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그룹·미스코리아가 군대 홍보하는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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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무청, 이례적인 ‘여성 병무홍보대사’ 거듭 위촉

몸매 강조한 화보 촬영·위문공연·징병검사 응원

여성은 군대 가는 남성들 사기 높일 ‘도구’?


2016년 3월부터 제12대 병무홍보대사로 활동 중인 2015 미스코리아 진 이민지 씨와 선 김정진·김예린 씨. © 병무청
2014~2015년 제11대 병무홍보대사로 활동한 걸그룹 ‘에이핑크’ © 병무청
 

사진 하나. 워커힐, 얼룩무늬 미니스커트와 스키니진 차림의 미스코리아 여성들이 거수경례하고 있다. 사진 둘. 허리가 잘록하게 들어간 얼룩무늬 미니 원피스를 입고 굽 높은 신발을 신은 걸그룹 멤버들이 깜찍한 포즈를 취했다. ‘밀리터리룩’ 패션 화보가 아니다. 병무청의 공식 병무 홍보 포스터다. 

“‘미녀’를 앞세운 ‘멋진 군대’ 판타지? 병무청은 여성을 ‘군인 사기 진작용 도구’로 여기나 봅니다.” 최근 병무청 홈페이지에 접속했다가 사진을 본 직장인 김병호(29) 씨는 혀를 찼다. “호응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군의 젠더 감수성이 바닥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병무청이 앞장서서 여성을 대상화하는 콘텐츠를 만들다니 실망입니다.” 대학생 김정호(28·연세대 경영) 씨의 평가다. 

‘미녀’ 병무홍보대사는 왜 등장했을까. 2014년, 병무청은 연예병사로 군 복무 중인 남성 연예인이 홍보대사를 맡는 관례를 깨고 걸그룹 ‘에이핑크’를 제11대 병무홍보대사로 임명했다. “젊은 층이 선호하는 걸그룹을 홍보대사로 위촉해 홍보효과를 극대화하고 병역이행에 긍정적인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서였다. 이어 지난해 3월부터 2015 미스코리아 진 이민지 씨와 선 김정진·김예린 씨가 제12대 병무홍보대사로 활동 중이다. 병무청은 이번에도 “군 복무를 앞둔 청년이나 군 복무 중인 병사들에게 여자 연예인이 인기가 많은 점을 고려했다”며 “미스코리아의 밝고 맑은 이미지는 병무청의 슬로건인 ‘밝은 나라 맑은 병역’과도 부합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병역 이행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어떤 활동을 했을까. 모두가 미니스커트·하이힐 등 몸매를 강조한 옷차림으로 화보를 촬영했다. 화보는 병무청 공식 홈페이지, 온라인 포털사이트, 대중교통 광고판 등에 실렸다. 군부대 위문 공연, 징병 검사장을 찾은 남성들을 격려·응원하는 일도 여성 병무홍보대사의 주요 활동이었다. 병무청이 ‘군 홍보’랍시고 젊고 예쁜 여성을 남성의 ‘눈요깃감’으로 소비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 병무청
지난해 3월 28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서울지방병무청에서 병무청 홍보대사 2015년 미스코리아 진 이민지, 선 김정진, 김예린 씨가 징병검사장에서 검사를 받는 남성들을 격려하고 있다. © 뉴시스·여성신문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해 소비하는 일은 이미 국군의 일상에 녹아들었다. 국방홍보원은 매주 국군방송 공개프로그램 ‘위문열차’에 걸그룹을 적극 섭외하고 있다. 군인들에게 인기 있는 걸그룹을 뜻하는 ‘군통령’(‘군대’와 ‘걸그룹 대통령’이라는 개념을 합한 신조어) 호칭을 얻기 위한 연예인들 간 경쟁도 치열하다. ‘아찔 수위’ ‘19금’은 요즘 군부대 위문공연에 자연스럽게 따라붙는 수식어다. 불과 석 달 전에도 탱크톱·핫팬츠 차림의 모 걸그룹이 위문공연 무대에 군인을 불러내 성행위를 연상시키는 춤을 추는 영상이 온라인상 퍼져 논란이 됐다. 

지난해 10월 온라인상 논란을 부른 모 걸그룹의 군부대 위문공연 모습. ©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2015년엔 성 상품화 콘텐츠 일색의 ‘군장병 공식포털’ 사이트가 등장해 파문이 일었다. ‘디시인사이드’ 내 걸그룹 갤러리 등 여성 관련 갤러리 79곳의 게시물을 연동한 사이트였다. “장병들의 사기 진작과 휴식을 위해 걸그룹과 여자 스타의 각종 정보를 제공”한 이 사이트는, 군인들이 여가 시간에 자주 찾는 ‘사이버 지식정보방’ 컴퓨터의 시작 페이지였다. 군인들이 인터넷을 사용할 때마다 여성을 상품화한 콘텐츠를 수십 건씩 본 셈이다.

‘군장병 공식포털’ 갤러리


이런 환경에서 여성은 동등한 시민이 아니라, 남성을 위한 ‘보상’으로 여겨진다고 미국의 군사주의 전문가·여성학자인 신시아 인로는 말한다. 미스코리아 출신 여성이 징병검사를 받는 남성들 옆에서 손뼉 치며 격려하고, 인기 있는 걸그룹 멤버가 “입대를 선택한 당신이 대한민국의 진짜 사나이입니다”라고 말하는 병무청의 홍보 콘텐츠는 ‘군대 다녀온 남성’이야말로 특권을 누려야 마땅할 ‘1등 시민’임을 강조한다. 

병무청의 홍보 콘텐츠는 가기 싫은 군대에 가야 하는 ‘남성의 희생’ 또한 강조한다. 이러한 정서는 “희생에 고마워하지 않는 기득권 여성에 대한 분노로 발전해 여성혐오적인 비난과 행동을 낳”을 우려가 높다. 여성학자 권인숙 명지대 교수가 2005년 저서 『대한민국은 군대다』에서 내놓은 분석이다.

“나라가 남성들을 착취하기 위해서 여성혐오를 부추기는 것 같아요. 군대에 가면 ‘너희는 남자니까 여성과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고 교육하면서, 동시에 여성을 ‘고생한 남자를 즐겁게 해야 할 대상’으로 소비하도록 부추기죠. 그런 분위기에서 젊은 남자들이 20개월가량을 보내고 사회에 복귀하고요. 이런 문화가 이어지는 한, 한국 사회가 차별과 폭력으로부터 안전한 공간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지난해 전역한 김 씨는 “병무청은 여성을 대상화하는 홍보 전략으로 남성들을 구슬리려 하지 말고, 장병의 처우 개선과 군의 인권 감수성 향상에 주력했으면 좋겠다. 그게 병무청이 말하는 ‘밝은 나라 맑은 병역’을 만드는 길”이라고 말했다. 

이세아 기자 (saltnpepa@wome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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