라는 접두어의 광범위한 활용을 낳았다. K팝과 더불어 한류 인기를 견인해온 한국의 TV 드라마는 언젠가부터 케이드라마K-Drama가 되었으며, K-Variety, K-Movie K-Webtoon등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해외 한류 팬들이 이렇게 이름을 붙이자, 정부가 이를 따라하느라 바쁘다. 최근 3-4년 사이 K-Beauty, K-Food 는 물론이고, K방역, K트로트(…) 여기저기 K를 붙이고 있다. 이렇듯 K팝이 현재 한국 사회와 문화에 끼친 영향력은 엄청나다.

K뷰티는 실제로 자리잡기도 했다

K팝은 한국이 아닌 해외에서 받아들이는 한국 특유의 음악

우선 ‘K팝=한국대중음악’은 아니다. K팝이라는 용어는 1990년대 말부터 중국어권 국가들을 중심으로 동아시아 각지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본국인 한국에서 이 용어가 널리 쓰인 것은 2007~2008년 무렵으로, 몇몇 한국 가수들의 노래가 동아시아를 넘어, 서구에도 알려지기 시작한 이후의 일이다.

즉 ‘K팝’이라는 용어는 국내에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해외에서 널리 쓰이다 역수입된 경우다. 특히 미국과 서유럽 등에 이 용어가 알려진 이후에야 한국에서도 활발히 쓰이기 시작했다. K팝은 해외에서 정의된 장르로, 한국 음악이라는 이유로 K팝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K팝에 속하지 않는 한국 대중음악은 K-hiphop, K-rock 등으로 불린다

전세계 다양한 음악과 유사함과 차이점을 가지는 K팝

그런데 K팝 말고도 국명 혹은 지역의 이니셜과 팝이 결합된 이름으로 불리며 국제적인 성공을 거둔 지역 음악들이 있다. 일본의 J팝J-Pop, 홍콩의 칸토팝Cantopop, 스웨디시 팝Swedish Popo, 라틴 팝Latin Pop 등이다.

HK팝으로도 불렸던 홍콩의 칸토팝은 1980, 90년대 아시아 일대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K팝이 처음 동아시아권에서 인기를 얻기 시작할 무렵, 많은 이들이 K팝을 J팝 혹은 칸토팝과 비교하곤 했으며, 실제로 이들과 K팝은 여러 가지 면에서 공통점이 있었다. 그리고 K팝의 인기가 전 세계로 확장되기 시작한 2010년대부터, K팝은 영미권에 널리 알려진 스웨디시 팝, 라틴 팝 등과 비교되기 시작했다. K팝은 놀랍게도 이들 음악과도 비슷한 면이 있었다.

이런 전세계 여러 지역성을 가진 음악과 K팝의 비교를 통해, K팝이 가진 양면적인 특성을 알 수 있다. 글로벌 대중음악(‘팝pop’)으로서의 보편성, 그리고 한국(‘케이K’) 지역 음악으로서의 특수성이다. 이하에서는 각 지역색이 장르 음악으로 굳혀진 음악과 K팝의 비교를 통해, K팝의 개념을 좇아보도록 하겠다.

K팝은 원래 혼종성이 대단히 짙은 음악이다

동아시아의 첫번째 지배자 홍콩의 칸토팝

한류, 즉 ‘외국에서 인기를 끈 한국 대중문화’는 1990년대 후반 동아시아에서부터 시작했다. 대만에서 예상치 못하게 큰 인기를 얻은 클론, 본격적으로 문화 개방을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았던 중국에서 인기를 얻었던 HOT, NRG, 베이비복스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K팝 1세대인 동시에 한류 1세대이기도 했다

1세대 K팝 이전, 1980년대에는 홍콩 영화와 음악이 동아시아 지역을 제패했다. 홍콩 대중음악은 광동어(Cantonese)로 노래를 부른 음악이라 칸토팝(Cantopop)으로 불렸다. 칸토팝 가수들이었던 장국영, 알란탐, 유덕화, 여명, 장학우 등의 인기는 홍콩, 대만,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 동아시아 전역에 걸쳐 있었으며 한국에서의 인기도 상당했다.

이들의 광동어 앨범, 만다린어(표준 중국어) 앨범, 영어 앨범은 국내에 꾸준히 정식 발매되었으며, 한국 TV 광고 모델로 이들이 등장하는가 하면 유덕화는 당대 최고의 인기 가수 신승훈과 서울에서 조인트 콘서트를 개최하여 많은 관객을 끌어 모을 정도였다.

당시 유덕화는 전세계적 스타였던 반면, 데뷔 3~4년차에 불과한 신승훈은 콘서트에서 굉장히 긴장했었다

영국에서 중국으로 넘어가며 허무하게 무너진 홍콩의 문화

그러나 K팝에 앞서 동아시아를 먼저 사로잡았던 칸토팝은 동아시아를 넘어서지 못했고, 10여년의 짧은 전성기를 누렸을 뿐이다. 이는 정치적, 사회적 변화의 영향이 크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홍콩은 일본을 제외하면 동아시아에서 가장 잘 사는 지역이었다. 또 공식적으로는 영국의 지배하에 있었기에, 동아시아에서 정치적인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가장 크게 누릴 수 있는 곳이었다.

홍콩의 80년대 경제는 일본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출처: 매일경제)

또한 홍콩은 90년대 초반까지 폐쇄적인 정책을 취하던 중국이, 자본주의 국가들과 비공식적으로 접촉하는 창구이기도 했다. 이러한 독특한 위치의 이점을 통해 홍콩 대중문화산업은 크게 번성했다. 칸토팝은 광동어와 만다린어(대륙에서 쓰는 표준 중국어), 영어를 자유자재로 활용하며, 표현의 자유가 제한됐고 문화산업의 성숙도도 낮았던 동아시아 각국에 수출될 수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로 접어 들며 홍콩의 중국 반환이 현실화되자, 홍콩 사회는 자유와 번영을 잃게 될 지도 모른다는 전반적인 불안감에 휩싸였고, 이는 문화산업을 강하게 짓눌렀다. 가수들은 점점 광동어나 영어가 아닌 만다린어로만 앨범을 발매하기 시작했다. 일부는 홍콩을 떠나 이민을 가거나, 중국 본토의 입맛에 맞추며 현실에 순응하기도 했다.

당시 홍콩을 지배한 불안감은 왕가위 감독의 영화 ‘중경삼림’의 첫번째 에피소드에 아주 잘 그려져 있다

그 결과 칸토팝은 이전까지 갖고 있던 자신만의 개성과 정체성을 잃고, 점차 중국 대중음악의 일부로 여겨졌고, 1997년 홍콩 반환이 현실화된 후 홍콩 문화산업은 활력을 잃고 말았다. 반면 한국은, 1990년대 민주화와 경제 발전을 통해 창작의 자유가 확보되자, 본격적으로 글로벌 대중음악을 받아들여 자기화하기 시작한다. 이 시점에서 둘의 역사가 반대로 갈려버렸다.

동아시아를 사로잡았지만, 세계진출에서 자기 색을 잃어버린 J팝

80년대 칸토팝에 이어, 동아시아를 지배한 문화는 1990년대 일본 드라마와 애니메이션, 음악이다. 80년대 후반 등장하여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음악임을 전면에 내세웠던 일본 대중음악은 J팝(J-Pop)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K팝’이라는 이름 자체가 칸토팝과 J팝에서 유래했다.

동아시아에서 1990년대 J팝의 인기는 독보적이었다. 대만에서는 일본 대중문화에 경도된 젊은이들을 ‘합일족(哈日族, 일본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라는 신조어로 불렀을 정도다. 한국에서는 정식 유통이 금지되어 있어, 앨범이 발매되거나 콘서트가 열리지는 못했던 시절이었음에도, 불법 복제 음반이나 위성방송 등을 통해 많은 이들이 X-Japan, Zard, 아무로 나미에 등의 음악에 심취해있었다.

아무로 나미에의 데뷔 앨범 ‘Sweet 19 Blues’는 한국에서 불법 복제 CD로만 100만장이 나갔다는 이야기가 떠돌았을 정도다

일본 대중음악 시장은 여전히 미국에 이은 세계 2위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장르의 다양성이나 실력 있는 음악인들의 끊임없는 등장과 같은 음악산업의 토양 역시 여전히 단단하다. 그러나 90년대 말 이후 J팝이 쇠퇴하기 시작한 것은 사실이다. 특히 2000년대 이후 J팝은 동아시아를 비롯한 해외 시장에서의 영향력을 거의 상실한 상태다.

이는 J팝의 해외 시장 진입 전략과 관계가 있다. 80-90년대 일본 가수들은 자국과 동아시아 시장에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미국 등 더 넓은 해외 시장 진입을 시도했다. 그 결과 헤비메탈 밴드 라우드니스Loudness 같은 그룹은 실제로 빌보드 앨범 차트에 오르는 등 가시적인 성과를 내기도 했다.

동양계 헤비메탈 그룹이 서구에서 성공했다는 자체만으로 충격이었던 라우드니스

하지만 이들의 전략, 즉 ‘해외 작곡가/편곡자에게 곡을 의뢰한 후 영어 가사를 붙여서 일본색을 철저히 제거한 채 승부한다’는 국제화 전략은 오히려 영미음악 대비 일본음악이 갖고 있는 차별성을 스스로 제거한 결과를 낳았다.

이들 음악의 좋고 나쁨을 떠나 일본 가수의 영어 음반은 해외 시장에서 별다른 경쟁력을 가지지 못했던 것이다. 글로벌 음악 수용자의 입장에서는 같은 영어 가사에 비슷한 음악 스타일이면 영미 팝가수나 북유럽 가수의 음악 대신 일본 음악을 택해야 할 지점을 딱히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1960년대 아시아 최초로 빌보드 1위를 차지했던 사카모토 큐의 <위를 보고 걷자(上を向いて歩こう)>, 엄청나게 일본색이 강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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