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우리가 온전히 하나가 될 수 있다면

입력
수정2018.09.06. 오후 9:01
기사원문
본문 요약봇
성별
말하기 속도

이동 통신망을 이용하여 음성을 재생하면 별도의 데이터 통화료가 부과될 수 있습니다.

[한겨레] [책과 생각] 정여울의 내마음속 도서관

<별이 빛나는 밤>, 빈센트 반 고흐, 1889년, 미국 뉴욕현대미술관 소장.


고흐의 편지
빈센트 반 고흐 지음, 정진국 옮김/펭귄클래식코리아(2011)


고흐와 테오의 뜨거운 형제애는 워낙 유명하지만,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를 읽어보면 그 위대한 우애 뒤편에 깔려 있는 불안과 공포, 기대와 원망이 가감 없이 드러난다.

첫 번째 갈등은 부모를 바라보는 관점이었다. 가족의 화합을 중시했던 테오는 고흐에게 ‘부모님께 저항하지 말아라’고 요구하는 편지를 썼고, 고흐는 단호하게 거부한다. “한번은 내 말을 해야지. 나는 이 일로 사과하지 않아. 또 부모님이 계속 이런 식이라면 나도 물러서지는 못해.” 고흐는 아버지가 자신을 향해 던진 폭언을 그대로 인용한다. “참지 못하겠다.” “나를 죽이는구나.” “내 인생은 비참해졌어.” 그는 아버지의 그런 표현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차라리 아버지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이 해방처럼 느껴진다고 토로한다. “어서 내 집에서 나가라, 지금 당장.”이라는 아버지의 말을 들었을 때, 고흐는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 사랑받고 싶은 열망, 장남으로서 부모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까지도.

이렇게 격정적인 ‘화해거부 선언’을 하고 난 뒤에도 고흐는 쓴다. “언제 와서 나하고 차와 커피를 마실 수 있겠니? 곧 와라. 이렇게 빈다. 자고 가도 되고, 얼마나 멋있고 재미있겠니.” 방금 ‘부모님과 절교하겠다’는 선언을 한 뒤 바로 뒤에 ‘제발 나에게 와줘, 우리 둘이 함께한다면 무엇도 두렵지 않아’라는 식으로 애정을 호소하는 형의 야누스적 감정의 격변에 테오는 얼마나 당황했을까.

두 번째 갈등은 예술을 바라보는 관점 차이였다. 테오는 고흐가 조금이라도 예술성과 상업성을 겸비하기 바랐지만, 고흐는 타협하지 않고 보란 듯이 세상의 트렌드를 거스르는 자기만의 작품세계를 구현했다. “이제 화상이든 화가든 사람을 쫓아다니지 않을 거야. 내가 쫓아다녀야 할 사람은 모델뿐이거든.” 테오는 현실과 가족, 의리와 질서를 중시했지만, 고흐는 이상과 열정, 충동과 저항을 사랑했다.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의 대립을 보는 듯한 이 치명적인 갈등은 고흐가 발작을 일으킨 뒤 폭발하고 만다. 그러면서도 고흐는 테오를 향해 간절히 애원하는 편지를 잊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과는 그토록 많은 절교를 반복했던 고흐였지만, 세상에서 유일하게 절연할 수 없는 존재는 바로 테오였던 것이다.

테오의 ‘요구’는 거절하면서도 테오의 ‘존재’는 끊어낼 수 없었던 고흐의 깊은 외로움이 편지 곳곳에서 절절히 배어나온다. 고흐는 공쿠르 형제의 예를 들며 ‘우리도 그들처럼’ 완전히 하나가 되어 무언가를 해내자고 속삭인다. “공쿠르 형제의 책을 다시 읽고 있어. (…)얼마나 대단한 친구들이야! 만약 우리가 지금보다 더 긴밀히 함께한다면, 우리도 온전히 하나가 될 수 있다면, 우리도 그럴 수 있겠지, 안 그래?”

테오와 함께 그림을 그릴 수만 있다면 평생을 따라다닌 지독한 외로움을 이겨낼 수 있을 것만 같았던 고흐. 그는 끝내 화가들의 공동체를 만들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 언젠가 테오의 초상을 그리고 싶었던 고흐의 소망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지금 오베르 쉬르우아즈에는 테오와 고흐가 아름다운 무덤에 나란히 누워 ‘별이 빛나는 밤’을 노래하고 있다. 그들은 각자의 외로움 속에서 너무도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지만, 이제 두 사람 ‘모두’를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서 둘은 마침내 저 하늘에 빛나는 두 개의 찬란한 별이 되었다.

정여울 작가



▶ 한겨레 절친이 되어 주세요! [오늘의 추천 뉴스]
[▶ 블록체인 미디어 : 코인데스크] [신문구독]
[ⓒ한겨레신문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는 언론사에서 생활 섹션으로 분류했습니다.
기사 섹션 분류 안내

기사의 섹션 정보는 해당 언론사의 분류를 따르고 있습니다. 언론사는 개별 기사를 2개 이상 섹션으로 중복 분류할 수 있습니다.

닫기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