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골공원 옆 파봤더니 한글 금속활자가 ‘와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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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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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금속활자 1,600여 점, 세종~중종 때 제작된 물시계의 부품, 세종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천문시계인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그리고 중종에서 선조 연간에 만들어진 총통(銃筒)류 8점과 동종(銅鐘) 한점.

이 많은 유물이 항아리에 담긴 채 불쑥 등장했습니다. 발굴 장소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 79번지. 종로 탑골공원 옆입니다. 문화재청의 허가를 받아 재단법인 수도문물연구원이 발굴 조사하고 있는 '서울 공평구역 제15⋅16지구 도시환경정비사업부지 내 유적(나 지역)'에서 근래 보기 드문 금속 유물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습니다.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표기가 반영된 가장 이른 시기의 한글 금속활자

출토된 유물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건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표기가 반영된 가장 이른 시기의 한글 금속활자'입니다. 이 금속활자들은 조선 전기의 다종다양한 활자가 한 곳에서 출토된 첫 발굴 사례로 그 의미가 크다고 합니다. 특히, 훈민정음 창제 시기인 15세기에만 사용된 동국정운(東國正韻, 세종의 명으로 신숙주, 박팽년 등이 조선 한자음을 바로잡기 위해 간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표준음에 관한 책)식 표기법을 쓴 금속활자가 실물로 확인된 점, 한글 금속활자를 구성하던 다양한 크기의 활자가 모두 출토된 점도 모두 '최초'입니다.

이 밖에도 전해지는 예가 극히 드문 두 글자를 하나의 활자에 표기해 연결하는 어조사의 역할을 한 연주활자(連鑄活字)도 10여 점 출토됐습니다.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이른 조선 금속활자인 세조 때 '을해자'(1455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보다 20년 이른 세종 '갑인자'(1434년)로 추정되는 활자가 다량 확인된 점도 유례없는 성과라고 합니다.

또한, 현재 금속활자들의 종류가 다양해 조선 전기 인쇄본으로만 확인할 수 있었던 여러 활자의 실물이 추가로 확인될 가능성도 있다고 하니, 한글 창제의 실제 여파와 더불어 활발하게 이뤄진 당시의 인쇄 활동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임이 틀림없습니다.

조선 전기에 제작된 자동 물시계의 부품

도기 항아리에서는 금속활자와 함께 세종~중종 때 제작된 자동 물시계의 주전(籌箭, 시보 장치 부품)으로 보이는 동제품들이 잘게 잘린 상태로 출토됐습니다. 동제품은 동판(銅板)과 구슬방출기구로 구분되는 데요, 동판에는 여러 개의 원형 구멍과 '일전(一箭)'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고, 구슬방출기구는 원통형 동제품의 양쪽에 각각 걸쇠와 은행잎 형태의 갈고리가 결합돼 있습니다.

이런 형태는 『세종실록』에서 작은 구슬을 저장했다 방출해 자동물시계의 시보(時報) 장치를 작동시키는 장치인 주전의 기록과 일치합니다. 주전은 1438년(세종 20년)에 제작된 흠경각 옥루이거나 1536년(중종 31년) 창덕궁의 새로 설치한 보루각의 자격루로 추정되며, 기록으로만 전해오던 조선 시대 자동 물시계의 주전 실체가 처음 확인된 것으로 의미가 크다는 게 문화재청의 설명입니다.

조선 초에 사용한 천문시계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활자가 담겼던 항아리 옆에서는 주·야간 천문시계인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가 출토됐습니다. 낮에는 해시계로 사용하고 밤에는 해를 이용할 수 없는 단점을 보완해 별자리를 이용해 시간을 가늠했던 도구죠. 『세종실록』을 보면 1437년(세종 19년) 세종이 4개의 일성정시의를 만든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이번에 출토된 유물은 일성정시의 중 주천도분환(周天度分環), 일구백각환(日晷百刻環), 성구백각환(星晷百刻環) 등 일성정시의의 주요 부품들로, 시계 바퀴 윗면의 세 고리로 보입니다. 현존하는 자료 없이 기록으로만 전해오던 세종대 과학기술 실체를 확인하게 해주는 귀중한 유물입니다.

조선의 소형 화기인 승자총통(勝字銃筒)

소형화기인 총통은 승자총통 1점, 소승자총통 7점 등 모두 8점이 나왔습니다. 조사 결과, 최상부에서 확인되었고, 완전한 형태의 총통을 고의로 절단해 묻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복원된 크기는 대략 50~60cm라고 하는데요. 총통에 새겨진 글자를 통해 계미(癸未)년 승자총통(1583년)과 만력(萬曆) 무자(戊子)년 소승자총통(1588년)으로 추정됐습니다.

제작자인 장인 희손(希孫), 말동(末叱同)의 이름도 새겨져 있는데, 이 가운데 장인 희손은 현재 보물로 지정된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차승자총통>의 명문에서도 확인되는 이름입니다. 만력(萬曆) 무자(戊子)년이 새겨진 승자총통들은 이순신 장군이 왜군에 맞서 빛나는 승전을 거둔 명량 해역에서도 확인된 바 있습니다.

동종(銅鐘)

동종(銅鐘)은 일성정시의의 아랫부분에서 여러 점의 작은 파편으로 나눠 출토됐습니다. 포탄을 엎어놓은 종형의 형태로, 두 마리 용 형상을 한 용뉴(龍鈕)도 있고요. 귀꽃 무늬와 연꽃봉우리, 잔물결 장식 등 조선 15세기에 제작된 왕실 발원 동종의 양식을 담고 있습니다. 종 몸체의 위쪽에 '嘉靖十四年乙未四月日(가정십사년을미사월일)'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어 1535년(중종 30년) 4월에 제작됐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왕실 발원의 동종에는 주로 해서체가 사용된다고 하니, 왕실 발원의 동종과는 차이가 있어 보입니다. 이 종은 1469년에 제작된 거로 추정되는 <전(傳) 유점사 동종(국립춘천박물관 소장)>, 1491년 <해인사 동종(보물)> 등과도 비슷한 양식을 보인다고 합니다.

유물이 출토된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 79번지

유물이 나온 장소는 현재의 종로2가 사거리의 북서쪽으로, 조선 한양도성의 중심부였습니다. 조선 전기까지는 한성부 중부(中部) 견평방에 속했고, 주변에 관청인 의금부(義禁府)와 전의감(典醫監)을 비롯해 왕실의 궁가인 순화궁(順和宮), 죽동궁(竹洞宮) 등이 있고, 남쪽으로는 상업시설인 시전행랑이 있었던 운종가(雲從街)가 있던 곳이죠.

이번에 공개된 유물들은 금속활자들을 제외하면 누군가 잘게 잘라 파편으로 만들어 도기항아리 안과 옆에 묻어둔 것으로 추정됩니다. 또한 활자들은 대체로 온전했지만, 불에 녹아 서로 엉겨 붙은 것들도 일부 확인됐죠. 발굴단은 이 유물들이 사용됐거나 폐기된 시점이 제작연대를 알 수 있는 유물 중 만력(萬曆) 무자(戊子)년에 제작된 소승자총을 근거로 1588년 이후에 묻혔다가 다시 활용되지 못하고 오늘날까지 이어진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출토된 유물들은 현재 1차 정리만 마친 상태로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보존처리와 분석과정을 거쳐 분야별 연구가 진행된다면, 이를 통해 조선 전기, 더 나아가 세종 연간의 과학기술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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