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필리핀 납치 살해 ‘사라진 주검’ 미스터리 10년 만에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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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8.12.25. 오후 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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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속으로]

2007년 ‘안양 환전소 살인사건’ 범인 필리핀 도주

2008, 2012년 대출 미끼 저신용 독신 남성 필리핀 유인

피해자 실종, 피의자 국외 도주 이유로 장기미제 남아

안산지청, 과학수사 통해 지난 8월 수사 착수 두달 만에 기소


2008년 1월 인천에서 시간제 일자리를 전전하던 장아무개(당시 29살)씨는 갑자기 필리핀으로 떠났다. 대출브로커 전아무개(46)씨가 “필리핀에 가면 자신이 운영하는 법인 명의로 많은 돈을 대출받게 해주겠다”고 꼬드겼기 때문이다. 가족이 모두 이민을 떠나 혼자였던 장씨는 아무도 모르게 필리핀으로 갔다. 장씨는 거기서 ‘최 사장’ 최아무개(52), ‘원 과장’이라 불리는 김아무개씨를 소개받았다.

회사원인 줄 알았던 최씨와 김씨가 2007년 7월 세상을 어지럽힌 ‘안양 환전소 살인 사건’의 범인들이라는 사실을 장씨는 까맣게 몰랐다. 최씨 등은 환전소 여직원을 살해하고 1억8500만원어치 금품을 훔쳐 외국으로 도주한 상태였다. 장씨는 ‘더 많은 돈을 대출해주겠다’는 말에 속아 카드깡으로 마련한 2천만원을 건넨 뒤 ‘실종’됐다. 한국에 혼자 남은 아들이 몇달째 연락이 없자 이민 떠난 부모가 수소문에 나섰다. 출국기록 등을 통해 필리핀에서의 일부 행적이 드러났지만, 그해 12월 최씨 등이 외국으로 도주했다는 이유로 수사기관은 이 사건을 내사종결했다. 수사기관이 손을 놓고 있는 사이 최씨는 고향 친구의 여권을 위조해 필리핀 타이 라오스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시아 일대를 70차례나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도피 자금은 필리핀으로 관광 온 한국인을 납치한 뒤 빼앗은 금품으로 충당했다.

■ 쇠사슬로 묶고 권총으로 위협하고 최씨 일당은 인터넷 카페에 ‘필리핀 여행을 간다’는 글과 연락처를 올린 젊은 남성을 노렸다. 필리핀 여성과의 만남을 대가로 피해자를 유인하기도 했다. 관광을 시켜주며 피해자를 안심시킨 뒤 은신처로 납치해 감금했다. 피해자들의 손과 발을 쇠사슬이나 줄, 수갑으로 묶은 뒤 70㎝ 길이 정글도로 위협하거나 때렸다. 권총을 머리에 들이대며 “장기를 내다 팔겠다”고 협박도 했다. 청테이프로 눈을 가린 뒤 옷을 모두 벗기고 폭행하기도 했다. 겁에 질린 한국인 관광객들은 수백만~수천만원씩을 빼앗겼다. 2008년 11월부터 2011년 7월까지 피해자 12명이 3억여원을 뜯겼다. 이 가운데는 5천만원을 뺏긴 뒤 살해된 김아무개(당시 50살)씨도 있다. 이들의 범행은 2013년 <그것이 알고 싶다>(SBS)에서 일부 다뤄졌다.

그 무렵 ‘전 실장’ 전씨는 한국에서 전세자금 대출사기를 하고 있었다. 2012년 8월부터 2013년 4월까지 4명의 이름을 빌려 은행권에서 3억2900만원을 대출받았다. 피해자 가운데는 고아로 지능이 다소 낮은 송아무개(당시 37살)씨도 있었다. 2012년 9월 송씨 이름으로 8500만원을 대출받은 전씨는 돈 대부분을 써버렸다. 송씨가 돈을 달라고 하자 전씨는 “타이에서 사업을 하자”고 말을 바꿨다. 타이 방콕으로 간 송씨는 현지에서 기다리던 최씨에게 여권을 빼앗긴 뒤 ‘실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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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매장 진술 받고도 장기미제로 수사의 불씨는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다시 살아났다. 최씨가 위조여권으로 태국에 입국하다 검거된 것이다. 태국 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최씨를 한국 정부는 2013년 10월 범죄인 인도 방식으로 송환했다. 부산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부산지검의 수사로 안양 환전소 살인사건은 물론 필리핀에서의 강도·살인 혐의도 일부 드러났다. 지난해 9월 최씨는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이 확정됐다.

그러나 장씨와 송씨 실종사건은 혐의를 제대로 밝혀내지 못하며 장기미제 사건으로 남게 됐다. 2013년 수사 당시 최씨는 장씨를 권총으로 죽인 뒤 필리핀 마닐라의 한 야산에 암매장했다고 진술했지만 주검을 찾지는 못했다. 송씨에 대해서는 ‘타이 보이스피싱 조직에서 일하는 것으로 안다’며 강도살인 혐의를 부인했다. 공범인 전씨의 잦은 주거지 이동으로 2013년 이후 5년 동안 관할 검찰청이 7차례나 바뀌며 ‘붙박이 수사’도 어려웠다. 복잡한 국제사법공조도 시간을 잡아먹었다. 타이에서 범죄를 저지른 최씨를 재판에 넘기려면 타이의 ‘기소 동의’를 받아야 하는데 지난해에야 이 절차가 마무리됐다.

■ ‘시신 없는 살인사건’ 10년 숙제 푼 검찰 이 사건은 지난 8월에야 수원지검 안산지청에 뿌리를 내렸다. 안산지청은 신용이 불량하거나 가족이 없는 피해자들을 노린 강력범죄로 규정하고 재수사에 착수했다. 형사2부(부장 윤원상)는 부장검사까지 매달려 1만5천쪽에 이르는 수사기록을 재검토했다. 참고인 30여명을 불러 사건의 빈틈을 맞춰갔다. 앞서 경찰 수사에서 실종된 두 사람과 함께 출국한 사실이 확인된 ‘전 실장’ 전씨와 ‘최 사장’ 최씨의 연결 고리를 찾아야만 했다. 검찰은 전씨와 최씨 사이의 계좌이체 내역, 실종 전후 행적 등 물증을 찾는 데 주력했다. 과학수사 장비를 통해 전씨와 최씨가 특정한 시기, 특정한 장소에서 얼마나 자주 휴대전화 통화를 했는지도 확인했다.

결국 수사 시작 두달여 만인 지난 10월 말 검찰은 두 사람을 장씨에 대한 강도살인·사체유기 등 혐의로 기소했다. 실종된 송씨와 관련해서는 강도살인 혐의까지는 적용하지 못하고 국외이송유인 등의 혐의로 기소했다. 장씨가 숨진 지 10년, 송씨가 ‘실종’된 지 6년, 검찰에 사건이 접수된 지 5년이 지난 뒤다.

현재 수원지법에서는 최씨와 전씨의 1심 재판이 진행 중이다. 검찰로서는 살인의 직접 증거가 되는 ‘시신’이 없다는 점이 공소유지에 부담이 될 수 있다. 2008년 대법원은 “정황상 피해자가 숨진 상태라는 점은 대체로 수긍할 수 있으나 시신이 발견되지 않은 상황에서 피고인의 행위로 피해자가 숨졌다고 인정할 정도의 증명이 이뤄졌다고 보기 어렵다”며 무죄 취지로 사건을 돌려보냈다. 반면 2012년 대법원은 “살인죄 등과 같이 법정형이 무거운 범죄의 경우 직접 증거 없이 간접 증거만으로 유죄를 인정할 수 있다”고 판결하기도 했다. 윤원상 부장검사는 “직접 증거인 주검을 찾지 못했지만 계좌이체 내용과 통화 내역 등 확인된 간접 증거만으로도 살인죄 적용이 가능하다. 재판에서 이를 적극 입증하겠다”고 했다.

최우리 기자 ecowo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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