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으뜸 '전통 한지'의 우수성

전통 속에 살아  쉬는 첨단 과학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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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는 언어와 기억을 저장할 수 있는 매개체로 인간이 만들어 낸 문화와 역사를 연결해 주는 최고의 수단이다.

문자의 발명과 종이의 탄생은 학문 발전과 지식 전달 수단으로 인류에게 문명의 진보를 이루게 해 준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 줌으로써 인류의 문화 발달과 문화 형성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그 중에서 오랫동안 변하지 않고 보존이 쉬운 질 좋은 종이를 만들기 위한 노력은 문자의 발명 이후 전 세계적으로 계속되어 온 국가적 사업이었다. 세계적으로 우수한 우리 고유의 한지 또한 이러한 과정을 통해 끊임없는 노력과 시행착오를 거쳐 완성되었던 것이다.

우리 선조들은 중국으로부터 종이 제작 기술을 받아들였지만, 중국이 종이 재료(紙料)로 마(麻), 죽순(竹筍) 등을 사용한 것과는 달리 우리 선조들은 리그닌(Lignin)과 홀로 셀룰로오스(holo-cellulose) 성분이 이상적으로 함유되어 있는 닥나무(Broussonetia kazinoki)를 사용하였다. 여기에 천연 재료인 잿물과 닥풀(황촉규) 등을 사용하여 세계에서 가장 우수하고 천년 이상 오래가는 중성지인 한지를 만들었다.

닥나무 껍질

또한 한지를 만드는데 필수적인 도구를 개발하였는 데 바로 '한지발'이다. 한지발은 한지 제작 과정에 있어서 종이의 분산을 막아 주고, 섬유 조직의 좌우 교차 배열에 따른 질 좋은 한지를 만들어 주는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도구이다. 이와 같은 도구의 개발은 우리 겨레의 창의적인 과학 슬기와 세밀한 과학 기술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러한 고유 한지의 우수성은 경주 불국사 석가탑에서 두루마리로 발견된 세계 최고의 목판인쇄물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이 인쇄물의 지질은 닥종이로 자그마치 1,300년 남짓 그 형체를 오롯이 유지하고 있다.

우리의 전통 한지는 질이 좋아 예로부터 국내외에 이름이 높았다. 중국 기록인 『계림지(鷄林志)』, 『고려도경(高麗圖經)』, 『고반여사(考槃餘事)』 등에 고려지(高麗紙)의 우수성을 예찬하는 기록이 많이 있다. 이 중 『고반여사』의 기록을 보면 '고려지는 누에고치로 만들어서 비단같이 희고 질기며, 글을 쓰면 먹이 잘 먹어 좋은데, 이것은 중국에 없는 것으로 진품이다.'라고 기술한 대목에서, 종이는 중국 한나라의 채륜이 발명했으나 새로운 기술의 적용으로 명품 종이를 개발한 것은 우리 민족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우리의 한지를 세계적인 명품으로 만든 것은 바로 닥나무라는 재료의 사용이었다. 조선 시대 이규경(李圭景)이 지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고려의 종이는 천하에 이름을 떨쳤는데, 그것은 다른 원료를 쓰지 않고 닥나무만을 썼기 때문이다. 그 종이가 매우 부드럽고 질기며 두꺼워서 중국 사람들은 고치종이라고도 했다.'라는 기록이 있어 질이 좋은 닥나무의 사용으로 인한 한지의 우수성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이처럼 아름답고 우수한 고유 한지에 담긴 선조들의 과학 슬기와 지혜는 우리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것으로, 한지 뜨기 과정과 천연 재료의 특성 활용, 그리고 마무리 기술 등 과학적인 제조 과정에서 찾아볼 수 있다.

먼저 한지 뜨기 과정 속의 과학 슬기를 보자.

한지발 틀에 발[簾]을 얹어 종이를 뜨는데, 앞 물을 떠서 뒤로 버리는 앞물질과 좌우에서 물을 떠서 옆으로 버리는 옆물질을 하여 섬유질이 고른 종이가 되도록 한다. 이렇게 앞물질과 옆물질을 한 까닭에 섬유 조직의 배열이 위아래, 옆으로 얼기설기 90°로 교차되어, 종이를 옆으로 찢었을 때 견디는 힘인 인열 강도와 종이를 위아래로 잡아당겼을 때 버티는 힘인 인장 강도를 높이게 된다. 양지는 물론 중국, 일본 등 다른 나라의 종이에 비해 우리 한지가 질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러한 섬유 조직을 현대 과학 기기를 이용하여 살펴보면 뚜렷이 알 수 있다. 실체 현미경을 통해 한지와 중국(선지) 및 일본(화지) 종이, 이집트 파피루스 등 각국의 고유 종이를 비교·분석해 보면 그 차이는 확연히 드러난다. 현미경을 통해 분석한 조직을 마이크로 카메라를 통하여 확대하여 그 차이를 소형 모니터로 관찰하면 다음과 같이 비교된다. 우리의 한지는 섬유 조직이 한자의 정(井)자와 같은 배열 모습을 볼 수 있는 반면, 중국 선지와 일본 화지의 섬유 배열은 거의 한 방향으로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집트 파피루스가 종이가 아닌 식물 섬유를 다듬어 사용했음도 알 수 있다.(아래 사진 참조)

고유 한지 섬유 조직 모습
일본 화지 섬유 조직 모습
중국 선지 섬유 조직 모습
이집트 파피루스 섬유 조직 모습

또한 실체 현미경 분석, 섬유 조직의 색반응과 주사 전자 현미경(SEM) 분석을 통해서도 한지의 섬유 조직이 서로 교차하는 한자의 우물 정(井)자와 같은 배열 모습을 하고 있음을 관찰할 수 있다.(아래 사진 참조) 이러한 실체 현미경과 색반응으로 순수한 닥나무인지 아니면 비목질계 다른 섬유가 섞였는지 등 섬유 조직의 구성을 알 수 있으며, 섬유의 길이 측정과 두께 등을 계측할 수 있다.

우리 한지 (실체 현미경×140)
우리 한지 (색 반응×500)
19세기 한지 표면의 실체 현미경(90X) 사진
16c 한지 표면의 SEM 100X

둘째, 재료의 특성을 최대한 활용하였다. 선조들은 한지 재료의 성질을 잘 파악하여 닥나무에 리그닌, 펜토신과 홀로 셀룰로오스 성분이 이상적으로 함유되어 있는 시기인 가을에 채취하였다. 이 닥나무를 알칼리성의 전통 잿물로 삶아 일광 표백하고, 천연 닥풀을 접착제로 사용하여 한지를 만들어서 천년이 지나도 열화되지 않는 중성지가 탄생한 것이다.

잿물로 닥나무 껍질인 백피를 삶으면 불순물이 제거되어 순수한 식물 섬유를 얻을 수 있다. 잿물의 주성분은 산화칼륨(K2O)으로 이 성분의 양에 따라 잿물의 염기도가 증가한다. 이 밖에도 인(P2O5), 산화나트륨(Na2O) 및 산화칼슘(CaO)의 양이 많으면 약알칼리로 된다는 것이 분석 결과 나타났다.

잿물로 삶은 다음 씻기와 볕쬐기(일광 표백) 과정을 거치는데, 흐르는 물 속에서 햇빛의 작용으로 과산화수소와 오존이 발생되어 산화 표백되는 것이다. 날씨의 영향과 시간이 걸리는 단점이 있지만, 섬유가 손상되지 않는 장점이 있다. 닥풀은 pH(용액의 수소이온 농도를 나타내는 지수)가 7.0대로 중성을 띠며, 주성분이 당류이기 때문에 종이를 뜰 때 섬유 점착을 좋게 해 주어 종이의 강도를 증가시킨다. 또한 얇은 종이를 만드는데 유리하고, 겹쳐진 젖은 종이를 쉽게 떨어지도록 한다.

셋째, 마무리인 다듬이질(도침질)로 종이의 치밀성과 평활도(平滑度)를 높였다. 건조된 종이를 전통 방식으로 다듬이질을 하면, 종이 조직이 치밀해지고 평활도가 향상되어 윤이 나며, 촉감이 부드러워지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이러한 마무리 기술을 통해 질 좋은 한지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도침 기술로 한지의 강도에 큰 변화를 주는데, 특히 종이의 강도는 종이의 가공 공정에 따라 가해지는 힘에 얼마나 견딜 수 있는지를 나타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성질 가운데 하나이다. 도침을 하지 않은 종이보다 도침을 한 종이의 밀도(g/cm3), 즉 도침 전의 종이와 도침 후의 종이 밀도를 알기 위해 보통 실시하는 두께 파열 강도 측정에서도 변화가 나타나는데, 도침 전 종이보다 도침 후 종이의 파열 지수가 20% 높아지는 것으로 계측된다. 이것은 도침에 의한 섬유 간 결합력 증가에 의한 것으로 여겨진다.

인열 강도 역시 도침에 의해 30%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섬유 간 결합력 증가와 도침으로 인한 섬유 손상의 최소화에 기인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는 달리 우리가 일반적으로 쓰고 있는 종이는 로진사이즈 처리와 황산알루미늄의 사용으로 강한 산성(pH 4~5.5)을 띠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세월이 지남에 따라 서서히 산가수분해로 종이가 열화되어 100여 년 정도 지나면 사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분해되고 만다. 또한 펄프를 섞은 한지는 표백용으로 첨가되는 수산화나트륨과 차아염소산으로 인하여 산성을 띠게 되고, 표백 과정 중에 종이의 섬유 조직이 상하게 되어 보존성이 떨어지게 된다. 이러한 제조 과정의 차이로 우리 고유 한지는 천년이 지나도 종이가 보존되는 반면 펄프 종이는 오랜 보존이 불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과학 슬기가 듬뿍 담긴 한지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여 현대 첨단 과학과 접목한다면, 항균 기능이 뛰어나고 아토피 질환을 억제하는 한지사(韓紙絲)의 개발, 웰빙 섬유 한지로 만든 로하스의 의류 개발, 질과 기능성을 높인 웰빙 도배지 개발, 로봇과 반도체 등 첨단 소재를 개발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기계적으로도 흡음성과 밀도가 뛰어난 한지의 특성을 활용하면 스피커의 음향 판이나 밀폐용 개스킷 등 첨단 소재 개발도 가능할 것이다.

또한 한지의 질과 더불어 웰빙과 직결된 기능성을 부각시켜 고부가 가치 명품을 위한 원천 기술을 개발함과 동시에 대량 생산을 위한 기술 개발과 수출 전략에 힘쓴다면, 한국을 대표하는 한(韓)브랜드로서 세계의 명품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세계 문화와 소통하는 한국 문화의 새로운 문예 부흥 시대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전통 한지의 제조 과정

① 닥 채취하기 → ② 닥 찌기 → ③ 껍질 벗기기 → ④ 물에 담그기 → ⑤ 잿물에 삶기 → ⑥ 씻기와 표백 → ⑦ 두드리기(고해) → ⑧ 해리1) → ⑨ 종이뜨기 → ⑩ 물빼기 → ⑪ 말리기 → ⑫ 다듬기(도침) → ⑬ 다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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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과학 이야기! 『전통 속에 살아 숨 쉬는 첨단 과학 이야기』는 그동...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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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윤용현은 충북대학교 역사교육과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대학원 문화재학과 박사 과정을 수료하였으며, 전통 속에 살아 숨 쉬는 우리 고유의 전통 과학 기술을 현대에 되살리기 위해 매진하고 있습니다. 한국과학창의재단 과학기술 앰배서더, 충북대학교와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강사, 국가기록원 기록보존기술 R&D사업위원회 위원, 충북 문화재전문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국립중앙과학관 학예연구관으로 재직 중입니다. 주요 저서로『문화재 복원 제작 기술』,『겨레 과학인 우리 공예Ⅰ~Ⅲ』,『겨레 과학의 발자취Ⅱ』,『겨레 과학 기술 조사 연구Ⅱ~ⅩⅤ』,『교과서에 나오는 옛멋 전통 과학 ‘칼과 화살’』,『교과서에 나오는 옛멋 전통 과학 ‘어야디야 방아를 찧어라’』,『과학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인물 ‘장영실, 최무선’』,『우리의 선사 문화Ⅰ~Ⅲ』,『한국 문화와 주변 문화』,『녹색 과학 지식을 위한 교육 교재』,『규남 하백원의 실학사상 연구』,『갑인자와 한글 활자』, 『고려 금속 활자 조사 연구』등 여러 권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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