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셤 법칙

악화는 양화를 구축한다

시장의 흐름이 보이는 경제 법칙 101

비슷한 글10
보내기 폰트 크기 설정

‘악화(惡貨)는 양화(良貨)를 구축한다.’는 말이 있다. 쉽게 말해 ‘나쁜 돈이 좋은 돈을 몰아낸다.’는 뜻인데 영어로는 ‘Bad money drives out good money.’다. 16세기에 영국에서 활동했던 금융가 토머스 그레셤(Thomas Gresham)이 이러한 말을 했기 때문에 ‘그레셤의 법칙(Gresham’s Law)’이라고 부른다.

과연 어떤 돈이 좋은 돈이고 어떤 돈이 나쁜 돈일까? 지금처럼 지폐만 통용하는 시기에는 해당하지 않겠지만 토머스 그레셤이 살았던 시대에는 실제 은이나 동으로 화폐를 만들어 사용했다. 따라서 은을 예로 들면, 소재가 나쁜 화폐, 즉 은의 순도가 떨어진 은화가 악화이고, 은의 순도가 높은 은화는 양화였다. 순도가 낮든 높든 간에 은화의 액면 가치는 같기 때문에 사람들은 순도가 높은 은화를 자신의 집에 보관하고 순도가 낮은 은화만을 거래할 때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이 탄생했다.

그레셤은 영국의 정부 재정 고문관으로 있으면서 엘리자베스 1세에게 아버지인 헨리 8세처럼 질 낮은 금속으로 화폐를 주조해 통화의 질을 떨어뜨릴 것을 주장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그렇게 해야 화폐 발행을 통해 정부가 재정 수입을 늘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레셤은 사실 이런 현상을 처음으로 지적했다기보다는 그런 현상이 나타나도록 유도한 사람이었다.

그레셤은 당시 금융 제도를 만드는 데 큰 기여를 했다. 그는 나라 간의 환율이 갑작스럽게 요동치는 경우를 대비해 정부가 환율 조정에 개입할 수 있는 환평형계정을 창설하자고 제안했다. 또 은행가, 환전상들이 런던에서 편리하게 모여 거래를 할 수 있도록 왕립 거래소를 설치했는데 이것이 1571년에 증권거래소(Bourse)의 시초가 됐다.

사실 정부만 이런 나쁜 짓을 한 것은 아니다. 일반 사람들 중에는 은화의 옆면을 갈아서 은가루를 얻어내 은화의 은 함유량을 줄이는 이들이 있었다. 그래서 은화의 무게가 지속적으로 줄어든 결과 악화는 갈수록 많아졌다. 이러한 그레셤의 법칙은 은본위제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영국이 1821년에 도입한 금본위제에서도 발생했다. 현물가치가 있는 화폐본위제도에서는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현상이다. 1971년에 미국이 금과 달러의 태환을 금지하고 나서부터 지폐 본위제도에서 그레셤의 법칙은 더 이상 발생하지 않고 있다.

동전 옆면을 보면 톱니 모양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이 금화의 가장자리를 몰래 깎아 다른 금화로 만드는 일이 잦아지자 동전 옆면에 흠집이 나면 티가 나도록 톱니 모양을 새겨 넣은 것이다. 누가 이런 놀라운 아이디어를 냈을까? 바로 물리학자로 유명한 영국의 아이작 뉴턴이다. 뉴턴은 왕립 조폐국 부국장으로 근무하면서 1696년에 이런 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정부가 은화의 순도를 줄이는 일은 로마시대 네로 황제 때에도 있었다. 국민들이 정부의 조세 부과에 제대로 응하지 않자 네로 황제는 당시 순도 100%의 은화인 데나리우스(Denarius) 외부에는 은을 쓰되 안쪽에는 구리를 사용하여 순도 92%의 은화를 발행했었다. 물론, 구리를 사용한 만큼 정부가 벌어들인 재정 수입은 늘어났다. 하지만 사람들은 순도가 높은 예전 은화를 녹여서 팔고, 결제를 할 때 순도가 낮은 은화만 내놓았기 때문에 악화는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레셤 법칙은 로마 시대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네로 황제 이후에 은화의 순도는 계속 낮아져 3세기 때에는 은화의 순도가 5%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현재는 거의 모든 국가에서 귀금속 주화 대신 지폐를 주로 사용하다 보니 그레샴의 법칙은 현실적인 화폐 유통의 법칙으로서 의미는 퇴색하고 역사적인 의미만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레셤의 법칙은 다른 분야에서 많이 활용되고 있다. 선택 오류나 정보 부족으로 동종의 정책이나 상품 중 나쁜 것들이 좋은 것들을 압도하는 사회 병리 현상의 역설을 설명할 때 많이 이용한다.

예를 들어, 관리자가 정책을 선택할 때 단기적 성과만 염두에 두고, 장기적이고 전략적인 정책 양화를 택하기보다는 단기적이고 정형화된 정책 악화를 선택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경우 기획에서의 그레셤 법칙이라고 부른다. 또 마케팅에서도 그레셤 법칙이 나타나는데, 기업이 질이 나쁜 상품 악화를 과대 포장 광고해서 소비자가 질이 좋은 상품 양화를 선택할 수 없도록 하는 경우가 그렇다. 인터넷이 활발한 요즘 시대에는 불법으로 내려받은 파일이 진품 파일을 몰아내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학교에서 불량학생이 모범생을 금세 나쁜 방향으로 물들이는 것 역시 그레셤의 법칙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이처럼 악화가 양화를 몰아내면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발생한다. 악화만 횡행하는 사회에서는 상품의 가치가 떨어져 사람들은 제대로 된 상품과 서비스를 받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양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거나 망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강제성이 있는 법이나 사람들의 도덕적 양심과 자제에 의해 그레셤의 법칙이 더 이상 성립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출처

출처 도움말
확장영역 접기

한 권으로 총망라한 경제 법칙 101! 경제 공부의 맥을 짚어 주는 경제 지식 사전. 예전부터 존재한 수많...더보기

  • 지음
    김민주 기업인

    김민주는 마케팅컨설팅 회사인 ㈜리드앤리더(emars.co.kr) 대표이자 비즈니스사례 사이트인 이마스(www.emars.co.kr)의 대표 운영자, 동시에 강연가, 작가 겸 영미경영서적 전문 번역가이다. 대기업 · 정부기관 · 비영리기관을 대상으로 경영 컨설팅 활동 및 트렌드 · 마케팅에 대해 다양한 주제로 강의하고 있다. 특히 '경제 · 비즈니스 · 기업과 소비자의 진화'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소비 트렌드와 관련하여 활발하게 연구하고 있다. 그의 회사명인 '리드앤리더'는 Read와 Leader에서 유래하여 '세상을 읽으면 세상을 주도할 수 있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 방법으로 김민주가 택한 것은 비즈니스 사례와 서적이다. 그가 번역하거나 출판하는 책들은 대부분 미래의 흐름과 상대방의 니즈를 읽어 비지니스를 성공으로 이끄는 방법들을 제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는 현대의 모습 속에서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그가 번역한 책들의 강연회에도 직접 참석하며 그의 견해를 어필한다. 또한 한국사회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주제의 출판에 있어서도 그는 적극적이다. '스토리텔링 마케팅', '기업의 사회적 책임', '로하스(LOHAS)', '뉴로마케팅' 등의 새로운 마케팅 기법을 소개하고 알리는 책들은 그의 손을 거쳐서 번역된다. 이러한 선도적인 감각을 바탕으로 그는 SK, 삼성, 포스코, KT, LG 등 많은 기업과 정부기관에서 마케팅 강연을 하거나 잡지 컬럼에 글도 기고하고 있다. 서울대와 시카고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했으며 한국은행과 SK에너지에서 근무했고, 건국대학교 경영대학원 겸임교수를 지냈다. 저서로는 『경제법칙 101』 『시티노믹스』 『커피로 알아보는 마케팅 베이직』, 『2012 트렌드 키워드』, 『로하스 경제학』, 『앞으로 3년, 대한민국 트렌드』, 『커져라 상상력 강해져라 마케팅』, 『성공하는 기업에는 스토리가 있다』, 『글로벌 기업의 지속가능경영』, 『커피 경제학』 등이 있으며 대표 역서로는 『깨진 유리창 법칙』, 『B2B 브랜드 마케팅』, 『지식경제학 미스테리』,『트래픽』 등이 있다.

    더보기
  • 제공처
접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