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영의 사회심리학] 죽음의 문턱에서도 인간은 유대감을 형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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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 사고 등 극한 상황에서 나와 타인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타인의 안전이 곧 내 안전인 것처럼 느껴지는 현상이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인간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인 존재라는 시각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영화나 드라마 등에서도 특히 재난이 터지면 다들 자기만 살겠다고 먼저 도망가는 장면들이 흔히 나타난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그렇게까지 이기적이지는 않지만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이기적이라고 여기기도 한다.

이기심을 자신의 안전과 안녕을 우선시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면 인간이 이기적인 존재인 것은 당연한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사실은 인간에게 있어 이기심이 이타심과 꼭 반대편에 놓여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기적인 동시에 이타적일 수 있으며, 실은 이기적인 것과 이타적인 것 사이의 경계 자체가 모호할 때가 많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근본적으로 ‘사회적인 동물’ 즉 관계를 통해서 스스로를 정의하며 관계를 통해서 자신의 안전과 안녕을 확보하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일례로 영화 등에서 자주 나타나는 소재인 극한 상황에서 나타나는 이기심과 집단 광기에 대해 영국 서섹스대 존 드루리 교수와 동료들은 그 증거가 희박하다고 이야기한다. 일례로 비행기 추락 같이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한 대형 사고, 대형 화재, 911 테러 사건 등 각종 재난 상황에서 개개인의 이기적인 행동들보다는 힘을 합쳐 부상자를 구하고 함께 살아남으려 애쓰는 행동들이 더 지배적으로 나타났다. 비이성적이고 이기적인 행동이 문제가 되었던 경우는 124건의 사건 사고에서 한 건 정도였다고 한다.

또 극단적인 공포 상황이 닥쳤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혼자 도망치기보다 친하고 익숙한 사람과 장소를 찾는 경향을 보인다. 아이들은 다치거나 마음이 상할 때면 울면서 일단 엄마 아빠를 찾는다. 무릎이 까졌다는 사실은 그대로이지만 일단 양육자를 만나면 울음을 그치고 마음의 평화를 찾는다. 전쟁 상황에서도 아이들은 포탄이 떨어지는 것보다 양육자와 분리되는 것을 더 두려워한다는 보고가 있었다. 커서도 마찬가지다. 일단 무섭고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 닥치면 사람들이 가장 먼저 찾는 것은 친구와 가족이다. 폭발물이 터지고 건물이 무너지는 상황에서도 바로 몸을 피하기보다 서로를 찾아서 우왕좌왕 해매다가 대피가 늦어진다는 발견들이 있었다.

특히 친한 사람 여럿이 함께 있는 상황이라면 움직임이 가장 빠른 사람이 가장 느린 사람을 도와서 대피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각자 알아서 대피하기보다 모두의 안전을 확인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그 결과 함께 있었던 친구나 가족의 수가 많을수록 대피가 늦어지는 경향이 나타난다고 한다. 위급할수록 개인플레이가 나타날 거라는 예상과 다르게 위급할수록 집단 행동이 두드러지는 것이다.

평상시에 사람들에게 '죽음' 같은 것을 떠올리게 하면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방법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가족이나 친구 같이 익숙하고 친한 사람들을 떠올리고 자신의 소속 집단, 국가나 문화권에도 더 큰 애착을 갖게 된다는 발견과도 같은 맥락이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있어 죽음 같이 거대한 위협과 맞서 싸울 수 있는 힘과 안정감을 주는 무기는 다름 아닌 사람인 것이다. 한편 많은 이들에게 있어 인생에서 가장 큰 고통을 주는 것 또한 사람인데 이 또한 사회적 동물에게 있어 타인이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재난 상황이 닥치면 평소에 친했던 사람이 아닌, 오늘 처음 보는 낯선 사람과도 남다른 유대감을 형성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2005년 영국 런던 폭탄 테러 생존자들을 대상으로 한 인터뷰에 따르면 같이 도망쳤던 사람들의 인상착의를 기억하고 그 사람들의 안전을 확인하려고 두리번거렸다든가 넘어지면 반사적으로 일으켜세워주는 행동이 흔히 나타났다. 소리치며 밀치기보다 정적에 가까운 고요함 속에서 차분히 대피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911 테러 당시에도 패닉보다는 망연자실함과 고요함이 더 인상적이었다는 회고들이 남아있다.

또 함께 죽음을 헤쳐 나온 사람들 사이에는 일종의 전우애 같은 끈끈함이 나타나곤 한다. 런던 테러에서의 한 생존자는 “1분 전까지 낯선 사람이었던 사람이 어느덧 세상에서 가장 가깝고 중요한 사람처럼 느껴지는 경험을 했다”고 언급했다. 극한 상황에서는 되려 나와 타인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타인의 안전이 곧 내 안전인 것처럼 느껴지는 현상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재난들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이렇게나마 살아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지난 2년 간 함께 팬데믹이라는 재난을 겪으면서 더 자주 주변을 돌아보고 서로의 안녕을 확인해 왔을지 자문하게 된다. 유대감 또한 더 강해졌을까? 내가 혼자서 이길 수 없는 것은 함께 이겨나가면 된다. 그렇게 되길 바래본다.

※관련기사
Drury, J., Cocking, C., & Reicher, S. (2009). The nature of collective resilience: Survivor reactions to the 2005 London bombings. International Journal of Mass Emergencies and Disasters, 27(1), 66-95.

※필자소개
박진영 《나, 지금 이대로 괜찮은 사람》,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나에게》를 썼다. 삶에 도움이 되는 심리학 연구를 알기 쉽고 공감 가도록 풀어낸 책을 통해 독자와 꾸준히 소통하고 있다. 온라인에서 '지뇽뇽'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미국 듀크대에서 사회심리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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