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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감상과 실기의 기초

파란색의 상징성

앞서 1, 2편에서 회화에 사용된 검은색과 흰색, 빨강, 노랑의 의미와 상징성에 관해 살펴보았습니다. 본편에서는 서양미술의 진행과정에서 독특한 행보를 보인 파란색의 역사를 유럽을 배경으로 간략히 살피고 회화작품 감상을 통해 그 의미와 상징성을 찾아봅니다.

고대에서 중세까지 드러나지 않은 색 - 파랑

전기 구석기 시대 인류 최초의 회화인동굴벽화에는 검정, 빨강, 갈색 그리고 황토색과 흰색들이 사용이 되었는데 청색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이후 몇 천 년의 세월이 지나 정착 생활을 시작한 인류는 빨강과 노랑을 직물염색에 이용하였지만 여전히 청색의 존재는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청색은 자연 속에서 쉽게 발견될 뿐 만 아니라 동식물, 광물 등에 다양하게 포함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색들에 비해 뒤늦게 생산되고,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과거 어느 사회에서나 색은 의미를 만들어 전달함은 물론 분류, 동화, 대립, 계층화를 통해 사회적 체계를 만들고 유지하는데 일정 역할을 담당해 왔고 인간의 정서적 감흥에도 큰 영향을 미쳐왔습니다. 그럼에도 역사의 어느 시기에 특정색의 사용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은 그 색이 별다른 역할을 담당하지 못했다는 것, 정서적으로도 선호되지 못했던 사실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고대로부터 중세 초까지 파란색은 유럽의 역사에서 대접받지 못했던 불우한 색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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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물의 염색과 관련된 색채의 의미

인류의 역사에서 색채사용을 가장 쉽게 찾을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염색을 통한 직물과 의류의 생산, 소비의 관계를 분석하는 것입니다. 직물과 의생활은 그 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와 예술 등 거의 모든 영역에 걸쳐 수많은 의미를 내포하기 때문에 색채 사용에 관한 그 어느 분야보다도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영향은 미술의 역사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고대로부터 청색 염료는 인디고가 널리 사용되었고 특히 인도산이 유명했습니다. 반면 유럽에서는 인디고가 생산되지 않았기 때문에 구하기 어려운 청색 염료는 인기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리스, 로마에서 청색 염색은 드문 일이었지만 켈트족이나 게르만족은 습한 땅에서 자라는 대청을 이용하여 염색을 하기도 했고, 광물인 남동석을 이용하여 청색 물감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기술적 한계로 인해 순도 높고 발색이 강한 청색을 얻을 수는 없었습니다. 따라서 유럽에서는 중세 전반기에 이르기까지 고채도의 아름다운 청색 물감이나 염직물을 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얻기 힘들 뿐만 아니라, 어두워서 미적 감성을 자극하지 못한 청색이 사람들에게 선택받지 못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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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코 동굴벽화(부분)

알타미라 동굴벽화(부분)

그리스, 로마인들이 기피한 색 - 파랑

그리스, 로마에서 선호되었던 색은 빨강, 검정, 노랑, 흰색이었고 로마에서는 더욱 청색을 기피했습니다. 로마인들은 청색을 어둡고 미개하며 세련되지 못한 색으로 인식하고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또 청색 의상은 품위가 없는 것으로 여겨졌고 제국 초기에는 장례의상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청색 비하 현상으로 파란 눈을 가진 사람들은 추하다는 취급을 당하거나, 여성의 경우 정숙하지 못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고, 심지어 무지개에서도 청색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파악하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청색은 궁정이나 귀족들에게 외면당한낮은 계층의 색이었고 이런 현상은12세기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청색 사용의 예외적인 경우는 동양에서 유래한 모자이크 제작에 밝은 청색이 등장한 경우입니다. 이는 후일 비잔틴 예술과 초기 기독교 예술로 이어졌고 청색은 모자이크에서 물을 표현하거나 바탕색, 혹은 빛을 표현하는 색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교회출입을 금지당한 불우한 파랑

중세 사회의 모든 분야를 지배하고 결정했던 기독교에서도 고대의 기본 3색인 검정, 흰색, 빨강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12세기 전반기 청색 스테인드글라스가 등장할 때 까지 교회의 예배의식에서 청색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초기 교회의 수많은 문서에서도 파란색은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성직자, 신학자의 의상에서도 요란한 색은 금지하고 흰색의 절대성(순수, 부활, 영광, 세례, 영생 등)을 강조하는 정도였지만 여전히 청색 의상은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12세기에 들어 색에 관한 전례학자들의 의견 일치가 이루어지는데 흰색은 순결함, 검은색은 금욕,회개, 비탄을, 빨간색은 그리스도의 흘린 피와 순교, 희생, 열정과 신적인 사랑을 의미하게 됩니다. 물론 녹색이나 보라, 회색이나 노란색에 관한 의견들도 있었지만 청색에 관한 언급은 없었습니다.

색과 빛의 신학적 논쟁

한편 12세기까지 중세 신학에서는 “빛은 표현할 수 없는 시계(視界)” 로서 그 자체를 신의 현현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학자들 사이에서 빛과 색의 관계에 관한 상반된 입장으로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즉, 색과 빛이 서로 분리할 수 없는 것이라면 색 또한 신성한 것으로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 교회 내 색의 확산은 악과 어둠을 몰아내는 것과 유사한 것이라는 색을 옹호하는 견해와 색은 신이 창조한 물질에 불과하여 신성을 찾아 볼 수 없고, 인간이 신에게 이르는 길을 방해하는 부도덕한 것이기에 교회에서 배척해야 한다는 견해가 대립되었습니다. 이러한 논쟁의 영향은 신학적인 분야에만 국한되지 않고 기독교가 지배하는 사회의 모든 영역에영향을 미치는 것이었습니다. 색에 관한 의미를 규정짓는 것은 실생활에서 색의 역할을 결정짓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교회 입성에 성공한 파랑

색에 대해 호의적이었던 중세의 고위 성직자 중 쉬제(Suger, 1081~1151)는 그가 원장을 맡았던 생 드니 수도원의 부속 교회를 색에 많은 비중을 두어 재건축했습니다. 이 건축에서는 신을 찬양하기 위한 회화, 조각, 스테인드글라스, 고급 천, 금은 세공품등이 풍부한 색채와 함께 사용되었습니다. 그 중 청색은 신성한 천상의 빛, 모든 창조물을 비추는 빛으로 등장하였고 이 때부터 수세기 동안 서양미술사에서 금색과 청색은 유사어로 통하게 됩니다. 색 중에서도 특히 청색에 관한 개념은 쉬제의 저술 [봉헌에 대하여]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쉬제에 따르면, 보석 중에서 사파이어가 가장 아름다운 보석이며 청색은 곧 사파이어의 빛을 의미하는 것이고, 청색은 교회를 가득 채우는 신성한 신의 색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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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 드니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부분)

샤르트르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부분)

쉬제의 사례는 점차 성직자들에게 전파되었고 이후 많은 고딕양식의 건축에 적용되었습니다. 13세기 중반 건축된 파리의 생트 샤펠 성당 의 거대한 스테인드글라스에 청색이 사용되었는데 붉은색과의 조합으로 보라색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생 드니의 청색”으로 알려진 스테인드글라스의 청색은 “샤르트르 성당의 청색”이 되기도 하고 “르망 성당의 청색”이 되기도 했습니다. 동시에 에나멜 세공에서도 청색 사용이 두드러지고 필사본의 삽화와 성화 등에도 청색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염색에서도 청색의 발색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게 되면서 청색은 사회 전반에 중요한 색으로 화려하게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성모 마리아의 순결, 왕의 권위 - 파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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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세에 그려진 푸른 옷을 입은 성모 마리아

2 장 푸케 [루이 7세의 즉위식] 1455~1500

12세기에 이르러 청색은 아름답고 우아하며 귀족적이고 신성한 색으로 교회와 일반 사회에서유행하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의복과 예술 활동에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이런 변화를 통해 사회적 관습이나 사고방식, 감성의 표현 등에서 색의 서열과 가치가 크게 달라진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성화에서 성모 마리아가 청색 의상을 입고 등장함으로써 청색의 사회적 지위 상승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13세기에 프랑스의 루이 9세와 영국의 헨리 3세는 왕으로서 처음으로 청색 의상을 입기 시작했습니다. 십자군 전쟁에서 귀환한 루이 9세는 금욕의 상징으로서 청색 의상을 입었다는 분석이 있으며, 이후 청색은 유럽 사회에 유행처럼 번지면서 폭넓게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종교개혁 이후 신교도들의 금욕적 교리에서는 색채 사용을 제한하기도 했는데,화려한 의상은 인간을 타락으로 이끄는 것으로 여겨졌고 소박함과 간결한 의상이 권장되었습니다. 이런 일부의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사회 전반에 걸쳐 청색 사용은 중세를 지나면서 지속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부유한 계급의 여유 - 파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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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치아노 [디얀티의 라우라] 1524

프란스 할스 [중년 남성의 초상] 1630

왕실과 귀족을 아우르는 뛰어난 초상 작가로 베네치아의 한 시대를 풍미한 화가 티치아노의 [디안티의 라우라]는 당시 귀족 사회에서 부유함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던 청색 드레스의 화려한 색감을 드러내는 작품입니다. 그림 속에서 흑인 시종 아이의 어깨에 손을 올리는 포즈는 모델로서 자세를 고정해야 하는 방법이자, 어두운 아이 얼굴과의 대조를 통해 여자의 밝은 피부색을 만드는 연출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네덜란드의 인기 초상화가인 프란스 할스의 작품 [중년 남자의 초상]에서는 검정에 가까운 암청색의 의상을 통해 당시 유한계급의 패션 경향을 살펴 볼 수 있습니다. 대단히 빠르게 그림을 완성하고, 유난히 술을 좋아했다고 전해지는 할스의 그림 속 인물들은 마치 작가와 사이좋게 술을 나눠 마시고 취기를 느끼는 듯 홍조를 띤 얼굴에 행복한 미소를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그의 초상화는 엄격하고 근엄한 표정이기 보다는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인간적 면모로 유명합니다. 이 두 그림에서 인물들의 포즈는 비슷하지만 밝은 청색 의상에 대비되는 어두운 배경, 어두운 의상의 윤곽을 살리는 상대적으로 밝은 배경의 처리도 흥미롭습니다.

젊은 베르테르의 연미복 - 낭만의 상징, 파랑

1774년 발표된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질풍노도 시절 낭만적인 사랑의 열병을 앓은 젊은이들을 사로잡아 지금까지 많은 젊은이들이 통과의례처럼 읽는 고전이 되었습니다. 이루지 못할 사랑의 고통에 결국 죽음을 선택하는 베르테르라는 젊은 남자의 짧은 삶을 표현한 소설에서 주인공 베르테르의 의상인 노란 조끼와 파란 상의는 낭만적 사랑의 상징으로 크게 유행하였고, 후일 베르테르 효과라고 알려진 동조자살까지 성행하기도 했습니다. 괴테는 평생 동안 색채연구를 했는데 1810년 색채론을 저술하기도 했습니다. 청색은 괴테의 색채론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색으로 능동적이며 따뜻하고 밝은 색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괴테의 많은 문학작품에서 색채는 낭만주의적 감성표현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특히 독일 낭만주의는 청색을 숭배했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사랑과 우수, 이상적인 존재의 의미 표현을 위해 청색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혁명의 전투에서 자유를 외치는 파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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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빅토르 세네 [1830년 7월 28일 파리시청앞에서의 투쟁] 1833

들라크루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1830

프랑스 대혁명 당시 치열했던 파리 시청 앞의 전투를 담은 장 빅토르 세네의 작품에서는 정부군의 시체를 밟고 바리케이드를 넘어서는 급박한 전투의 현장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부상당한 소년이 높이 치켜 올린 삼색 깃발이 자유, 평등, 박애의 상징으로 혁명의 이념과 당위성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화면에서는 깃발의 삼색 중 청색이 강조되었는데우측의 작품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에서는 깃발의 붉은색이 두드러지게 표현되어 있어색채 사용에 관한 두 작가의 차이를 엿볼 수 있습니다. 또한 장 빅토르의 작품에서는 깃발의 청색을 위해 화면 속 청색이 자제되어 있고, 반대로 들라크루아의 그림에서는 깃발의 붉은색을 강조하기 위해 화면 전체를 통해 붉은색이 억제되어 있습니다. 전투 현장의 긴박감을 표현함에 있어서도 장 빅토르의 작품은이성적이고 현실적인 표현이 강조되고 있는 반면에 들라크루아의 작품은 감성과 열정, 낭만적인 표현이 적극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대혁명에 필요한 이성과 감성을 두 작가가 나누어 표현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두 그림은 색채를 통해 작가의 개인적 시각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예입니다.

세월, 그 쓸쓸함과 슬픔의 파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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툴루즈 로트렉 [물랭 루즈를 떠나는 쟌느 아브릴] 1892

빈센트 반 고흐 [슬픔에 잠긴 노인] 1890

파란색 옷을 입고 호주머니에 손을 넣은 체 혼자서 길을 걷고 있는 여인의 표정이 우울해 보입니다. 여인은 배경의 주조색인 노랑과 강한 보색대비를 이루며 화면 속 모든 것과 분리되어 있습니다.행인들과도 등지고 서 있는 쓸쓸해 보이는 이 여인은 로트렉의 그림 속에 자주 등장하는 잔느 아브릴입니다. 파리의 화려한 사교장 물랭 루즈의 댄서였고, 젊은 날 수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았던 이 여인은 이제 아크등이 휘황한 무대에서 훨훨 춤을 추기엔 너무 많은 나이입니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진다는 젊은 날의 시간들이지만 무용수에게 세월은 더욱 빠르게 몸과 마음의 기력을 빼앗아가고 말았습니다. 이제 잊혀진 과거의 연인처럼 쓸쓸히 물랭 루즈의 거리를 배회하는 여인의 우수를 로트렉은 청색 의상을 통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른쪽의 등을 웅크리고 꽉 쥔 두 주먹으로 얼굴을 가린채 비탄에 잠긴 노인은 생 레미 병원에 머물던 반 고흐가 자살하기 두 달 전 가장 극심한 발작에 시달리던 때의 작품입니다. 세월의 풍파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노인의 처연한 모습은 절망과도 같은 질병에 내몰리며 생의 마지막 시간을 그림에만 매달리던 화가의 고통과 닮아 보입니다. 슬픔을 드러내는 청색은 세월이 만든 인생의 아픔과 허전함을 더더욱 쓸쓸하게 전해 주는 듯 합니다.

표현을 위해 상징적 의미를 부여받은 파랑

프란츠 마르크 [푸른 말] 1911

청기사파 출신으로 표현주의 작가에 속하는 프란츠 마르크는 자연에 내재된 순수한 의식을 동물을 통해 형상화했습니다. 단순한 형태에 임의의 상징적 색채를 사용하는 표현주의 양식으로 자신의 독자적인 화풍을 전개했습니다.

마르크에게 푸른 말은 순수함, 남성성, 엄격함과 지성을 상징하는 존재였습니다. 화가는 자연이 지닌 본질적 순수함이 색채를 통해 드러나고 있다고 믿었는데 노란색은 상냥하고 관능적인 여성성, 붉은색은 물질적이며 야수적이라고 파악했습니다. 마르크는 후일 구체적 형태를 무너뜨리는 조형적 실험을 시작했지만 전쟁에 자원해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 비운의 작가이기도 합니다. 청색은 중세 초기까지 색채의 역사에서 미미한 존재였지만 이후 다른 색과 동등하거나 그 이상의 지위를 획득함은 물론 염색 기술의 발전으로 생활 전반과 창작 활동에서도 다양하게 사용되었습니다.

모든 색은 그 고유의 성질은 물론이고 상호 어우러져 영향을 주고받음에 따라 그 표현력을 무한히 확장시킬 수 있습니다. 색채에 관한 관심은 감상과 창작을 한결 더 풍성하게 만드는 열쇠가 될 것입니다. 다음 편에서는 화면에서의 공간과 깊이를 형성하는 방법에 관하여 설명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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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발행일 : 2010. 03. 04.

출처

제공처 정보

  • 최화삼 화가

    홍익대학교 대학원 서양화과 졸업, 목포대, 전남대등에서 강의했고 5회의 개인전과 초대전 및 단체전 40여 회등을 통해 작품을 발표했다. 한국미술협회 회원이며 드로잉그룹 [몸으로 展하다]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드로잉/서양화 교실 '화실사람들 (http://cafe.daum.net/yourart)을 운영하고 있다.
    이메일: cinefarm@hanmail.net

  • 이미지 TOPIC / corb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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