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9개월 이상 이어진 장기 프로젝트가 갑자기 끝나버렸다. 지난 11일 코로나19 확진자 폭증 여파로 공연이 잠시 중단되는가 싶더니, 며칠씩 공연 취소가 거듭되다 결국 27일 예정이던 막공까지 못 올리게 됐다. 신유청, 정경호와의 만남은 다소 힘 빠진 상황에서 진행됐다. 아직 마지막 2회차 공연의 희망이 살아있던 20일,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 속이지만 그래도 희망을 이야기하자”며 만났다. 그것이 ‘엔젤스’의 메시지이기도 하니까.
‘20세기 고전’ 국내에 첫선 보여
중앙대 연극영화학과 선후배 사이인 두 사람은 20년지기 절친이지만 프로 대 프로로 만난 건 처음이다. ‘엔젤스’가 두 사람에게 더욱 각별했던 이유다. “작품이 아니라 형 때문에 하게 된 거죠. 개인적으로 변화가 필요한 시기였는데, 이렇게 어려운 작업을 형과 같이 할 수 있어서 너무 의미 있었어요. 9개월 동안 힘든게 아니라 정말 재밌게 논 것 같아요. 남들은 지금 왜 연극이냐고 묻지만, 제 스스로 이런 걸 원했던 거죠.”(정) “엔젤스 대본을 봤을 때 경호가 딱 떠올랐어요. 늘 연극을 같이 하고 싶으면서도 다른 장르에 잘 있는 경호에게 누가 안됐으면 했는데, 작품도 너무 충만했고 같이 해준 사람들도 ‘식구’라고 할 정도로 되게 좋은 그림이 돼서 다행입니다. 앞으로 배우로서의 방향성에도 가치있는 경험이 됐으면 싶어요.”(신)
두 남자는 몹시 사랑하는 사이 같았다. 공연으로는 20년 만에 만났지만, 같이 살다시피 하며 연극을 하던 20대 대학시절이 어제인 양 추억을 방울방울 터뜨리며 깨를 볶았다. “그때 학교 캠퍼스가 되게 즐거웠어요. 02학번인 경호네가 들어오자마자 금세 친해져서 참 행복한 4월이었죠. 시키지도 않은 연극 만들어서 학교 곳곳에서 공연하고 주차장에서 족구하고 밤에는 안성왕족발 시켜 먹던 시절인데, 경호를 생각하면 그냥 뛰어다니고 놀고 소리치던 기억만 나네요.”(신) “그때도 형은 남달랐죠. 정말로 연극을 사랑하는 사람 같았어요. 1학년 때 처음 한 연극 ‘소나기’가 아직도 생생해요. 저는 주인공 소년이 아니라 우산장수 역할을 맡았는데, 비를 어떻게 내리게 할까 형이랑 밤새워 고민했었죠.”(정) “야외무대에서 비를 내리게 하는 미션이었어요. 경호가 오프닝을 열면서 관객에게 우산도 파는 중요한 역할인데, 무대로 쓴 큰 소나무 주변에만 예쁘게 비를 내리게 하는 게 쉽지 않더군요. 경호가 다른 친구 하나와 해보겠다고 밤 10시에 구호 외치고 시작해서 다음날 아침 10시까지 설치를 하고 마침내 펌프기를 돌리던 장면을 잊지 못해요. 해내고 나선 바위 위에 빨래처럼 축 늘어지더군요.(웃음) 작은 부분이지만, 한 공연에서 목표했던 걸 이뤄낸 첫 순간이었어요.”(신) “그거 하는데 12시간이 걸렸네요. 어리고 방법은 모르고 기술도 없으니, 뭘 해도 오래 걸리던 시절이었죠.(웃음)”(정)
깨알같이 적은 대본 노트에 놀라
“미국사회 인종과 종교의 다양성 같은 문제가 어렵지만, 잘 통과해야 그 안에 보편적인 빛을 만날 수 있어요. 미국에 대해 잘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쿠쉬너는 의도적으로 그런 생각을 무너뜨리거든요. 무너짐이 쌓이고 쌓여 지붕까지 무너지면서 천사를 만나게 하는데, 오히려 그 순간엔 지식이 방해가 되죠. 진리라는 건 지식으로 만나는 게 아니라 그게 다 무너지고 나서 순수한 지각으로 꿰뚫어보는 거잖아요. 생각지도 못하게 그런 시각을 갖게 만들어주는 작품이라 위대한 것 같아요.”(신)
에이즈가 창궐하던 작품 속 배경은 코로나19 시대를 사는 우리의 현실과 평행우주처럼 보이기도 한다. 천사와의 씨름 끝에 당당히 에이즈를 극복하고 살아남은 프라이어가 이 시대에 가리키고 있는 진리는 뭘까. “사람들은 전염병이 신의 단죄인 것처럼 말들 하지만, 쿠쉬너는 우리 모두가 율법 아래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인간일 뿐이라고 얘기하고 있어요. 에필로그에 ‘밀레니엄이 오면 우리 모두가 베데스다에서 씻김을 받을 것’이란 대사도 있는데, 거기 모인 네 사람이 너무 다르잖아요. 여전히 혼란스러운 세상이지만, 이렇게 서로 다른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아파하는 사람들에게 관심 가지며 하나가 돼서 버티고 있는 모습이 울림을 주는 것 같아요. 그게 이 시대를 이겨나기 위한 인간들의 태도 아닐까요.”(신)
하지만 연극은 힘이 없다. 9개월이라는 긴 여정 끝에서 한두 명의 ‘확진’ 앞에 무릎꿇게 된 이 무대가 정말 희망을 말하고 있는 게 맞을까. “코로나가 끝나야죠.(웃음) 극장이라는 모임의 공간에 힘이 있다고 말하고 싶어요. 살면서 아주 중요하지만 바쁘기 때문에 놓치고 가는 가르침들이 극장에서 다 일어나죠. 춤추고 노래하는 뮤지컬 같은 장르를 보는 것도 결국 거기서 삶을 배우고 치유 받으려는 것이고, 그런 게 이뤄지는 게 극장이잖아요. 지금은 힘을 잃은 것처럼 보일지언정 쉽게 사라지지 않을거라 생각해요.”(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