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두대에 오른 마지막 ‘절대군주’

루이 16세

Louis XVI

프랑스 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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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6세 초상화 루이 16세 초상화
루이 16세 초상화
조제프-시프렝 뒤플레시스 작, 1777년
출처 :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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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루이 16세는 루이 15세의 둘째 손자로 1761년 형이자 세손인 부르고뉴 공작 루이 조제프 자비에가 사망하고 1765년에는 부친인 세자 루이-페르디낭이 사망하자 왕위 계승권자가 되었고, 이후 1774년 즉위했다. 국민들로부터 사랑받는 왕이 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유약하고 소심한 성격의 그가 심각한 재정문제를 극복하기란 쉽지 않았다. 결국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하자 그는 혁명정부를 믿지 못한 가운데 프랑스를 탈출하려다 혁명군에 붙들려 프랑스 왕들 중에는 유일하게 재판을 받고 처형당해 사망하였다.

  • 왕가 부르봉(카페) ▶
  • 외국어표기 Louis XVI
  • 공식칭호 루이 16세(Louis XVI), 프랑스 왕
  • 지역 프랑스
  • 재위기간 1774년 ~ 1792년
  • 출생 - 사망 1754년 8월 23일 ~ 1793년 1월 21일
  • 가족관계 부친 : 루이-페르디낭(Louis-Ferdinand, 1729년 ~ 1765년), 세자
    모친 : 마리-조제프(Marie-Josèphe, 1731년 ~ 1767년), 폴란드 왕 아우구스트 3세의 딸
  • 계보 전임자 : 루이 15세(Louis XV, 1710년 ~ 1774년, 재위 1715년 ~ 1774년)
    후임자 : 없음(제1공화정, 1792년 ~ 1804년)

초기 생애와 통치 전반기

루이 16세는 루이 15세의 손자로 세자인 루이-페르디낭의 둘째 아들이었다. 하지만 1761년 형이자 세손인 부르고뉴 공작 루이 조제프 자비에가, 1765년에는 부친인 세자 루이-페르디낭이 사망하자 열한 살의 나이에 새로운 왕위 계승권자로 세자의 지위에 올랐다. 그리고 1767년에는 모친인 마리-조제프마저도 세상을 뜨고 말았다. 어렸을 때부터 엄격한 왕자 교육을 받은 그는 라틴어, 역사, 지리, 천문학, 이탈리아어, 영어 등을 수학하였고, 사냥이나 격한 스포츠도 좋아하여 문무에 능통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그가 가장 좋아하는 취미가 자물쇠 만들기였다는 점은 여러 뛰어난 개인적 능력에도 불구하고 성격상 매우 소심하고 유약했다는 점을 보여 준다.

열다섯 살이 되는 1770년 5월 16일에 루이 16세는 오스트리아 여제인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인 마리아 안토니아(마리 앙투아네트)와 결혼했다. 7년 전쟁 때부터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있었는데 여론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을 프랑스의 숙적이자 7년 전쟁 패배와 연관된 세력으로 호의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즉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결혼은 국민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했고, 이에 따라 루이 16세는 공식석상에서 왕비를 친근하게 대할 수가 없었다.

1774년 루이 15세가 사망하자 스무 살이 된 루이 16세는 부르봉 왕조의 다섯 번째 왕으로 즉위했다. 그는 그 어떤 왕보다도 국민들의 사랑을 받는 군주가 되고 싶어 했고, 충분히 그러한 성격을 지녔으나 정치적 결정력이 부족한 소심한 성격은 그의 치세를 악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그는 먼저 루이 14세가 만들어 놓은 절대왕정 체계의 정책들을 이완시키기 위한 정책들을 펼쳤다. 그는 항상 여론의 향방을 존중하고 이를 참조하면서 정책을 펼치고자 했다.

하지만 다양한 여론들 중에서 그에게 강한 정치적 압박을 가한 계층은 바로 특권계층인 고등법원의 법복귀족들이었다. 이들은 루이 16세가 즉위하자 루이 15세 말기에 추진되었던 모푸의 개혁을 좌절시키고 다시 한 번 자신들의 특권을 수호하는 데 성공하였다. 다른 한편 그는 종교적인 차원에서도 선왕들에 비해 가장 관용적인 태도를 취했다. 1787년 반포된 ‘베르사유 칙령’을 통해 루이 16세는 드디어 프랑스 왕국 내에 비가톨릭교도들, 즉 칼뱅파 개신교도와 루터교도, 유대교도들에게 법적 지위를 보장하였고 그들의 신앙 활동을 인정하였다.

하지만 그가 해결해야 할 가장 크고도 심각한 문제는 바로 루이 14세 말기부터 내려 온 재정문제였다. 루이 15세 당시 플뢰리 추기경에 의해 어느 정도 완화될 수 있었던 재정문제는 이후 재발된 국제전들, 특히 프랑스의 패배로 끝난 7년 전쟁으로 인해 더욱 악화되어 갔다. 튀르고, 말제르브, 네케르와 같은 유능한 행정가들에 의해 왕국의 개혁안들이 추진되었으나 번번이 특권계층들, 특히 고위 성직자와 법복귀족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국가재정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왕국 내 가장 많은 부를 차지하고 있던 이들에 대한 과세가 이루어져야 했지만 이들에 대한 과세 시도는 폭군의 절대주의적 정책으로 비난받았다.

이러한 재정악화 가운데 루이 16세 정부는 7년 전쟁의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1775년에 발발한 아메리카 독립혁명 전쟁에 개입하기 시작하였다. 1778년부터 루이 16세 정부는 아메리카 혁명군의 편에 서서 전쟁에 참가하기 시작했으나 프랑스 국익을 위해서는 그다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783년 파리조약으로 북아메리카 13개 주는 독립을 획득했으나 프랑스는 옛 누벨 프랑스의 영토를 회복하는 데 실패하고 전비만을 지출하여 재정을 더욱 악화시키고 말았다.

통치 후반기와 프랑스 대혁명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루이 16세는 1783년 샤를 알렉상드르 칼론을 재무총감으로 임명하고 재정개혁을 추진하도록 하였다. 칼론은 국가의 신용을 회복하고 국고수입을 늘리기 위해 각종 토목공사와 자원개발 등에 대규모 투자를 실시하였고, 궁극적으로는 왕국 내 모두에게 공평하게 부과될 50분의 1세를 부과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칼론은 1787년 2월 22일의 명사회를 소집하고 새로운 과세를 설명 및 제안하였다. 하지만 칼론은 결국 개혁안 실시에 실패하고 말았고, 4월 8일 재무총감에서 사임하고 말았다.

결국 1788년 9월 국가재정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총신분회의의 소집이 선포되었다. 1614년 루이 13세 당시 소집된 이후에 처음 개최되는 이번 총신분회의를 통해 특권계층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확고히 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들은 당시 프랑스의 전체적인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부르주아를 필두로 한 평민들의 정치적·사회적·경제적 불만이 고조되어 가고 있었고, 특히 이는 1788년의 흉작과 검열의 완화로 폭발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즉 특권계층들은 총신분회의를 통해 왕권을 견제하고 자신들의 입지를 공고히 하려고 했으나 새로운 정치적 주체들인 부르주아들은 그들의 꼭두각시가 되고 싶어 하지 않았다.

1789년 5월 5일 운명의 시간이 다가왔다. 총신분회의가 개최되었으나 곧 표결방식을 두고 대립 상황으로 치닫자 무산되었고, 6월 20일에 국민의회가 조직되었다. 7월 14일에는 성난 파리 민중들에 의해 바스티유가 함락되었고, 8월 4일에는 특권계층의 권리들이 폐지되는 동시에 26일에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이 반포되었다. 이러한 격변 속에서 루이 16세는 왕으로서 어떠한 적극적인 행위도 보여 주지 못했다. 그는 이 새로운 변혁의 물결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고, 결국 10월 5일 파리 여성들의 베르사유 행진 이후 파리로 이주하여 혁명 세력의 감시 아래 놓이게 되었다.

사실 혁명은 입헌군주제를 지지하는 온건파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었지만 루이 16세는 어처구니없게도 프랑스에서 도주할 계획을 세웠다. 결국 1791년 6월 20일 밤 파리를 몰래 빠져나온 루이 16세 일행은 국경 근처 바렌에서 발각되어 25일 파리로 강제 송환되었다.

루이 16세의 도주는 혁명정부는 물론 프랑스 국민들에게도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그의 도피는 우선 혁명정부에 대한 거부를 의미했기 때문에 그나마 입헌군주정의 형식을 통해 그를 왕으로 인정하려던 세력들에게 큰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특히 8월부터 시작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한 유럽 군주들의 반프랑스 혁명동맹 형성은 루이 16세가 궁극적으로 이들과 연합하려 했다는 점을 보여 주었다. 특히 결혼 초부터 환영받지 못했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러한 상황에서 오스트리아의 첩자로 의심받기 시작하였다.

대외전쟁은 혁명을 더욱 급진화시켜 나갔고, 이에 1792년 9월 1일 국민공회는 군주정 자체를 폐지하며 프랑스 최초의 공화정을 선포하였다. 이미 8월에 루이 16세는 폐위당했고 ‘시민 루이 카페’의 지위로 감금되었다. 같은 해 12월 루이 16세는 혁명정부에 의해 혁명의 적으로 고발당했고, 1793년 1월 15일에서 17일까지 열린 재판을 통해 사형을 구형받게 되었다. 결국 1793년 1월 21일 루브르 궁 인근 콩코르드 광장에 설치된 단두대에서 루이 16세에 대한 처형이 이루어졌다. 이는 1649년 잉글랜드 공화정에 의한 찰스 1세 처형과 더불어 유럽에서 두 번째로 시행된 왕에 대한 처형이었다. 그리고 1793년 10월 16일에는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도 처형을 당했다.

루이 16세의 처형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사이에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다. 하지만 첫째인 루이 조제프 자비에 프랑수아는 1789년 6월에 사망했고, 둘째인 루이-샤를은 감옥에 갇혀 방치되어 있다가 1795년 열 살의 나이에 사망하고 말았다. 그는 실제로 왕위에 오르지 못했지만 왕당파들에 의해 ‘루이 17세’로 옹립되었다. 이제 1815년까지 프랑스는 공화정과 제정이라는 전대미문의 새로운 체제들을 경험하며 새로운 역사를 열게 되었다.

가족 관계

• 배우자
- 마리-앙투아네트(Marie-Antoinette, 1755년 ~ 1793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란츠 슈테판 1세의 딸(합스부르크)

• 자녀
- 마리-테레즈-샤를로트(Marie-Thérèse-Charlotte, 1778년 ~ 1851년), 프랑스 세자비(샤를 10세의 아들 루이(사촌)와 결혼)
- 루이 조제프 자비에 프랑수아(Louis Joseph Xavier François, 1781년 ~ 1789년)
- 루이-샤를(Louis-Charles, 1785년 ~ 1795년), 노르망디 공작, 세자[왕당파에 의해 루이 17세로 옹립됨(Louis XVII, 1793년 ~ 1795년)]
- 소피-베아트리스(Sophie-Béatrice, 1786년 ~ 1787년)

참고자료

관련 영화

<마리 앙투아네트>(원제: Marie Antoinette), W.S 반 다이크(W.S. Van Dyke) 감독, (1938년)
<프랑스 대혁명>(원제: La révolution française The French Revolution), 리차드 T. 헤프롱(Richard T. Heffron), 로베르 앙리꼬(Robert Enrico) 감독(1989년)
<마리 앙투아네트>(원제: Marie-Antoinette), 소피아 코폴라(Sofia Coppola) 감독, (2006년)
<페어웰, 마이 퀸>(원제: Les adieux à la Reine), 브느와 자코(Benoît Jacquot) 감독 (2012년)

참고문헌>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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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노 교코, 『마리 앙투아네트 운명의 24시간 - 왕실의 운명을 건 최후의 도박, 바렌 도주 사건』, 이연식 옮김(이봄, 2014년).
사토 겐이치, 『소설 프랑스 혁명』, 전 6권, 김석희 옮김(한길사, 2012년).
서정복, 『프랑스의 절대왕정시대-그 이미지와 실상, 무엇이 위대하고 절대적이었나』, (푸른사상, 2012년).
슈테판 츠바이크, 『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의 장미』, 박광자, 전영애 옮김(청미래, 2005년).
아다치 마사카쓰, 『왕의 목을 친 남자-프랑스혁명의 두 얼굴, 사형집행인의 고백』, 최재혁 옮김(한권의책, 2012년).
막스 갈로, 『프랑스 대혁명』, 전 2권, 박상준 옮김(민음사, 2013년).
이영림, 주경철, 최갑수, 『근대 유럽의 형성 16-18세기』, (까치, 2011년).
임승휘, 『절대왕정의 탄생』, (살림, 2004년).
임승휘, 『근대 유럽의 절대 군주는 어떻게 살았을까?』, (민음인, 2011년).
주명철,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과 마리 앙투아네트 신화』, (책세상, 2004년).
Beaurepaire, Pierre-Yves, La France des Lumières 1715-1789, Paris: Belin, 2014년
Bely, Lucien, La France moderne 1498-1789, Paris: PUF, 2013년
Biard, Michel, Bourdin, Philippe, Marzagalli, Silvia, Révolution, Consulat, Empire 1789-1815, Paris: Belin, 2014년
Petitfils, Jean-Christophe, Louis XIV, Paris: Perrin, 20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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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용진 고려대학교 역사교육과

    홍용진은 고려대학교 서양사학과를 졸업한 후, 동 대학원에서 「중세 말 프랑스 왕정과 ‘국가’ 이데올로기」로 석사를 받고, 파리1대학에서 「왕과 정치사회: 1315-1360년 프랑스 군주정과 정치적 의사소통체계」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시립대학교 도시인문학연구소와 원광대학교 역사문화학부를 거쳐 현재 고려대학교 역사교육과에 재직중이다. 저서로 <지적 권위와 정치권력-중세 말 파리대학과 정치>, <13세기 말∼14세기 초 프랑스 왕권 이미지 생산>(2014년도 역사학회 우수논문상 수상작), <중세 말 프랑스 국가발생과 폭력의 역사 - 필리프 4세와 필리프 5세 시기를 중심으로>가 있고, 공저로 <교육과 정치로 본 프랑스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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