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승수의 틈]2020년, 배의 방향을 돌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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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9.12.29. 오후 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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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 99냐, 20 대 80이냐의 논의와 관련해서 20 대 80으로 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20 대 60 대 20의 사회이다. 밑에 있는 20%는 지금의 상황에서 빠져나올 길을 찾기 어렵고, 중간의 60%는 추락하지 않을까 불안해하는 사회가 되었다.

유일한 해법은 ‘계층 상승의 사다리’라는 허구를 버리고, 든든한 마룻바닥을 까는 것이다. 기본소득, 기본주거 같은 과감한 해법이 필요하다. 기본소득은 더 이상 불가능한 아이디어가 아니다. 기초연금, 아동수당, 청년배당, 농민수당 등 대한민국에서도 현금으로 지급되는 급여가 늘어나고 있다. 좀 더 큰 시각으로 정책을 설계하면, 기본소득은 충분히 가능하다. 쓸데없이 도로 닦고, 건물 짓고, 전시성 사업에 쓰는 예산 낭비만 줄여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지금 7% 수준인 공공임대주택을 20%대로 늘리고, 다주택 소유자들이 주택을 처분하도록 직접규제를 가하면 모두에게 인간다운 주거를 보장하는 ‘기본주거’ 정책도 가능하다.

문제는 정치다. 정치의 역할은 자원을 배분하는 것인데, 대한민국의 정치는 가진 쪽에 유리하게 자원배분을 한다. 2020년 예산에서도 가난한 노인들에게 월 10만원의 생계비를 추가 지원하는 예산은 막판에 삭감되었지만, 토건 예산은 대폭 늘어났다.

이런 정치를 바꾸기 위해 지난해부터 선거제도 개혁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어왔고, 지난 27일 공직선거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승자독식의 선거제도를 바꿔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지금과 같은 승자독식의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이다.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의 목소리는 과잉대표되고, 여성, 청년, 소수자와 약자들의 목소리는 과소대표되는 것이 승자독식 선거제도의 특징이다. 그러니 사회는 더 나빠진다.

그리고 승자독식의 선거제도는 정치행태를 왜곡시켰다. ‘승자’가 되기 위해 상대방의 발목만 잡는 정치를 만든다. 이렇게 되면 정책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정당·정치인은 어리석은 존재가 된다.

그러니 치솟는 집값, 땅값, 주거비용에 대해 제대로 된 대안 한번 국회에서 논의된 적이 없다. 국회가 무능하니 정책을 만드는 역할은 정부 관료들에게 맡겨진다. 그러나 우리 사회 ‘기득권 중의 기득권’인 중앙부처 관료들이 누구의 편에서 일을 하겠는가?

그래서 선거제도 개혁이 중요했다. 선거제도를 바꾸지 않으면 정치를 바꿀 답이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 통과된 선거법은 본래 의도했던 것과는 상당히 멀어진 누더기 법안이 되어 버렸다. 독일, 뉴질랜드에서 하고 있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하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지금 도입된 것은 40~50점짜리 제도이다. 이 제도로는 승자독식의 구조를 바꾸기에는 미흡하다.

그래서 2020년이 중요하다. 그래도 불완전하지만, 이번에 만들어진 기회를 활용해서 대한민국이라는 배의 방향을 돌려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작은 변화가 아니라 대전환이다. 승자독식이 지배하는 사회를 바꾸려면, 크게 바꿔야 한다.

그런 얘기가 나와야 하는 공간이 바로 내년 4월15일 치러질 총선이다. 가장 먼저 필요한 얘기는,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정부조직의 역할을 다시 부여하는 것이다. 국토교통부가 있는 이상 대한민국은 도로, 공항, 철도 건설에 매년 10조원 이상의 국민 세금을 쏟아붓는 토건국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국토교통부를 해체하는 것이야말로 세금낭비와 환경파괴를 없애는 길이다. 기획재정부 같은 부처도 대폭 축소해야 한다. IMF 외환위기부터 부동산 정책실패, 심각한 불평등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 경제관료들의 책임이 너무나 크다. 그런데 이들은 한 번도 책임을 진 적이 없다. 오히려 지금 필요한 것은 인류 최대의 위기인 기후위기에 대응할 대전환을 총괄할 ‘전환부’이다.

교육에 도움이 안되는 교육부도 해체 수준으로 개혁해야 한다. 여성가족부는 성평등부로 이름을 바꾸고, 사회분야 정책 전반에 성평등의 관점이 실현될 수 있도록 성평등부 장관이 부총리를 맡는 것이 필요하다. 규제개혁위원회 같은 기구도 없애야 한다. 시민안전, 환경, 인권을 위해 필요한 규제를 못하는 정부는 존재할 이유가 없다.

정부조직의 대개혁과 함께 512조원이 넘는 국가예산의 대개혁이 필요하다. 불필요한 토건사업에는 단 1원의 세금도 못 쓰게 만들어야 한다. 관료와 정치인들이 자의적으로 주무르는 예산을 없애야 한다. 탈세, 특혜성 세감면도 없애야 한다. 그렇게 마련한 재원을 모두에게 든든한 마룻바닥을 까는 데 써야 한다. 기후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필요한 전환을 추진하는 데에도 세금을 써야 한다. 에너지, 산업, 교통, 농업·먹거리, 폐기물 등 모든 분야에서 대전환이 필요하고, 여기에 돈을 써야 일자리도 만들어질 수 있다.

이런 얘기들이 나와야 하는 공간이 2020년 총선이다. 불충분하지만, 이번에 바뀐 선거제도는 그런 얘기들이 가능한 최소한의 조건을 만들었다. 이제 공은 정당들과 유권자들에게 넘어갔다.

평론보다는 실천이 중요할 것이다. 정치는 가능성의 예술이고, 변화는 희망하는 사람들이 만드는 것이다. 부디 2020년이 희망을 만드는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하며, 마지막 칼럼을 마무리한다.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부족한 글을 읽어주신 독자들께 감사드린다.

하승수 비례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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