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된 기억을 소환하다

이진주

헬로! 아티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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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주 작가

현재는 축적된 과거를 바탕으로 나아간다. 우리가 사는 시간은 현재에 속하지만, 현재의 우리를 만들어낸 건 수많은 과거의 경험과 기억이다.

우리는 과거를 배움으로써 현재 우리의 정체성을 파악하고, 경험에서 얻은 교훈으로 새로운 현재를 개척하고, 반복 강박에 빠져 같은 아픔을 반복하고, 트라우마에 얽매여 고통스러워한다. 이처럼 과거는 단순히 지나간 시간 속에만 박제되어 있지 않고, 현재에서도 살아있다.

작가 이진주의 작품은 과거를 소환해내는 일인 '기억'과 관련되어 있다. 끊임없는 관찰과 지독한 사유로 작가는 기억을 회화적으로 정의한다. 또한, 과거를 기억하는 일에 의미를 부여하여, 이미 지나가 생명력을 잃은 과거 사실을 현재의 시간 속에서 생동하게 한다.

· 기억의 생명력

과거는 바꿀 수 없다. 하지만 역행할 수도, 바꿀 수도 없는 이 굳건한 과거는 기억하는 방식에 따라 미화되고, 왜곡되고 때로는 과장되면서 다양한 형태로 변화한다. 기억은 바꿀 수 없는 과거 사실을 대상으로 하는 활동이지만, 그 대상을 유동적으로 왜곡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묘하다.

또한, 기억은 자발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하고, 강제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과거를 떠올리는 것은 개인의 이성으로 이루어지는 현상 중 하나임에도 당사자의 의사와는 반대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 기억은 생각으로 진행되면서 당사자의 의사에 반할 수 있는 이중적인 것이다.

작가 이진주는 이처럼 정의하기 어려운 기억 체계를 특유의 방식으로 정립한다. 또한, 이를 회화적으로 탐구하여 그 결과물을 관객에게 제시함으로써 본인의 세계로 관객을 이끈다.

이진주, [기억의 방법(A Way to Remember)], 2010년
Powdered pigment, Animal skin glue and water on unbleached cotton, 122cm×244cm

“대체로 기억은 ‘능동’이기보다 ‘피동’인 상태로 기습합니다. 불편한 환기 속에서 이것의 불가해함에 다가서기 위한 질문들이 생겨났어요. 무엇이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장치가 되는지, 기억의 공통적인 구조는 무엇인지, 망각에서 살아남은 기억들이 어떻게 왜곡되고 가공되는 것인지, 기억에 대한 사유는 실재하는 대상과 그 대상을 인지하는 의식의 이미지를 아우르는 심리적 풍경에 관한 관심으로 확장되었습니다.

제가 바라보는 기억은 단순히 과거에 저장된 사건과 감정만이 아닙니다.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 기억상실증 환자들은 단순히 과거에 기록된 사건이나 감정만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기억장애는 자신을 구성해온 삶의 기본적인 것들을 잊어버리게 되어 현재를 제대로 살아 갈 수도, 미래를 상상할 수도 없어요. 기억은 매 순간 변하는 현재와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기 위한 경험의 질료이기 때문입니다.”

· 편린들의 나열

기억은 시간순으로 정렬되지 않는다. 회상함으로써 역행하고, 연상함으로써 무작위로 소환된다. 혼재된 기억은 그 혼란 자체로 흥미를 유발하고, 때로는 규칙 하에 정리하고 싶은 본능을 일으킨다. 이진주는 이 혼재된 기억을 한 화면에 본인만의 질서를 잡기도, 때로는 무질서 속에서 미를 찾아낸다.

이진주, [가짜 우물(Deceptive Well)], 2017년
Powdered pigment, Animal skin glue and water on unbleached cotton, 260cm×528cm

이진주의 작품에는 입방체의 형태가 자주 보인다. 더불어 기억으로 구성된 가상의 섬처럼 보이는 형태도 쉽게 볼 수 있다. 이는 수많은 과거 이미지들을 한 화면에 담아내면서, 고유의 세계를 구성한 결과이다. 작가는 작품에서 흔히 보이는 시각적 요소와 구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기억할 때 인지되는 이미지의 구조를 관찰하다 보면, 아주 세밀하고 생생한 장면들을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전체적인 논리적 구조나 맥락을 떠올리기 어려울 때가 많아요. 알 수 없는 전체는 아직 보이지 않는 무의식의 영역처럼 다가옵니다. 혹은 형태나 언어를 갖추고 있지만 대면하고 발화할 수 없는 이야기처럼 느껴집니다. 그런 지점을 화면 안에 과감하게 여백으로 처리하고 있습니다. 이는 제가 화면을 어질러진 무대처럼, 조각난 섬처럼 구성하는 이유입니다. 때로는 처음과 끝을 알 수 없는 기억의 편린들을, 마치 투명한 상자에 담긴 복잡다단한 이야기처럼 다루기도 합니다. 저는 파편화된 순간들, 분절된 이미지들, 유예되는 시간들, 시공간을 넘나드는 자아들 사이에서 마음을 성가시게 만드는 편린들을 관찰하고 묘사합니다. 맥락 없이 태연하게 관계하는 모티프들 사이에서 발화되지 못한 이야기를 담습니다.”

이진주, [저지대(The Lowland)], 2017년
Powdered pigment, Animal skin glue and water on unbleached cotton, 222cm×550cm

작가는 기억을 수많은 이미지가 동시에 등장하고 소멸하는 과정의 반복이라 정의한다. 이 지점에서 수많은 기억 이미지들을 어떻게 같은 시간성을 가진 하나의 이미지 안에 담을 수 있는지, 그 방법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된다.

그 결과로 작가는 다양한 구도와 다층적인 시도를 보여준다. 작품 [가짜 우물(Deceptive Well)]과 [내가 본 것(Things I Have Seen)], 그리고 [저지대(The Lowland)]가 그 대표적인 예다.

[가짜 우물(Deceptive Well)]은 세 개의 층, [내가 본 것(Things I Have Seen)]은 두 개의 층이 병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작가는 여러 풍경을 세로로 배치할 때, 우리의 시 지각이 감각하는 시간성은 같다고 보았고, 병렬 구조를 사용함으로써 여러 기억을 같은 시간 안에 두었다.

반대로 가로로 긴 구조의 [저지대(The Lowland)]는 시간이 흐르거나 순환하는 서사적인 구조를 강조한 것이다. 이는 실제로 보이는 현상과는 다른 화면이지만, 장면의 배치와 구도를 통해 시간성을 제시하는 구조적 실험이다. 이진주 작가는 회화적으로 우리의 인식체계를 형식화하는 실험을 다양한 구조로 이어나간다.

· 불가피한 대면

과거를 자발적으로 회상하는 빈도는 개인마다 다르다. 추억에 젖어 사는 사람은 추억을 회상하는 빈도가 높을 것이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를 가진 사람은 과거 경험을 회상하는 빈도가 낮을 것이다.

과거를 상기하는 일은 아름다운 과거를 갖지 못한 이들에겐 마음 아픈 일일 수도, 회피하고 싶은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진주의 작품은 치열하게 기억을 다루지만, 그 작품들이 다루는 기억에는 음미가 가능한 추억만이 있는 건 아니다.

작품은 고통스러운 기억도 포용한다. 이진주 작가가 포용하는 기억들은 작가가 과거를 대면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이진주, [얇은 찬양(A Frail Hymn)], 2017년
Powdered pigment, Animal skin glue and water on unbleached cotton, 100cm×162cm

“누군가가 물었습니다. 왜 그토록 상처 입고 아픈 세계에 천착하고 있냐고. 그것은 제가 이 세계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방향입니다. 아프고 힘들고 불편한 것들이 끈질기게 남겨져 몸의 물질성과 함께 끈질기게 기억합니다. 그저 어두운 기억인 것이 아니라,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끝없이 재구성되면서도 남겨집니다. 화상을 입은 아이가 그 경험을 잊어버린다면, 같은 상황은 다시 반복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실 비극적인 세계를 외면하지 않고, 망각으로 밀어내지 않음으로써 치유나 화해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는 의문이 듭니다. 하지만 비록 비극적일지라도 두 발로 서서 일상의 곳곳을 가만히 지켜보는 일에 대해 어떤 힘을 느낍니다. 제 작업 속에 부조리한 상황들은 곳곳에 태연하게 펼쳐져 있습니다. 많은 섬뜩한 이야기를 숨기고 있지만, 겉으로는 태연하고 조용한 장소처럼 여겨집니다. 담담하고 따뜻한 색채로 조용히 지나는 일상의 평온도 함께 공존하길 바랍니다. 비극적이지만 따뜻하기도 한 일상을 외면하지 않고 마주하며 세상에 버티고 서서 바라보는 시선을 그리고자 합니다.”

이진주의 작품은 치열하다. 세밀한 화법은 그림을 그려낸 작가의 물리적 고통과 고도의 집중력을 느끼게 한다. 더욱이 회상하기 힘든 기억들도 표현 대상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작가의 치열함이 강하게 다가온다.

이 지독한 탐구를 통해 이진주 작가는, 기억의 조각들을 단순히 과거 어딘가에 존재하기만 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고, 담담하게 다시 마주함으로써 새로운 가치를 생성한다. 살아 움직이는 과거를 마주함으로써 우리는 더욱 생동하게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지수 / 칼럼니스트

· 추천의 변

때로는 투명한 벽면으로 둘러 싸인 밀실처럼, 때로는 세상으로부터 거칠게 떨어져나간 덩어리처럼 다른 세상과 동떨어져 고립된 공간은 작가의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 존재하는 초현실적 장소이다.

이곳에서 조각난 과거의 단편을 끄집어내고 풀어헤치고 관찰하는 작가는 기억의 주체이자 관찰자가 된다.

꿈을 통해 무의식 저편에 깊숙이 밀어 넣었던 기억과 욕망이 의식의 검열을 거쳐 왜곡되어 표상되듯, 현실과 유리된 그림 속 공간에서 우리는 옷을 입은 것도 벗은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의 인물과 어디서나 볼수 있지만 일상적 상황에서 벗어난 사물들과 만난다.

섬세하고 아름다우면서도 불편할 정도로 기이한 이진주의 그림은 한눈에 어떤 해석이나 판단할 수 없어 오랫동안 머무르며 바라보게 한다.

이는 중층적인 알레고리를 담은듯 복잡하고 혼란스런 심상의 풍경이란 이유도 있지만, 겹겹이 물감층을 쌓을 수 있는 유화와 달리 채색이 종이에 흡수되어 버리는 섬세한 한국화 기법으로 수개월 또는 수년에 걸쳐 완성되는 물리적 노고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작가는 이토록 섬세한 그림을 그리는 수고로운 행위를 통해 자신의 두렵고 불편한 기억과 감정을 마주하는 용기와 이를 통해 현실의 위협을 이겨내는 내성을 쌓아가는 것이 아닐까.

수수께끼처럼 펼쳐진 상황과 사물들을 읽으려 애쓰는 동안, 짐작할 길 없는 작가의 기억에 보는 이 자신의 기억이 겹쳐지고 이로써 무수히 많은 새로운 이야기가 탄생한다.

추천인 임근혜 / 헬로!아티스트 작가선정위원

· 작가소개

이진주

이진주 작가는 홍익대학교와 동대학원에서 동양화를 전공하고, 2006년 갤러리 DOS [무늬에 중독되다] 전을 시작으로, 두산갤러리 뉴욕, 아라리오갤러리 서울, BAIKART갤러리 등 국내외 다수의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2009년 중앙미술대전 선정작가 우수상을 수상하였고, 2014년 송은미술대상전 우수상을 수상하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 발행일2017. 07.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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