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 대신 전통주 빚는 길 택한 22살 청년농부...김담희 청년창업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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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랑 자주 못놀아 서운하지만 전통주 빚는 것도 아주 재미있죠"

"친구들하고 자주, 오래 놀고 싶은데 술 만드느라 놀 시간이 아주 ‘많이 많이’ 부족하죠. 그 점만 빼면 술 빚는 일이나, 사람들 만나 내가 만든 술을 소개하고, 파는 일은 너무 재미있어요."

김담희씨가 어머니와 함께 디자인한 술병을 들고 있다. /좋은술 제공

2019년 끝자락인 지난달 30일 서울 지하철 신촌역 인근의 한 커피숍에서 만난 김담희씨(사진·22)는 자신의 일에 대해 이 처럼 말했다. 그는 경기도 평택에서 부모님과 함께 전통주를 빚는 청년창업농이다.

나름 화장을 했지만 아직 앳된 얼굴이었다. 복장도 편안한 운동복 바지에 후드 티 차림이었다. 사전에 전통주를 빚는 ‘청년’ 창업농으로 소개받았지만, 전통주를 만드는 이가 이렇게 어릴지 미처 예상하지 못한 터라 약간 당황했다.

궁금한 것이 많은 기자와 달리 그의 심통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오랜만에 평택에서 서울에 올라와 친구들과 놀기로 했는데 점심을 잘못 먹었는지 체해서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다"고 했다.

거침없이 감정을 드러내는 젊음이 부럽다는 생각에 웃음이 났다. ‘친구들을 만나 수다도 떨고, 맛있는 음식도 먹고, 실컷 놀기로 했는데 갑자기 체해서 놀지 못했다. 골이 나지 않겠느냐’는 속뜻이 읽혔기 때문이다.

등에 맨 배낭에, 들고 온 커다란 쇼핑백까지 가출한 소녀처럼 많은 짐도 궁금했다. ‘일하기 힘들어 가출한 것이 아니냐’는 우스개소리에 그는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인터뷰가 끝나면 기차를 타고 순천으로 가족여행을 갈 예정"이라고 했다. 이미 그의 부모님은 그의 언니와 평택에서 출발했고, 본인은 서울에서 출발하기로 계획을 짰다고 했다.

친구들과 놀지 못한 것이 몸이 아픈 것보다 더 화가 날 정도로 젊은 아가씨가 약간은 고루하게 느껴지는 전통주 빚기에 빠진 이유가 궁금했다. ‘젊은 친구가 전통주 맛이나 제대로 알면서 만들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김씨가 부모님과 운영하는 양조회사 ‘좋은술’은 막걸리, 약주, 소주 등의 전통주를 만든다. 대표술인 ‘천비향’은 2014년 ‘아시아 와인트로피 위대한 전통주’에 선정될 정도로 인정받고 있다. 2016년 청와대 만찬주 리스트에 올랐고, 2018년에는 우리술 품평회에서 대상을 차지했다. 포스코와 삼성전자 등의 큰 기업에서도 회식용으로 자주 구매한다.

20대 초반 젊은 친구가 전통주를 빚는 것이 생소하다.

"원래 아빠 쪽(본가) 친척들이 모두 술을 잘 마신다. 본가 식구들이 만날 때는 술이 빠지는 날이 없다. 물론 나도 본가 체질를 닮아 술을 좀 마시는 것 같다. 약주로 1리터쯤 마시면 기분이 좋다.

술 만드는 일은 부모님을 도와드리면서 배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재미없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의외로 재미가 생기더라. 특히 맛좋은 술을 직접 만들어 마실 때 뿌듯한 마음이 들더라."

좋은 술은 술을 빚는데 필요한 누룩을 직접 만들어 사용한다. /좋은술 제공

부모님이 술을 빚기 시작한 이유는.

"대를 이어 술도가를 운영한 것은 아니다. 은행 지점장으로 일하시던 아버지가 은퇴한 이후 엄마의 주도로 술도가 사업을 시작했다. 인생 이모작 프로젝트였다. 아버지가 술을 좋아하셨던 것도 한 가지 이유다.

나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언니와 함께 골프를 배웠다. 프로골퍼가 되고 싶었다. 술 만드는 일은 부모님이 바쁠 때 가끔 도와드리는 정도였다. 그런데 딸 둘이 골프를 배우니 연간 2억원쯤 들었다. 나보다 골프를 더 잘치는 언니가 골프를 계속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고, 나는 골프를 포기했다. 프로골퍼 김아연이 언니다. 나는 대신 엄마 아빠가 하는 전통주 만들기에 본격적으로 참여했다."

힘은 안드나.

"술 빚는 일은 기술도 필요하지만 기본은 육체 노동이다. 어렸을 때부터 골프를 배워, 기초 체력은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누룩을 만드는 일, 밑밥을 짓는 일, 술이 가득 담긴 무거운 항아리를 옮기는 일 등 뭐하나 힘을 쓰지 않는 일이 없다. 전날 일을 많이 하면 간혹 아침에 늦잠을 자는데 이 일로 아빠와 가끔 다툰다. 그래도 쌀과 누룩을 발효시켜 향기 좋은 전통주를 만드는 일이 신기하고 재미있다.

사실 육체노동보다 더 어려운 것은 아직 친구들과 자주, 오래 놀고 싶은데 일을 하다보니 시간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맡은 역할은.

"원래는 일하는 사람을 썼는데 지금은 가족끼리 술을 만들고 있어 한 가지 일만 도맡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누룩도 만들고, 술을 빚어 거르기도 하고, 소주를 내리기도 한다. 여기에 마케팅, 판매도 내가 맡은 몫이 크다.

맡은 일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사람을 만나 우리 가족이 만든 술을 소개하고, 판매하는 일이다. 사람들의 반응이 좋을 때면 술만드는 일을 하기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좋은술에서 만드는 다양한 천비향 선물세트. /좋은술 제공

친구들은 아직 대학에 다닐텐데. 학교에 가고 싶은 생각은.

"처음 술을 본격적으로 만들기 시작할 때는 대학에 다니는 친구들이 부럽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창업농으로서 한 발 한 발 내딛으며 나만의 아이디어로 미래를 구상하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친구들이 조만간 대학을 졸업하는데 ‘좋은 일자리를 잡기도 어렵고, 좀 일찍 취직한 친구들은 어렵게 얻은 직업이지만 스트레스가 많다’고 하소연한다. 술 빚는 일이 쉽지 않지만 이럴 때면 선택을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일반 대학에 다니지는 않지만 공부를 안하는 것도 아니다. 현재 사이버대학에 재학 중이다. 앞으로 공부를 계속해 국내 최연소 양조학 박사가 되는 것이 꿈이다. 이미 지난해 2월 소믈리에 자격을 취득했고, 한국가양주연구소 최고지도자과정도 병행하고 있다."

골프는 안치나.

"친구, 아빠, 사이버농업인연합회 소속 농부들이랑 어쩌다 한번씩 치는데 횟수가 많지는 않다. 1년에 두어번이나 될까 싶다. 그래도 아직 싱글 정도는 친다."

만드는 술에 대해 소개해 달라.

"우리는 막걸리, 약주, 소주까지 다양한 전통주를 만든다. 1년이면 쌀을 30톤(t)쯤 사용한다. 다른 술도가와 차별화되는 점은 우리는 5번 발효시킨 오양주를 만든다는 점이다. ‘천비향’이라는 이름으로 판매한다. 주력 상품인데 제조 관련 특허도 여럿 가지고 있다. 천비향은 맛과 향을 인정받아 ‘우리술 품평회’ 약주 부문 대상, ‘대전 국제와인 페어’ 전통주 부문 대상 등 상도 많이 받았다.
우리는 맛과 향을 최고 상태로 만들기 위해 걸러낸 약주를 저온 창고에서 짧으면 3개월, 길면 1년쯤 숙성시키는데 다른 술도가에서 만드는 전통주보다 상대적으로 숙성기간이 긴 편이다." 전통주는 누룩과 맵쌀을 섞어 만든 밑술에 찹쌀 고두밥을 추가로 넣어 발효시키는 과정을 거치는데 횟수에 따라 이양주, 삼양주, 사양주, 오양주라고 구분해 부른다.

술을 빚을 때 사용하는 고두밥. /좋은술 제공

알코올 도수가 높지 않은 술을 오래 숙성시키면 상하지는 않나.

"주력 제품인 약주는 알코올 도수가 20도 미만으로 아주 높은 편이 아니지만 저온에서 오래 숙성해도 상하지 않는다. 오히려 술맛과 향이 좋아진다. 오래 숙성시킬수록 알코올 특유의 싫은 냄새가 사라지고 부드러워진다. 쌀 특유의 향과 맛이 강해지는 것도 신기하다. 제대로 숙성된 술은 숙취도 거의 없다."

오래 숙성하면 생산비가 높아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사실 우리 술은 좀 비싼 편이다. 발효 횟수와 숙성 정도에 따라 가격이 다른데 500ml 기준으로 가장 저렴한 막걸리가 8000원, 1년 숙성한 고급 약주는 3만원이다. 비싸다고 하는 사람도 많지만 요즘 옛날처럼 술을 많이 마시지도 않고, 가격보다는 품질을 따지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지 판매가 꾸준하다. 품질을 인정받아 롯데백화점과 신세계 백화점에 제품을 공급하고 있다."

향후 목표는.

"주변에 거부감 때문에, 또는 비싸거나, 맛이 없어서 소주나 전통주를 외면하는 젊은 친구들이 많은데 내 꿈은 2030 세대가 부담 없는 가격과 맛으로 즐길 수 있는 전통주를 만드는 것이다.

충분히 맛있으면서 숙취가 없는 막걸리, 고리타분하지 않은 맛과 향을 지닌 전통주를 빚기 위해 시간이 날 때마다 시장분석, 제조원가, 포장 디자인 등을 연구하고, 농업기술센터에서 SNS 마케팅을 배우고 있다.

또 내가 개발한 전통주를 기반으로 가족, 연인 등이 자유롭게 찾아와 체험, 구매, 식사를 즐길 수 있는 ‘패밀리 카페테리아’를 열고 싶다. 그날그날 약간씩 다른 술 맛에 따라 음식 메뉴와 분위기를 다르게 하는 페어링(pairing) 공간을 조성하면 남녀노소 모두가 좋아하는 명소가 될 것 같다.

그리고 술도가는 술을 좋아하는 어른들이 주로 찾는데, 나는 술 지게미를 이용해 아이들이 쿠키나 빵을 만드는 체험을 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박지환 농업전문기자 daebak@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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