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만원 한 장 들고 떠난 시장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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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1.11.08. 오후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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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홍미옥의 모바일 그림 세상(87)

고소한 참기름처럼 재미난 시장구경
온 천지가 붉고 노랗게 물들고 있다. 자칫하면 그 장관을 놓칠지도 모르겠다. 나이 들수록 봄이면 봄이라고 가을이면 가을이라고 또 겨울도 마찬가지다. 보고 싶은 게 늘어나기만 한다. 평소와 별반 다르지 않던 토요일, 골목 어귀의 플라타너스 주변에는 갈색낙엽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하늘은 이미 높고 푸르고 공기는 차가움을 머금은 터였다. 자연스레 떠오른 생각은 ‘여행’, ‘떠남’이었다. 하지만 이런저런 일에 치이다 보면 그 쉽고도 별거 아닌 일이 우리에겐 크고 어렵기만 할 때도 있는 법이다.

그날은 달랐다. 동네 버스정류장을 지나는데 모란시장행 버스가 오고 있었다. 별생각 없이 바라보다 문득 장 구경이나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뭐 경치 좋고 소문난 관광지를 가야만 여행이더냐. 재래시장 구경도 가을맞이 나들이에 충분하지 싶었다. 냉큼 올라탔다.

시장 좌판, 갤럭시탭S6. [그림 홍미옥]

만원 한 장 들고 떠난 시장여행
대중교통은 주로 지하철을 이용하는 편이다. 그래선지 오랜만에 타 본 버스에서 나오는 ‘버스 TV’도 나름 흥미로웠다. 뚝딱뚝딱 만드는 일품요리부터 알아두면 쓸모있는 생활 팁까지 보여주고 있었다. “오라이~”를 외치던 만원 버스 안내양의 음성이 생각나는 세대이고 보니 별거 아닌 것에도 눈길이 가는가 보다. 또 하나! 평소엔 지나쳤던 정류장의 이름도 어찌나 흥미롭던지.

몇 차례 이용했던 지하철 복정역은 ‘복우물’역으로 불린다. 아! 그 복이 많은 우물터였나 보다. 그 옛날, 물이 귀한 지형에 있던 우물이니 당연히 복덩이였음은 자명한 사실일 터이다. 그 외에 웃말입구, 태평고개, 수리진고개 등등 예스러운 정류장 이름들이 재밌다. 사람들은 짐보따리를 이고 지고 저 고개를 넘었을 것이다.

버스를 탄 지 30분이 채 못 되어 도착했다. 모란시장이다. 아뿔싸! 동네 산책길에 나온 터라 지갑엔 달랑 교통카드와 만 원짜리 한장뿐이다.

악명(?)높던 모란시장, 이제는 고소한 내음으로

모란시장에는 기름골목이 형성되어 있다. [사진 홍미옥]

도심에서 맛볼 수 있는 향토적인 이미지로 전국적인 유명세를 가진 모란시장이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악명도 높았던 게 사실이다. 오랜 시간 개 도축으로 야기된 갈등은 사회문제로 이어졌지만, 지금은 모두 철거되었다. 여느 시장처럼 가게 앞이나 담벼락, 길가에는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으로 북새통을 이뤘다. 가을 과일 감이 산더미를 이루고 나름 비싼 몸값을 자랑하는 사과도 반짝이는 둥근 자태로 풍성함을 보여준다. 물론 요즘 최강 몸값인 샤인머스킷이 빠질 리는 없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재래시장의 즐거움은 좌판이지 싶다. 한 번에 씨를 말린다는 무좀약, 집안의 바퀴·개미를 한꺼번에 박멸시켜준다는 획기적인(?) 약도 있고 말린 들국화, 생강나무, 질경이 등 몸에 좋다는 건 총망라돼 있다. 한편에선 과연 작동은 될까 의심스러운 휴대용 녹음기가 신나는 트로트를 들려주고 있다. 신기한 기술로 무·감자·양배추를 채 썰어내는 상인의 손에 들린 채썰기 세트도 단돈 만 원에 팔리고 있다. 어쩌나, 겨우 만 원 한장 들고 나선 시장길이라 채썰기 세트는 다음으로 미뤄야겠다.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시장 구경을 하다 보니 어디선가 고소한 냄새가 마구 풍겨왔다. 오호라! 여기가 그 소문난 참기름 골목인가보다. 입구를 들어서기도 전에 그 고소함에 저절로 마음이 밝아지는 것 같았다. 참기름 집이라 하면 누구에게나 생각나는 유년 시절이 있을 게다.

동네 사랑방이던 참기름 집, 한바탕 깨 볶는 소리가

모란시장 기름골목엔 기름과 각종 곡식가루도 판매중이다. [사진 홍미옥]

엄마 손을 잡고 시장 기름집에 가면 모든 게 신기하기만 했다. 방앗간을 겸하는 집이 많아서인지 깨를 볶는 고소한 냄새와 매운 고춧가루 냄새를 한 곳에서 경험하는 재미난 일도 다반사였다. 기계에선 마치 나무를 얇게 저미듯이 깻묵이 돌돌 나오고 참기름이나 들기름을 담을 빈 병이 줄지어 있었다. 그때도 지금도 참기름이 비싼 건 마찬가지였나 보다. 커다란 병 대신 소주병, 사이다병, 그리고 소위 박카스 병까지 기름 단위는 그렇게 정해졌다.

사실 어린 나이에 기름집은 그다지 재밌는 곳은 아니었다. 깨를 볶고 갈고 기름을 짜내는 과정은 꽤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물론 어른들이야 미처 못 나눈 얘기로 그 시간이 짧았을 것이다.

자연스레 기름집은 깨가 쏟아지는 동네 사랑방이 되었다. 이 집 처자와 저 집 총각을 이어주는 결혼 중매소도 되고 목돈을 모으는 곗방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시장 기름집은 내게 얇게 저민 깻묵과 참기름병 입구를 틀어막던 신문뭉치, 어른들의 이야깃거리로 남아있다.

모란시장 기름 골목은 비단 참기름, 들기름만은 아니다. 홍화씨 기름, 고추씨 기름, 살구씨 기름 등의 고소함으로 가는 이를 붙잡고 있었다. 몸에 좋은 온갖 곡식도 다 가루로 빻아져 팔고 있었는데 볶은 콩가루를 비롯해 찹쌀가루, 날 콩가루, 검은콩 가루, 귀리가루, 고춧가루 등 요즘 가장 인기인 도토리가루도 있다.

시대 불문 며느리가 제일 좋아한다는 그것은? 바로 시어머니가 싸주신 참기름이라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사실 어마어마한 고가도 아니고 마트에 가면 언제든지 살 수 있는 게 참기름이다. 하지만 고소한 내음만큼이나 품과 마음이 진하게 담긴 어머님의 시장표 참기름이니 받는 마음도 남다를 것 같다.

그날 내가 가진 만원으론 살 수 없는 게 아쉽긴 했지만, 대신 맨들 반짝한 단감 한 봉지와 사과 한 봉지를 사고도 2000 원이 남았다. 한바탕 시장 구경을 했더니 출출했다. 옳다구나! 오늘 시장 나들이의 마무리는 제철 간식인 붕어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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