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적인 해양 탐사의 혁신가

자크 이브 쿠스토

Jacques Yves Cousteau

인물세계사

보내기 폰트 크기 설정
출생 - 사망 1910.6.11. ~ 1997.6.25.
“자크 이브 쿠스토 (...) 붉은 모자를 쓴 귀족적인 사나이, 전설적인 배 칼립소 호의 선장,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침묵의 세계]의 저자, 해저 탐험가, 영화감독, 환경보호운동가 (...) 집념의 탐험가였던 그는 (...) 반세기 동안 세계를 누비며 사려 깊은 눈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지구를 살폈다. 누구보다 일찍 텔레비전의 영향력을 알았던 그는 이를 대중 계몽의 도구로 활용함으로써 자신의 명성을 전 세계에 알렸다. 칠판이 교사들의 필수품이라면, 텔레비전의 작은 화면은 자크 이브 쿠스토의 경험과 사상을 유감없이 전달하는 칠판이었다. 계층을 초월한 수많은 관객들이 그 칠판 앞으로 몰려들었다.” -베르나르 비올레

1 해군 장교 출신으로 잠수 전문가가 되다

자크 이브 쿠스토(이하 편의상 ‘쿠스토’로 통일)는 1910년 6월 11일 프랑스 남서부 지롱드 주 생탕드레드퀴작에서 태어났다. 쿠스토의 아버지는 파리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미국 유학을 다녀왔으며, 이후 프랑스에서 활동한 미국인 사업가들의 개인 비서로 오랫동안 근무했다.

아버지를 따라 어린 시절에 뉴욕에서 학교를 다닌 쿠스토는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그가 훗날 프랑스 정부와의 갈등 이후에 미국으로 활동 무대를 옮기고, 심지어 저서를 영어로 직접 써서 출간한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쿠스토는 어린 시절부터 손재주가 뛰어났고, 특히 야외 활동과 물놀이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그래서인지 미국의 자유분방한 교육 제도에서는 의외로 쉽게 적응했지만, 프랑스로 돌아와서는 갑갑한 수업에 영 흥미를 잃고 말았다.

영어에 비하자면 프랑스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평생 철자법에 서툴렀으며 난독증 증세도 보였다. 20세 때인 1930년에 대학입학자격시험을 앞두고 쿠스토는 의학, 영화, 군대라는 세 갈래 길에서 고민에 빠진다. 결국 그는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하고 1932년에 소위로 임관한다.

해군 시절의 쿠스토는 세계 일주 항해를 다녀오는가 하면, 중국과 일본과 소련에서 한동안 근무하기도 했다. 나중에는 해군 항공대에 지원했지만 1936년에 과속 운전으로 심한 교통사고를 당하고 8개월간 병원 신세를 지는 바람에 조종사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27세 때인 1937년에는 18세의 시몬 멜슈오르와 결혼했다. 1938년에는 첫 아들 장 미셸이, 1940년에는 둘째 아들 필리프가 태어났다. 두 아들 모두 훗날 아버지를 도와 탐험과 영화 제작에서 일익을 담당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쿠스토는 필리프 타이에즈와 프레데릭 뒤마라는 두 명의 친구를 사귀게 된다. 마찬가지로 해군 장교였던 타이에즈는 쿠스토를 처음 해양 잠수의 세계로 인도한 인물이었고, 타이에즈의 소개로 만난 뒤마는 매우 탁월한 수영 솜씨를 지닌 잠수부였다.

이른바 ‘바다의 삼총사’로 일컬어지던 세 사람은 종종 함께 바다에 나가 잠수를 즐겼고, 이 과정에서 새로운 잠수 장비의 개발 및 실험에 열을 올리게 되었다. 이들의 목표는 물속에서 보다 자유로운 움직임이 가능한 잠수 장비를 만드는 것이었다.

역사의 기록에 따르면 BC 325년에 알렉산드로스대왕이 밧줄에 매단 유리통에 들어가 바다 구경을 한 것이 최초의 잠수 장비이다. 하지만 19세기 말까지도 잠수 장비의 기본 원리는 2천 년 전과 별 차이가 없었다.

물 밖에서 튜브로 공기를 공급해야 했기 때문에, 잠수부는 움직임이 굼뜨고 제한되게 마련이었다. 그러다가 20세기 초에 이르러 공기 튜브 대신에 공기통을 착용하는 폐쇄 회로식 호흡 장비가 도입되고, 아울러 오리발(물갈퀴)의 사용이 보편화되면서 비로소 물속에서의 자유로운 움직임이 가능해졌다.

보통 잠수(다이빙)라고 하면 ‘스킨 스쿠버’(Skin Scuba)라는 단어를 떠올리는데, 여기서 ‘스킨 다이빙’(Skin Diving)이란 공기통 없이 잠수하는 것이며, ‘스쿠버 다이빙’(Scuba Diving)은 공기통을 메고 잠수하는 것을 말한다.

‘스쿠버’(SCUBA)라는 말 자체가 “자급식 수중 호흡 장비”(Self-Contained Underwater Breathing Apparatus)라는 말의 줄임말이기 때문이다. 1943년에 이 장비를 혁신한 일명 ‘아쿠아렁 (aqua-lung)’을 기술자 에밀 가냥과 공동으로 제작하고 특허를 얻은 것이 역사에 남을 쿠스토의 가장 큰 업적이었다.

아쿠아렁을 메고 바다에 들어가 첫 시험을 해 보았을 때의 심정을 쿠스토는 이렇게 회고한다. “나는 이 신비한 아쿠아렁을 메고서 별의별 몸짓을 다 해보았다. 앞으로 뒹굴면서 공중제비도 해 보았고, 나무통이 구르듯 옆으로도 굴러보았다. 거꾸로 물구나무를 서서 땅바닥에 손가락 한 개만 짚고 서 있으면 킥킥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를 참아내느라고 무척이나 애를 먹기도 했다.” 아쿠아렁이 개발되고 나서야 인간은 비로소 물속에 들어가서도 물고기처럼 자유롭게 헤엄칠 수 있었던 것이다.

쿠스토는 성능을 크게 혁신시킨 개인용 잠수 장비 ‘아쿠아렁’을 개발하여 물속에서 자유로운 움직임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쿠스토의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인간은 물속에서도 물고기처럼 마음껏 헤엄칠 수 있었다. 잠수 장비를 착용하고 있는 자크 이브 쿠스토, 1965년.

2 영화 제작에서 칼립소와 해저 주택 실험까지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프랑스 해군은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한 상태에서 비시 정부의 지시로 휴전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해군 장교였던 쿠스토와 타이에즈는 일시적인 휴직 상태가 되었고, 이때를 틈타 ‘바다의 삼총사’는 잠수와 수중 촬영 장비의 실험에 몰입했다.

비시 정부 치하에서 쿠스토의 행적은 훗날 의구심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그는 “잠수에 전념하기 위해서 프랑스에 머물렀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자크 이브 쿠스토의 형인 언론인 피에르 앙트완 쿠스토는 전후에 부역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전쟁이 끝나자 쿠스토는 해군 대위로 복직했고, 프랑스 해군 소속 해저탐사부대(GRS)를 창설하고 운영하는 핵심 인물로 부상했다. GRS의 주요 임무는 수중 폭발, 기뢰 제거, 수중 탈출, 해저 인양 등 군사 관련 연구였지만, 쿠스토는 전쟁 중에 경험한 수중 촬영 기술의 개발에 점차 몰두하게 된다.

급기야 그는 해군의 지원을 받아 보물선을 탐사하고,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하는 등의 홍보 임무를 전담하게 된다. 1949년에 쿠스토는 소령으로 승진했지만, 이미 40대에 접어든 그는 해군을 벗어나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

1950년에 쿠스토는 해양 탐사선 칼립소 호를 구입하고 본격적으로 새로운 모험에 돌입한다. 해양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하고, 새로운 잠수 장비와 기술을 실험하고, 난파선을 찾아내서 유물을 인양하고, 정부 및 대기업의 요청을 받아 해양 자원 탐사를 실시하는 것이 그의 주요 사업이었다. 훗날 환경보호운동가로 부각된 쿠스토의 이미지와는 맞지 않아 보이지만, 초기에만 해도 그는 석유 회사의 의뢰를 받고 해저 유전이나 송유관 건설 관련 탐사 등을 수행함으로써 활동비를 충당했다.

1953년에 다큐멘터리 영화 [침묵의 세계]가 개봉되면서 쿠스토라는 이름은 전 세계에 회자된다. 해저의 갖가지 풍경과 특이한 생물의 모습을 망라한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의 수준을 한층 높인 획기적이고 신선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 영화의 제작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 인물은 20대 초반의 촬영감독 루이 말(1932-1995)이었다(그는 훗날 [사형대의 엘리베이터](1957)를 비롯한 여러 문제작을 내놓은 거장 감독으로 성장한다). 제9회 칸 영화제에서 [침묵의 세계]는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한다.

1957년에 쿠스토는 평소 친분이 있었던 모나코 군주 레니에 대공의 제안으로 몬테카를로에 있는 모나코 해양박물관의 관장으로 취임한다. 하지만 ‘쿠스토 선장’(Captain Cousteau, 또는 le Commandant Cousteau)은 박물관에 머물러 있을 때보다 없을 때가 더 많았다. 칼립소 호를 타고 전 세계를 누비며 해양 탐사와 영화 촬영에 전념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초기에는 환경보호 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않았지만, 1960년에는 핵폐기물을 지중해에 버리려는 프랑스 정부의 조치에 반대하는 시위를 주도하기도 했다.

쿠스토는 인구 폭발과 자원 고갈에 대한 대안으로 인류가 해저에서 살아갈 날이 도래할 것이라 예견하고, 1960년대에 들어서 일련의 해저 주택 실험을 실시해서 성공을 거두었다. 홍해에서 이루어진 제3차 프레콩티낭 실험 중의 쿠스토와 탐사 대원들. 창밖을 바라보는 사람은 쿠스토의 부인 시몬이다. 1963년.

3 영광과 논란으로 점철된 말년

쿠스토의 해양 탐사는 비슷한 시기인 20세기 중반에 이루어진 미소 양국의 우주 탐사 열풍과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양쪽 탐사 모두 인간이 이용하고 거주할 수 있는 영역을 더욱 확장한다는 목표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쿠스토는 인간이 거주할 수 있는 해저 주택 실험에 도전했다. 1962년에 프레콩티낭(옛 대륙)이라는 이름의 이 해저 주택에서는 두 명의 실험자가 일주일간 해저 120미터에서 생활했다. 이어서 두 번째와 세 번째 실험이 실시되어 언론의 각광을 받았다.

1964년에는 쿠스토의 영화 [태양이 비치지 않는 세계]가 아카데미 다큐멘터리 부문에서 수상했다. 쿠스토가 이끄는 해양 연구소는 미국의 의뢰를 받고 해저 탐사정 ‘딥 스타’를 제작할 정도로 심해 탐사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기술을 자랑했지만, 훗날 우주 탐사가 그러했듯이 실용성 여부에 대한 의문은 줄곧 따라다녔다. 쿠스토는 해저 주택 ‘물거미’ 계획을 야심차게 추진했지만, 프랑스의 정권이 교체되는 과정에서 막대한 비용과 실용성 문제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결국 이 계획은 1971년에 폐기되고 말았다.

‘물거미’ 계획이 좌초되자 쿠스토는 아예 활동 무대를 미국으로 옮기기로 작정했다. 특히 1966년부터 1968년까지는 [쿠스토의 모험 세계]라는 12부작 다큐멘터리가 ABC 방송국을 통해 미국 전역에 방영되었다.

이 시리즈는 “다큐멘터리를 새로운 이야기 장르로 바꾸었다”는 찬사와 “과학적인 정확성이 부족하다”는 비난 속에서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이를 계기로 쿠스토는 미국의 안방극장에서도 친숙한 이름과 얼굴로 부상했으며, 존 F. 케네디에서 카스트로에 이르는 세계 명사들과 연이어 만나기도 했다.

이런 인기에 힘입어 1969년에는 캘리포니아의 롱비치에 쿠스토 해양 박물관이 개관하고, 1974년에는 미국 쿠스토 협회가 설립되어서 회보를 받아보는 유료 회원이 1년 만에 10만 명에 달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런 사업은 머지않아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박물관은 재정 적자로 인해 수년 만에 문을 닫아야 했고, 쿠스토 협회의 본거지인 버지니아 주 노퍽 시와 제휴한 관광 복합단지 건립도 결국 취소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1979년에는 쿠스토의 후계자로 공인된 둘째 아들 필리프가 사고로 사망하고 만다.

사업과 관련된 논란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쿠스토 선장,’ 또는 ‘캡틴 쿠스토’의 개인적인 인기는 여전히 높았다. 1980년대에는 환경보호운동가들 사이에서 70대에 접어든 그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우려는 움직임이 있었을 정도였다.

쿠스토 본인도 정계 입문을 진지하게 고려했지만, 결국에 가서는 깨끗이 단념하고 말았다. 78세 때인 1989년에는 30여 년간 근무한 모나코의 해양 박물관 관장 직에서 물러났지만, 대신 프랑스 학술원(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으로 선출되는 영예를 누렸다.

말년까지도 쿠스토의 삶에는 빛과 그림자가 엇갈렸다. 영광의 절정인 1989년에 파리에 개장한 쿠스토 해양 공원은 적자 누적으로 2년 만에 문을 닫았고, 미국의 쿠스토 재단은 불투명한 회계 관리로 구설수에 올랐다. 쿠스토의 사생활에도 여러 가지 변화가 있었다. 1990년 말에 그의 아내 시몬이 71세로 사망했다. 이듬해 여름에 쿠스토는 오랫동안 내연 관계였던 36세 연하의 프랑신 트리플레와 결혼했다. 이미 두 사람 사이에는 십대 자녀가 두 명이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노익장을 과시하던 쿠스토에게도 최후는 어김없이 찾아왔다. 1996년 1월 8일에 벌어진 한 가지 사건은 특히나 의미심장할 수밖에 없었다. 싱가포르 항구에 정박해 있던 그의 분신 칼립소 호가 사고로 침몰했던 것이다. 쿠스토는 칼립소 2호를 만들기 위한 모금 운동에 들어갔지만, 그의 기력은 이미 급속하게 쇠하고 있었다. 이듬해인 1997년 6월 25일, 자크 이브 쿠스토는 87세로 파리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관에 누운 그의 손에는 자신의 트레이드마크나 다름없는 빨간 모자가 들려 있었다.

해상 탐사선 ‘칼립소’ 선상에서 자신이 제작한 해저 탐사정의 운반을 지휘하는 자크 이브 쿠스토. 푸에르토리코, 1960년.

4 가장 깊은 곳까지 바다를 누빈 사람

자크 이브 쿠스토의 가장 큰 업적은 역시 잠수 장비 및 해양 탐사 분야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물론 해저 주택 프로젝트처럼 무모한 시도도 있었지만, 아쿠아렁을 비롯한 쿠스토의 혁신 덕분에 해양 탐사 기술이 크게 진일보한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쿠스토의 또 한 가지 중요한 업적은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을 통해서 바다의 신비와 매력을 전 세계인에게 각인시켰다는 점이다. 이것 역시 20세기 중반 환경보호운동의 대두와 맞물려서 대중의 인식을 새로이 하는 데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쿠스토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다. “사이비 해양 과학자”라는 논란에서부터,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면서 사실보다는 극적 표현에 치중한다는 비판, 그리고 본인의 이름을 내건 사업의 실패, 재단의 불투명한 재정 운용에 대한 의혹 제기, 그리고 종종 인신공격적인 발언을 해서 생긴 스캔들도 있었다. 외관상 환경보호운동가로 알려지기는 했지만, 사실 쿠스토는 그린피스 활동에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냈다. 핵폐기물의 해양 투기를 반대하면서도, 정작 해저 매립지 선정을 위한 용역을 담당한 적도 있었다.

쿠스토가 환경보호운동에 보다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은 데에는 시대적인 한계도 있었다. 그가 칼립소 호를 타고 전 세계의 바다를 누빈 20세기 중반에만 해도 우주와 바다의 개척에 대한 열망의 배후에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감돌고 있었다. 저서인 [침묵의 세계]의 결말에서 쿠스토는 인구 증가와 자원 고갈 때문에라도 조만간 인류가 바다 속으로 진출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고 예언했다. 하지만 무려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인류의 해저 진출은 우주 진출과 마찬가지로 아직 요원한 상태다.

이쯤 되면 쿠스토가 바다의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을 영상으로 펼쳐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바다의 이용과 개발에 대해서는 너그럽다 못해 방관적이었던 것도 이해가 된다.

“가장 오랫동안, 그리고 가장 깊은 곳까지 바다를 누비고, 지구의 오지까지 다녀 본 지구의 증인”이라고 자처한 그는 바다를 지극히 실용적인 차원에서만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언젠가 그는 한 초등학교에서 강연을 하면서 자신의 삶을 다음과 같은 몇 마디로 요약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낭만적인 모험가 쿠스토의 본질이 아니었을까.

“아주 오래 전 (...) 나는 기이하면서도 멋진 꿈을 꾸었다. 내가 아주 가볍고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 바다 위에서 날아다니고, 바닷물 속으로 뛰어들어 헤엄치고, 다시 물 위로 올라와 이리저리 떠다니는 꿈이었다 (...) 꿈속에서 나는 회색빛이 감도는 푸른 돌고래가 되어 위로 물을 내뿜으며 꿈을 꾸었다. 자급식 스킨스쿠버 장비를 등에 걸머진 날, 비로소 내 꿈은 현실이 되었다. 내가 너희에게 바라는 것이 이런 인생이다. 얘들아, 지금 너희가 갖고 있는 바람을 꼭 실현시키렴.”

참고문헌: 자크 이브 쿠스토, <침묵의 세계>, 1982; <더 싸일런트 월드>, 2004; 클로드 리포, <인류의 해저 대모험>, 2000; 이브 파칼렛, <캡틴 쿠스토>, 2003; 베르나르 비올레, <자크 이브 쿠스토>, 2005.

  • 발행일2011. 10. 12.

더 알아보기

확장영역 접기

연관정보

출처

출처 도움말
확장영역 접기
  • 박중서 출판기획자, 번역가

    글쓴이 박중서는 [약소국 그랜드 펜윅] 시리즈인 [뉴욕 침공기]와 [월스트리트 공략기] 등 수 십권의 책을 우리 말로 옮긴 번역가다. 1만권이 넘는 책을 소장했으며, 독서 관련 칼럼을 쓰고 있다. [불굴의 용기], [끝없는 탐구] 등 인물 논픽션을 번역했으며 외국 인물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꾸준히 소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