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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호는 성산. 의료 활동과 사회 봉사 활동을 펼친 의사로 ‘한국의 슈바이처’라 불림. 1979년 막사이사이상 수상.

출생 - 사망 1911년 ~ 1995년

장기려는 어릴 때부터 의사의 꿈을 키웠다.

그래서 경성 의학 전문 학교를 졸업하고 평양 의과 대학과 김일성 종합 대학 교수를 지냈다.

한국 전쟁이 일어난 1950년, 장기려는 철수하는 군인들의 손에 이끌려 아내와 5남매를 북에 둔 채 둘째 아들만 데리고 월남하였다.

그리고 부산에서 천막을 치고 복음 병원을 세워 행려 병자를 치료했다.

곧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가족은 휴전선이 가로막혀 영영 볼 수 없게 되었다.

장기려는 늘 북에 두고 온 가족들을 그리워했다.

“내가 누군가를 도우면 반드시 누군가 북에 있는 내 가족을 도울 것이야.”

그러한 믿음으로 장기려는 가난한 사람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다는 다짐을 하며 하루에 200명이 넘는 환자들을 돌보았다.

뿐만 아니라 1959년에 우리 나라 최초로 대량 간 절제 수술에 성공하는 등, 당시 우리 나라 외과 의사 가운데 최고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병원이 커지고 무료 진료가 불가능해지자 장기려는 1968년 한국 최초의 의료 보험 조합인 청십자 의료 보험 조합을 설립하였다.

청십자 병원은 가난한 사람을 정성껏 치료해 줄 뿐만 아니라 치료비를 깎아 준다고 소문이 나 늘 많은 환자들이 찾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병원에 오랫동안 입원해 있던 농부가 장기려 박사에게 하소연을 했다.

“선생님, 제가 당장은 돈이 없지만 나중에 꼭 벌어서 갚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사정 좀 봐 주세요.

내일 당장 모내기를 해야 하는데 이렇게 병원에 묶여 있으면 한 해 농사를 망치게 됩니다.”

농부의 말을 들은 장기려는 가만히 생각을 하다가 말했다.

“밤에 문을 열어 줄 테니 그 때 가세요.”

농부가 깜짝 놀라자 장기려는 웃으면서 말했다.

“병원에서는 아마 병원비를 내지 않으면 퇴원을 안 시켜 줄 거예요.

그런데 돈이 없으니 도망을 쳐서라도 일을 해야 가족을 돌볼 수 있을 것 아닙니까.”

장기려는 그렇게 말하고 농부에게 돈까지 쥐어 주었다.

“얼마 안 되지만 차비나 하세요.”

농부는 고마운 마음에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는 수술비가 없는 환자를 위해 자신의 돈으로 수술을 해 주고, 그나마도 감당할 수 없게 되면 밤에 몰래 환자를 탈출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평생 자기 집 한 채 가지지 못하고 병원 옥상 사택에서 살다가 1995년 12월 추운 겨울날 새벽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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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영경아이들이 바르게 생각하고 멋진 꿈을 가지는 데 밑거름이 되는 책을 번역, 집필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 쓴 책으로는 <세계 명문 대학 50> <소녀들을 위한 비전 있는 진로 가이드> <일등하는 아이들의 공부 방법> <창조형 아이가 공부도 잘 한다> <성공한 사람들이 아주 특별한 이야기> <스피드 수학왕 19단>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어린이를 위한 철학 대화 40가지> <크레용 왕국의 딸기 마을> <크레용 와국의 유령 마을>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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