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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4장. 미스터H (2-2/5)...강태우 사장의 피살

4장. 미스터H (2-2/5)...강태우 사장의 피살2018.02.25.

분당선 오리역에서 내린 주승우와 이테라는 곧바로 인근 3180번 버스 종점으로 향했다. 차고지는 탄천과 하나로마트 사이에 걸쳐있는 제법 큰 규모였다. 시계 바늘은 저녁 8시45분을 향하고 있었다. 오리역 주변의 번화가에서 떨어진 이면 도로쪽이어서 쇼핑몰과 오피스텔 등에서 나오는 불빛에도 불구하고 주변 분위기는 제법 을씨년스러웠다. 더위에 지친 낙엽이 늦여름 후텁지근한 바람에 무겁게 날린다. 종점 맞은 편에 커다란 과일이라. 주승우는 강태우 사장과의 통화를 되세겼다. 세상에서 제일 큰 사과네요. 후훗. 이테라가 맞은 편 쇼핑몰 네온사인을 가르킨다. 쇼핑몰 이름은 애플 프라자였다. 쇼핑몰은 8층짜리 두 개의 건물로 이뤄진 제법 큰 규모였다. 강태우 사장은 이 곳 어딘가에 맏형 배꼽 모양을 한 동상이 있다고 했다. 저 곳 어딘가에 라이온 형상의 동상이 있을꺼에요. 사자 모양의 동상요? 네. 그랜드세이코는 시계 뒷면에 금으로 된 메달을 붙입니다. 초기엔 시계의 왕이란 의미로 사자 모양의 앰블럼을 붙였어요. 나중엔 이니셜인 GS로 바뀌었구요. 그 것을 배꼽이라고 부릅니다. 동상이면 보통 입구나 광장에 있을꺼에요 건물 사이의 공간이 광장인 듯 해요. 2차선 도로를 가로질러 오른쪽으로 돌면 바로 보일 거리였다. 주승우와 이테라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같은 곳을 향했다. 강태우 사장과 약속한 시간과는 10여분 정도 여유가 있었다. 왠지 으스스하군요. 짐작대로라면 모퉁이를 돌아섰을 때 사자상이 보여야 한다. 폐장 시간이 지났다고는 하지만 주변은 쇼핑몰 광장치고는 어두웠다. 광장으로 이어지는 데크가 두 사람의 걸음에 맞춰 삐그덕 소리를 낸다. 왠지 인기척을 내면 안될 것 같은 이유 모를 불안감. 1년 전 소공동 웨스틴조선 호텔 1층 나인스게이트 레스토랑. 창밖엔 파란 가을하늘이 황궁우 팔각 기와지붕을 타고 흘러내린다. 황궁우를 에워싼 소나무와 앞뜰을 뒤덮은 잔디가 쏟아지는 하늘에 놀라 옥빛을 뿜는다. 잠자리 날개짓 사이로 창가 테이블이 클로즈업된다. 마주 보는 선남선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이다. 주변에 앉은 둘의 가족들. 여자의 어머니로 보이는 중년 여성이 시계를 본다. 여자의 아버지가 상견례 자리에 늦은 듯 하다. 그 순간. 1층 회전문을 급하게 통과하는 한 중년 신사. 강태우 서울교통공사 사장이다. 강태우 사장님이시죠? 걸음을 막아서는 건장한 사내. 왼쪽 눈섭에서 광대뼈까지 가로지르는 칼 자국이 선명하다. 누런색 황금니가 회전문을 뚫고 들어오는 가을 햇살에 번쩍인다. 누구신지. 시계를 보는 강태우 사장. 차지창이라고 하오. 잠깐 같이 가주셔야겠습니다. 그의 옆에 있던 덩치 두명이 강태우 사장의 양쪽 팔을 잡는다. 이거 왜 이러시오. 5분이면 됩니다. 모셔. 차지창의 지시에 두명의 덩치가 강태우 사장을 엘리베이터로 끌고 간다. 속수무책의 강태우 사장. 잠시후. 강태우 사장은 조선호텔 20층의 한 객실에서 장경주 검사를 마주하고 있다. 테이블 위에 노란 서류봉투를 올리는 장경주. 이 게 뭐요? 보시면 아실꺼에요. 몸을 뒤로 젖힌 채 강태우 사장을 깔아보는 장경주. 입꼬리가 강태우 사장을 비웃는다. 서류봉투를 열어본 강태우 사장. 몇장의 사진을 차례대로 훑어본다. 중년부부와 아들로 보이는 남자. 누가봐도 행복한 세 가족이다. 중년의 남자는 바로 강태우 사장 자신이다. 당신 대체 누구요? 떨리는 강태우 사장의 손. 그 진동 때문인지 목소리도 떨린다.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가 더 중요할 꺼에요. 강 사장님. 오만가지 생각에 넋이 빠진 강태우 사장. 노려보는 장경주. 발톱에 걸린 먹잇감이다. 어차피 끊어질 숨통. 서둘러 목을 물어뜯을 이유가 없다. 내게 사진을 보여줄 때는 거래를 하자는 게 아니오? 고지식하기로 유명한 강태우 사장의 입에서 거래란 말이 나왔다. 덕망있는 공기업 사장님이 어쩌다 두집 살림을. 쯧쯧. 세상이 이런 것을 좀 알아야 해요. 강태우의 두 얼굴 말이에요. 내게 뭘 어쩌란 것이오. 원하는 것을 말하라지 않았습니까. 당신의 복종. 장경주의 송곳니가 강태우 사장의 숨통에 박힌다. 헉. 앞으로 우리의 개가 되란 말이야. 짖으라면 짖고 물라면 물고, 기라면 기는. 숨을 쉬어도 숨이 막힌다. 눈을 떴는데 앞이 보이지 않는다. 털썩. 강 사장은 장경주의 앞에서 주저 앉았다. 만 57년의 세월이 그렇게 무너졌다. 주승우와 이테라는 모퉁이를 돌았다. 삐그덕 거리는 데크 소리가 주승우는 계속 거슬렸다. 40~50m 정도 거리 광장 한복판에 사자상이 보인다. 조명을 받은 사장의 얼굴은 호러 영화에 나오는 마스크처럼 괴기스럽다. 사자상 앞 벤치에 앉아 있는 중년 남자. 강태우 사장이다. 두 사람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위아래 검은 옷을 입은 한 사내가 강 사장에게 다가온다. 담뱃불을 빌리는 것 같다. 담배에 불을 붙인 사내가 두 사람과는 반대편으로 멀어진다. 광장에 비친 조명의 밖으로 그가 사라질 때 쯤 두 사람은 벤치에 다다랐다. 강태우 사장이신가요? 사자의 두 눈이 주승우를 노려본다. 말 없는 중년 남자. 강태우 사장... 주승우가 다시 한번 확인을 하는 중년 남자가 옆으로 쓰러진다. 복부에 꽂힌 칼날이 조명을 받아 번뜩인다. 검붉은 피가 벤치 사이로 뚝뚝 떨어진다. 예상치 않은 사태가 훅하고 두 사람의 뇌리에 들어왔다. 재빨리 강 사장의 맥을 확인하는 이테라. 가느다란 호흡이 느껴진다. 119에 전화하세요. 빨리. 이테라는 주승우에게 강 사장을 맡기고 사라진 남자 쪽으로 내달린다. 40여분 뒤 분당 서울대 병원 응급실. 119 구급차 도착 직후 강태우 사장은 응급실에서 마지막 숨을 몰아쉬었다. 당직 의사의 사망선고 뒤 와이프와 딸이 응급실에 도착했다. 강태우 사장의 창백한 얼굴을 본 미망인은 남편의 죽음을 실감하지 못한다.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아버지의 복부에 꽂힌 칼을보고 옆에섰던 딸이 오열한다. 이테라가 쫒아갔을 때 강태우 사장을 찌른 사내는 이미 어둠속으로 사라진 뒤였다. 쇼핑몰 광장의 곳곳에 CCTV 있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강태우 사장의 전화 목소리는 어쩌면 사건의 전조였다. CCTV의 존재를 알고도 그랬다면 그만큼 다급했다는 방증이다. 강태우 사장이 주승우를 만나 전달하려던 그 무엇. 그 것이 장중경 일당에게 그만큼 큰 위협이 된다는 의미다. 여보세요? 이테라는 쇼핑몰 주변의 CCTV 분석을 경찰청 CLUE에 의뢰해 놓은 상태였다. 주승우의 레지던스를 침입한 괴한을 조사할 당시 분석한 데이터와 연관이 있을 것이란 게 이테라의 판단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예감은 적중했다. 결과가 나왔나요? 주승우의 생각도 이테라와 같았다. 네. 짐작 대로에요. 범인은 차지창의 아들 지수였다. 결국 장중경 일당의 손에 강태우 사장이 죽임을 당한 것이다. 지수의 노출은 장중경 쪽의 결정적 실수였다. 이날 아침. 차이나 게이트를 처음 폭로한 주승우의 기사가 나간 직후 서울 가회동 시장 공관 2층 집무실. 평소 7시면 출근 길에 나서는 박 시장. 이 날은 몸살기로 한 시간 가량 늦게 현관문을 나서다 김현승 대변인의 보고를 받고 신발을 벗었다. 시청 청사 6층 시장실 앞은 이미 2진 기자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집무 책상에 앉아 정원을 내려다 보던 박 시장이 눈을 지긋이 감는다. 박 시장은 강태우 교통공사 사장을 긴급 호출해 놓은 상태다. 1조원 규모의 중국산 지하철 수입 과정에서 페이퍼 컴퍼니와 이면계약이 실재 존재하는 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온라인으로 기사를 확인하고 청사로 향하던 강 사장은 차머리를 가회동으로 돌렸다. 30분쯤 후 강 사장은 시장 공관 현관의 화강암 계단을 오르고 있다. 발걸음이 무거워 화강암 돌계단을 누르는 소리가 2층 박 시장의 귀에까지 들린다. 시장 부인이 다과상을 놓고 나간 한참 후에도 박 시장과 강 사장은 찻잔을 들지 않았다. 두 사람의 사이엔 한동안 어떤 소리도 끼어들지 않았다. 가을의 문턱에서 흐려진 정원의 녹음이 집무실 통유리를 지나 찻잔속에 잠긴다. 연녹색 녹차의 향기만 둘 사이를 가른다. 침묵은 사실이란 의미겠지요? 녹차 향을 흩어버린 건 박 시장의 음성이다. 고개를 떨군 강 사장은 여전히 말이 없다. 찻잔을 든다. 차를 한 잔 마신다. 그렇게라도 입을 떼려 한다. 하지만 입밖으로 어떤 말도 내보낼 수가 없다. 다시 고개를 떨군다. 강 사장같은 사람이 왜 내게. 어쩌다 그렇게... 못난 놈에게 혼외자가 있습니다. 한참의 침묵이 더 지나가고 그렇게 강 사장은 말을 뗐다. 풍전등화의 위기 상황에서 나온 혼외자 얘기에 박 시장은 울컥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일단 가슴을 쓸어 담았다. 지난 10년간 봐온 강 사장은 누군가를 쉽게 배신할 사람은 아니었다. 이번엔 박 시장이 찻잔을 들었다. 박 시장은 그렇게 자신의 입밖으로 나올 실수를 눌렀다. 가난한 고시생에게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검사가 되고 결혼까지 생각을 했었습니다. 이미 아들까지 있었습니다. 어렵게 입을 뗀 강 사장은 모든 것을 내려놓기로 했다. 재벌집 사위로 자신을 만났으니 스토리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박 시장은 또 한번 화가 치밀었다. 그래서요. 다시 찻잔을 잡았다. 신문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검사가 되고 나니 재벌이 손을 내밀었습니다.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습니다. 7명 동생들이 저만 바라고보 있을 때였으니까요. 결국 영혼을 팔았습니다. 그렇게 여자와 혈육을 버렸습니다. 막장 스토리다. 10년 전 국내 최대 유기농 전문 식품회사인 청원의 최고경영자로 박 시장은 강 사장을 처음 만났다. 검찰 재임 시절 대구지검 근무 이력이란 공통점이 두 사람을 잇는 끈이 됐다. 창녕 고향 후배란 점이 인연의 접착력을 높인 것도 사실이다. 강 사장 초임 검사 시절인 80년대 후반은 정권 차원에서 범죄와의 전쟁이 한창인 때였다. 대구는 물론 경북지역 전체를 장악하고 있던 북두파를 소탕하면서 강 사장은 일약 유명인사로 떠올랐다. 유명세는 가난했던 한 청년 검사를 재벌가의 사위로 만들었다. 청원의 설립자인 고 최제경 회장은 개성 출신으로 1.4후퇴 때 피난길에 올라 불혹의 나이 양평에 터를 잡았다. 이북 출신 피난민들을 규합해 당시 최 회장이 만든 농장의 이름이 바로 청원농장이다. 흥부마냥 줄줄이 10명의 자식을 둔 최 회장은 청원농장이 문을 연 1년 뒤 불혹이 넘은 나이에 늦둥이로 막내딸을 얻었다. 그렇게 얻은 딸이 훗날 결혼을 하면서 최 회장은 유명 청년 검사를 사위로 맞았다. 청년 강태우의 됨됨이를 지켜본 최 회장은 딸이 백년가약을 맺고 2년 뒤 청원의 사장실 자리를 사위에게 내줬다. 6명의 아들들의 강력한 반대속에서도 최 회장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농장 설립초기부터 묵묵히 농사일을 도와온 아들들이었지만 단지 혈육이란 이유로 피땀흘려 키운 청원을 맡길 수는 없었다. 법복을 벗은 강 사장은 20여년 만에 청원을 연매출 2조원대의 탄탄한 중견기업으로 키웠다. 2013년 최 회장이 10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 냉정한 현실이 강 사장의 눈 앞에 머리를 내밀었다. 최 회장은 청원의 지분을 11명의 자식과 그동안 경영을 맡아온 강 사장에게 12등분해 똑같이 상속했다. 여섯 형제가 규합해 강 사장을 경영권에서 밀어낼 것이라고는 최 회장도 미처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다. 경영권을 둘러싼 법정 공방은 2년 동안 지리하게 이어졌고 청춘을 송두리 째 바친 회사에서 강 사장은 그렇게 쫒겨나듯 나왔다. 그 손을 잡은 게 박 시장이었다. 박 시장은 2015년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 이후 지하철 안전사고가 잇따르자 경영쇄신이 필요하다고 보고 강 사장을 영입했다. 직원수 1만5천명의 공기업 사장으로 재기한 강 사장에게 숨겨놓은 아들이 있다는 건 언제 터질 지 모를 폭탄 같은 것이었다.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재벌가의 손길을 뿌리치지 못했지만 강 사장은 훗날 분당 모처에 아파트 한채를 장만해 첫사랑과 아들을 들였다. 폭탄의 안전핀을 장중경이 잡게 된 건 우연이 아니었다. 중국산 지하철 수입을 위해 박원순 시장을 속여야 했던 장중경은 강태우 사장의 아킬레스건을 찾았다. 장중경의 하수인 차지창이 강 사장의 목 줄을 틀어쥐는 데는 그리 오랜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자초지종을 들은 박원순 시장은 식어버린 찻잔을 내려놓았다. 강태우 사장의 눈시울은 더운 눈물에 젖어 있었다. 손수건을 꺼내 강 사장의 손에 쥐어주었다. 죄송합니다. 참회의 눈물은 언제나 한발 늦는 법이다. 박 시장은 입술을 깨물었다. 강 사장의 입장이라면 자신은 어떻게 했을 지 생각했다. 가정은 의미없는 것이었다. 호시탐탐 자신을 물어뜯을 궁리만하던 정적들이 자신이 공관밖을 나서기만을 기다리는 게 눈앞의 현실이었다. 동료애로 감싸고 가기엔 사안의 무게가 너무 컸다. 모든 진실을 말하겠습니다. 시장님은 아무 죄가 없다는 것을 제가 밝힐 것입니다. 처음엔 딸을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라고 강 사장은 생각했다. 자신의 두집살림이 알려지면 딸의 결혼이 깨질 것이란 사실이 장중경의 손을 잡은 이유라고 자위했다. 하지만 벼랑끝에 서고 보니 그동안의 선택은 모두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검사가 되기까지 자신을 위해 헌신했던 첫사랑과 아들을 버린 것도,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해 장중경의 개 노릇을 해 온 것도 결국엔 이기심 때문이었다. 동생과 딸을 위한 것이란 생각은 미명에 불과했다. 박원순 시장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강 사장의 뒤 늦은 선택이 현실적으로 지금의 상황을 돌파하는 데 도움이 될 지가 관건이었다. 강 사장의 증언으로는 부족하다. 사람들은 쉽게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사건이 터지면 꼬리를 잘라낸 몸통은 조작된 진실의 그늘로 숨는 게 다반사니까. 자신은 게이트의 주인공이자 혼자 살기 위해 꼬리를 잘라낸 몸통으로 남게될 가능성이 컸다. 녹취록이 있습니다. 강 사장의 말에 박 시장은 감았던 눈을 떴다. 녹취록이라구요? 이번 사건이 시장님과는 무관하다는, 장중경 부자가 모의한 것이란 증거가 될 음성파일을 갖고 있습니다. 그 것이 세상에 공개되면 시장님은 무사하실 수 있을 겁니다. 눈앞에 끼었던 자욱한 안개가 일시에 걷히는 것 같았다. 강 사장의 비장한 얼굴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이제 그 파일을 언제 어떻게 공개할 지만 결정하면 되는 것이다. 위기가 고개를 숙이자 기회가 미소를 보냈다. 주승우의 기사가 나가고 박 시장이 강 사장과 대면하는 사이 유력 언론들의 잇따라 차이나 게이트 의혹에 대한 보도를 쏟아냈다. 그리고 잠시후 박 시장은 고개 숙인 강 사장의 앞에서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연다는 김현승 대변인의 보고 전화를 받았다. 당장 녹취파일을 언론에 공개하겠습니다. 다급한 김 대변인의 목소리는 마주 앉은 강 사장의 귀에까지 선명하게 들렸다. 서두르실 것 없습니다. 박 시장의 시선은 통유리 너머에 닿아 있었다. 잠자리들의 날개짓에, 새들의 지저귐에 진실이 변하지는 않을테니까요. 극적인 반전. 박 시장은 방아쇠를 언제 당겨야 할 지를 감각적으로 알고 있었다. 박원순 시장이 강태우사장을 만나고 있을 시간 한남동 유엔빌리지 내 장중경 의원의 저택으로는 아들 장경주 검사와 금성PSD 차지창 사장의 EQ900 세단이 미끌어져 들어왔다. 주차장에서 안채로 들어가는 정원은 일류 골프장 그린보다 매끄럽게 다음어진 잔디가 양탄자처럼 깔려 있다. 윤기가 흐르는 적송들의 하늘을 찌를 듯한 도열. 장중경의 위세를 상징하는 듯 하다. 들어가는 이들은 장중경과 대면하기도 전에 저택의 무게에 짓눌려버리기 십상일 것 같은 분위기다. 장중경의 시선은 창 밖의 한강물을 따라 흐른다. 70을 훌쩍 넘은 나이지만 다부진 채격과 날카로운 눈매에선 선이 살아 꿈틀댄다. 정도한 이 개새끼. 그러니까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니까. 현관을 들어서는 장경주. 신을 채 벗기도 전에 정도한에 대한 저주를 쏟아낸다. 쯧쯧. 집안 단속도 제대로 못한 놈이 누구 탓을 하는 게냐. 돌아서서 소파에 앉는 장중경. 뒷짐진 손에 쥐고 있던 부챗살을 편다. 맹호도의 매서운 눈이 장경주를 노려본다. 아버지 걱정 마세요. 제 선에서 해결할께요. 건방진 놈. 네깟놈이 뭘 어쩌겠다는 거냐. 아들을 노려보는 장중경의 눈매가 맹호보다 날카롭다. 사람들은 박원순이 한 줄 알꺼 아니에요. 박원순이 청와대 열쇄에 눈이 멀어서 중국과 굴욕적인 경협을 했다고. 강태우는 박원순이 시키는 대로 한 꼭두각시고. 이런 그림으로 마무리를 해야죠. 어리석은 놈. 언론과 야당은 뒷짐만 지고 있다더냐. 곧 관련 보도들이 쏟아질 게다. 대한일보에서 이미 기사가 떴고. 홍준표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야. 결국 펜끝과 홍준표의 칼날이 우리쪽을 겨눌꺼야. 박원순이야 어차피 끝난 거고. 아버지. 나이 드시더니 겁이 많아지신 거 아니에요? 누가 봐도 박원순이죠. 우리야 개연성일 뿐이지 증거가 없으면 뭐로 엮을 꺼에요. 지창이가 내 친구라는 게 알려진다한 들 그게 뭐 어찠다는 거에요. 그냥 인사 청탁 정도로 마무리하면 된다구요. 회장님. 검사님 말씀이 맞습니다. 제 선에서 문을 닫을 것입니다. 그 무엇도 그 문턱을 넘지 못하게 할테니 염려 마십시오. 장경주 검사 옆에 앉은 차지창이 나섰다. 자신이 꼬리가 되겠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르라는 말이다. 이미 짜여진 각본이고 기다렸던 말이다. 스스로 그렇게 하겠다고 하니 모양새도 좋아졌다. 장중경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눈가에 패인 주름이 도드라진다. 강태우 쪽은 문제가 없는거냐. 차지창 쪽 문을 닫았으니 강태우쪽만 단속을 하면 되는 것이다. 그 작자는 걱정하지 마세요.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에요 뭘 어쩔 수 있는 놈도 아니고. 네 놈은 아직 사람 볼 줄 몰라. 그러니 정도한 같은 쥐새끼에게 당하지. 쯧쯧. 정도한 얘기가 나오자 장경주의 얼굴이 찌그러진다. 강태우가 우리에게 고개를 숙인 게 충성이 아니다. 약점 때문에 굴복한 것 뿐이지. 강태우는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차지창이다. 정도한은 처리한거냐. 네. 성매수 사건으로 내사 착수키셨으니 곧 옷벗을꺼에요. 이 장경주 눈에 난 이상 이 바닥에선 한동안 변호사 개업도 못할겁니다. 적당한 때 제거해 버려야죠. 지금은 보는 눈들이 있으니. 강태우는 지금 박원순을 만나고 있을겁니다. 기사가 나간뒤 곧바로 시청으로 간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박원순이 중간에 가회동 공관으로 부른 모양입니다. 그쪽으로 들어가는 거 확인했습니다. 차지창은 강태우 사장의 비서와 운전기사까지 오래전 매수했다. 박원순이 변수다. 뭘 어쩔 수 있겠습니까. 만만한 인사가 아니야. 제 손에 피 안묻힐 놈입니다. 박원순도 강태우 선에서 매듭지으려고할 꺼에요. 강태우가 박원순에게 입을 열꺼야. 그렇지 않으면 사안을 납득시킬 방법이 없을테니. 박원순도 이미 사실을 알고 있을꺼다. 박원순이 알고 모르고는 중요치 않아요. 어리석은 대중이 그 것을 진실로 받아들이느냐가 문제죠. 장경주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번진다. 박원순이 몰랐다면 개도 안믿을꺼에요. 알아도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구요. 확실하게 해둬라. 만사 확실한 게 좋다. 세월만한 선생이 있을까. 해방둥이로 태어나 대한민국 근대사와 함께 산전수전을 다 겪은 장중경이다. 장중경은 왠지 박원순과 강태우에게 계속 신경이 쓰였다. 삶의 7부 능선을 넘은 장중경에겐 장경주와 차지창에게는 없는 직감이란 게 있었다. 알았어요. 언론도 손을 쓸 때가 됐다. 우리쪽 매체는 내가 손을 써놓았지만 보수 매체들은 물만난 고기처럼 달려들께다. 초기 보도를 막기엔 이미 늦었고. 후속 보도는 막아야 한다. 대한일보 구악들 몇몇 까발리죠. 구린 데가 많아서 움찔 할 겁니다. 한 회장 일가들도 워낙 계집질을 좋아해서... 흐흐. 일단 운을 떼보아라. 네? 오너는 건드리지 말란 얘기다. 궁지에 몰리면 쥐도 고양이를 무는 법이다. 팔다리 몇개 자르고, 목에 칼을 들이 대는 선에서 각본을 짜보겠습니다. 언제든 벨 수 있다는 건 분명하게 보여줘야 한다. 안그러면 역공을 당할 수 있다. 전쟁은 피차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오태호 주필 파일부터 일단 공개하겠습니다. 이럴 때 쓰려고 아껴둔 거 아닙니까. 그렇다. 베트남 호화 섹스파티가 공개되면 대한일보도 한발 물러설 수 밖에 없을게야. 그래도 대한일보인데 순순히 포문을 닫지는 않을 겁니다. 임지연 자살사건도 먼지 더 쌓이기 전에 한번 더 우려먹어야죠. 그건 신중해야 한다. 상황을 봐서 다시 얘기하자. 주승우는 어떻게할꺼냐. 이제 손을 써야할 것 같습니다. 주승우가 온라인에서는 유명세가 있다지만 아직 오피니언 리더들에게는 마이너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대한일보가 주승우 기사를 앞으로 계속 받게 된다면 문제가 다릅니다. 지창이 지난번 데려온 아이 말이야. 장경주 쪽으로 숙였던 고개를 들어 장중경은 차지창에게 시선을 보낸다. 네. 회장님. 지수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 아이 이름이 지수였나? 네. 그 아이. 눈 빛 좋더구만.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지수를 언급한 건 사실상 살해 지시였다. 그래. 나무가 크면 뽑기가 어려운 법이야. 위험한 건 싹부터 잘라버려야 해. 네. 회장님. 받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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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주승우에게 녹취록을 전달하려던 강태우 사장은 주승우와 이테라가 보는 앞에서 지수에게 피살을 당하고. 차이나게이트를 처음 폭로한 주승우의 기사가 나간 직후 박원순 시장과 장중경 쪽에서는 저마다의 대책 마련에 분주했는데. 사건의 키를 쥐고 있던 강태우 사장에겐 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 이 소설은 2020년 미래의 이야기다. 따라서 모든 스토리는 허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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