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번째 도전에서야 터진 동대문 B2B 신상마켓, 네이버가 알아봤다

입력
수정2021.04.27. 오전 9:27
기사원문
최민영 기자
본문 요약봇
성별
말하기 속도

이동 통신망을 이용하여 음성을 재생하면 별도의 데이터 통화료가 부과될 수 있습니다.

[최민영의 혁신 탐구생활]
아날로그 거래 관행이 오래 이어져온 동대문 의류 도매시장에서 정보기술(IT)을 활용해 주문, 물류 과정을 혁신하는 신상마켓 운영사 딜리셔스 김준호 대표.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동대문 보세 의류를 사고파는 앱 ‘신상마켓’은 아무나 이용할 수 없다. 소매 쇼핑몰을 모아서 보여주는 대부분의 패션 앱과 달리, 동대문 의류 도매시장의 도매상과 이들에게서 옷을 떼어다 파는 소매 사업자들만 이어주는 앱이기 때문이다. 사업자 등록 번호가 있는 상인들만 이용할 수 있다. ‘사입삼촌의 물류 대행’, ‘현금 거래’, ‘수기 장부 작성’과 같은 아날로그 방식으로 오랫동안 거래해 온 동대문 의류 시장에도 신상마켓과 같은 정보기술(IT) 플랫폼이 속속 등장하며 ‘디지털 전환’ 바람이 불고 있다.

기업 간 거래(B2B) 서비스인 터라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하지만, 신상마켓은 2013년 7월 출시된 이래로 9년째 순항하고 있다. 처음 서비스를 내놨을 땐 상인들에게서 “굳이 앱이 필요한가?”란 얘기도 들었지만 지금은 동대문 도매상 2만여곳 중 1만3천곳, 전국 소매 사업자 11만곳이 이용한다. 2017년 10명이 채 안 됐던 직원 수도 4년만에 170명 수준으로 불어났다. 최근엔 네이버의 글로벌 이커머스 사업 파트너로 꼽혔다. 최초의 동대문 패션 B2B 플랫폼으로 시작해 1등 사업자로서 입지를 굳히고 있다.

신상마켓의 성과는 하루아침에 얻어진 것은 아니다. ‘시장과 고객 요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명제는 당연한 말처럼 들리지만, 김준호 대표와 딜리셔스 팀은 이 당연한 말을 실제 사업에 적용하기까지 8번의 실패를 겪었다. “패션 사업자들이 패션의 본질에 집중하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라는 질문을 9번의 시도 만에 찾아낸 이야기를 지난 20일 서울 종로구 딜리셔스 사무실에서 김 대표와 만나 들어봤다.

서울 종로구 홍익대 대학로캠퍼스에 위치한 딜리셔스 사무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사입 삼촌, 현금거래, 수기 장부…‘아날로그’ 동대문 의류 도매시장을 IT 기술로 바꿉니다


김 대표의 사업은 2007년 건국대 소프트웨어학과 4학년에 함께 재학 중이었던 아내의 인터넷 쇼핑몰을 도와주면서 시작했다. 쇼핑몰 사장인 아내가 새벽에 동대문 시장에 가서 물건을 떼오고, 상품 촬영, 택배 발송, 세금계산서 발행 등을 혼자서 하기엔 벅찰 것 같아 운영 업무를 맡아서 했다. “아내는 좋은 옷을 찾고 이 물건을 콘텐츠로 만드는 일을 했고, 저는 쇼핑몰 홈페이지를 만들고 관리했습니다. 사업에 꼭 필요하지만 패션과는 상관없는 세무, 회계, 물류 등 운영 업무를 한 거죠.”

신상마켓이 운영하는 다양한 서비스는 김 대표 부부가 쇼핑몰을 운영하며 느꼈던 불편함, ‘동대문 시장의 아날로그’ 해소에 뿌리를 두고 있다. 동대문 시장에 직접 가지 않아도 도매 사업자가 플랫폼에 올린 물건을 보고 소매 사업자가 주문할 수 있고, 현금이 직접 오가는 방식보다 안전하게 대금을 치를 수 있도록 간편결제를 도입한 게 그 예다. 도소매 사업자가 상품을 올릴 때 사용할 사진 자료를 대신 만들어주는 서비스도 있다.

“쇼핑몰 사업 초기에는 일과시간 동안 소매를 운영하고 매일 밤 동대문 시장을 돌아요. 시간이 흘러 거래를 트는 가게들이 생기면 동대문 시장 고유의 물류 대행 업자인 ‘사입삼촌’에게 주문과 발송을 맡기긴 합니다. 그런데 이 방식은 불안해요. 사입을 많이 할 땐 한 번에 수백만원어치 옷을 사는데 사입삼촌의 통장으로 목돈을 입금하고 물건이 오기를 그저 기다려야만 하거든요. 물론 사입을 하다 문제가 생긴 적은 없었어요. 하지만 모르는 사람에게 큰 돈을 이체하는 방식은 편하지는 않죠. 사입삼촌들은 2명에서 10명까지 팀을 이뤄서 일하는데, 동대문 시장에는 몇 년에 한 번씩 어떤 사입팀이 갑자기 자취를 감췄다는 소문이 돌곤 해요. 이런 식의 아날로그 거래를 계속 해야하나 걱정이 되죠.”

서울 종로구 홍익대 대학로캠퍼스에 위치한 딜리셔스 사무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잘하는 건 당연, 못하면 티 나는 물류…좋은 옷에 더 집중하도록 신상마켓이 대신합니다


신상마켓은 도매 사업자의 상품을 소매 사업자들에게 보여주는 것에서 한발 더 나아가, 소매 사업자의 모든 물류 과정을 대신해주는 ‘풀필먼트’도 한다. 소매 사업자의 쇼핑몰에서 주문이 일어나면 신상마켓 쪽이 도매상에서 직접 물건을 들여와서 검수, 포장, 배송 작업을 대행하는 식이다. 김 대표는 “패션업의 본질은 사업자가 좋은 옷을 골라서 소비자에게 제시하는 것”이라며 “사업자가 옷에 집중할 수 있도록 나머지 과정을 모두 도맡아 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신상마켓의 바탕이라고도 할 수 있는 ‘패션의 본질’에 대한 나름의 정의는 김 대표가 딜리셔스를 창업하고 아내의 쇼핑몰이 문을 닫는 과정을 거치면서 내릴 수 있었단다.

한국에도 스마트폰이 보급되기 시작했던 2011년 1월 김 대표는 쇼핑몰 사업에서 손을 떼고 딜리셔스를 창업했다. 쿠팡, 티몬, 위메프와 같은 소셜 커머스에 뛰어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딜리셔스 창업 뒤 쇼핑몰은 점점 어려워졌다. “아내가 했던 좋은 옷을 고르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제가 했던 물류와 세무, 회계 등 ‘뒷단의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이 운영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쇼핑몰이 굴러가지 않더라고요. 아내 혼자 모든 일을 하게 되자, 좋은 상품을 확보해 좋은 사진을 찍어서 올리는 데 집중할 물리적인 시간이 부족했어요. 쇼핑몰에 올리는 콘텐츠 수가 줄어들고 질도 낮아지고, 상품 출고 등에서도 실수가 이어졌습니다.”

부부의 쇼핑몰은 한때 50위권에 들 정도로 잘됐지만 운영이 부실해지며 2012년 5월 결국 문을 닫았다.

소셜커머스 사업도 6개월 만에 실패로 돌아갔다. 소셜커머스는 지역 매장의 점주를 설득해서 상품 가격을 할인을 받고, 마케팅을 통해 여러 사람에게 딜을 알려서 할인받은 상품을 소진해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딜을 가져오는 것부터 난관이었다고 한다. “대형 업체들이 기반을 쌓은 서울을 피해 동탄 등 수도권 신도시로 갔어요. 이 대형 업체들은 서울에서 쌓은 영업력을 가지고 금세 지방으로 오더라고요. 또 막상 해보니 소셜커머스라는 방식 자체가 윈윈할 수 없는 구조였습니다. 상인을 설득해서 50% 할인된 딜을 진행하면, 이 딜을 이용했던 소비자들은 할인된 가격이 정가라고 생각해 지속 가능하지도 않았습니다.”

서울 종로구 홍익대 대학로캠퍼스에 위치한 딜리셔스 사무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시장의 상황, 고객의 수요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


실패는 반복됐다. 1년 넘게 8가지 사업에 도전했지만 아무런 시장의 반응을 얻을 수 없었다. “시장의 수요를 고려하기 보단, 우리가 만들고 싶은 걸 만들다 보니 시행착오 시기가 길어졌다”며 “문제를 발견하거나 고객의 수요를 찾고, 사업으로 발전시키는 과정 자체가 어려웠다”고 그는 말했다. 신상마켓 출시 직전에 내놓았던 지역기반 서비스 ‘아이랑 외식하기’는 앱스토어 라이프스타일 카테고리에서 1등을 차지한 적도 있었지만 이 서비스도 수익화 실패로 또 접었다.

신상마켓은 거듭된 실패 끝에 동대문 도매시장에 취직이라도 하자는 생각으로 다시 동대문을 들여다보다 시작했다. “쇼핑몰 경험을 떠올려보니 모바일 시대에 맞게 도소매 사업자를 연결하면 사업 기회가 생길 것 같았어요. ‘아직 이런 서비스가 없다면 우리가 해보자’ 했죠. 목표는 동대문의 전통적인 거래 방식을 디지털로 옮겨와 편리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2013년 여름, 신상마켓을 앱을 내놓고 그 해 8~9월 두 달 동안 발로 뛰면서 전국의 도소매 사업자들에게 서비스를 알렸다. 전단지 1만장을 만들어서 동대문 도매시장과 서울, 수도권의 소매 상점들을 직접 돌았다고 한다.

“동대문 시장은 수많은 사업자가 한 곳에 모여있는 구조라 입소문이 금방 났어요. 신상마켓 만큼은 고객의 요구를 가장 윗단에 둬야겠다고 생각한 터라 상인들이 말해주는 앱 사용 후기에 민감하게 반응했어요. 서비스 초기에는 1년 동안 앱 업데이트를 180번 했을 정도로 고객 목소리를 들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앞선 사업은 왜 실패했고 신상마켓은 성공했을까 자문자답해보면, 시장과 고객을 고려했는지 여부가 달랐던 것 같아요. 추석, 설 등 명절이나 여름휴가처럼 가족과 지인을 만나는 시기가 지나면 각종 지표가 올라가는 경험을 하고 있는데, 서비스가 개선되는 모습을 본 기존 고객들이 입소문을 내줘서가 아닐까 짐작합니다.”

 급격한 디지털 전환보단, 관행 존중하고 기존 플레이어와 협업하며 ‘속도 조절’


신상마켓이 동대문 시장의 거래를 디지털로 옮겨오는 과정에서 중시한 부분은 ‘관행 존중’이라고 한다. 아무리 혁신적인 서비스라도, 실제 이용할 이들에게 낯설면 의미가 없다고 봐서다. “관행에는 다 이유가 있으니까요. 수십년간 이어지던 방식이 잘 작동하는데, 신상마켓이 갑자기 새로운 방식을 제시하면 아무도 따라오지 않을 거에요. 관행을 크게 뒤흔들지 않으면서 편리함을 더하는 방식을 추구합니다. 예를 들면, 인기 있는 도매상은 자정에 문을 열면 전화주문이 폭주해요. 소매상들은 통화 중인 도매상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서 우연히 전화가 되면 주문이 가능하죠. 도매상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주문을 선착순으로 받되, 앱을 통해서 정확한 시간으로 선착순을 마감하는 걸 도와주는 식입니다.”

사람이 하던 일을 기술이 대체하면 충돌과 갈등도 불가피하다. 신상마켓이 동대문 시장의 물류를 대행하면, 수십년간 동대문의 물류를 맡아온 사입삼촌들이 사라질 수 있다. 이에 대해 김 대표는 “디지털 전환이 고객에게 분명한 이익을 가져다주는 방향이라면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서도 “지금은 사입삼촌과 협업하는 방법을 찾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신상마켓에 들어오는 물류 요청이 많거나, 사입삼촌을 별도로 찾고 있는 도소매 사업자들에게 동대문 시장 사입팀을 소개하며 일감을 나누는 식이라고 한다.

디지털 전환 이후의 목표는 글로벌 시장 진출이다. 딜리셔스는 지난해 네이버에서 76억원 투자를 받고, 네이버와 함께 동대문 표 옷을 해외에 판매할 계획을 갖고 있다. “최근 케이(K) 패션이 해외에서 큰 관심을 받고 있는데, 그 중심에 동대문이 있죠. 동대문은 반경 5~10km 안에서 옷의 디자인, 생산, 유통이 이뤄지기 때문에 빠른 유행에 맞춘 다품종 소량생산에 적합한 생태계입니다. 아직 글로벌 시장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잠재력이 크죠. 신상마켓도 이미 트래픽의 3%가 해외에서 발생합니다. 지금은 번역도 안 된 화면을 보고 주문을 하는 상황이지만 앞으로는 글로벌 바이어들이 제대로 이용할 수 있는 서비스로 발전시키고자 합니다.”

신상마켓 운영사 딜리셔스를 창업한 김준호 대표.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좋은 문제를 발견해 해법 제시하면 부족한 스펙은 충분히 극복할 수 있죠


투자와 사업이 순서가 뒤바뀌어 진행된 점도 딜리셔스가 보통의 스타트업과 다른 점으로 꼽힌다. 대부분의 스타트업은 사업 아이템만 있는 상태에서 투자를 먼저 받지만, 딜리셔스는 도매 사업자로부터 받는 광고 수입만으로 신상마켓을 운영하다가 2017년에 20억원의 첫 투자를 받았다. 이 돈을 다 쓰기도 전에 투자 문의가 밀려들었고, 지금까지 누적 투자금액은 총 255억원이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아이디어만 갖고 투자받는 걸 잘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딜리셔스가 그걸 잘하는 팀은 아니더라고요. 그렇다면 사업으로 보여주자고 생각했죠. 투자자를 찾기보단 고객에 집중하는데 시간을 많이 썼어요.”

뛰어난 스펙을 가진 팀이 아니더라도 시장과 고객에 집중하면 충분히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는 조언도 했다. “배경이나 스펙으로 투자를 받는 경우가 많지만, 이런 조건 아니라면 현실을 빨리 인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시장, 좋은 고객, 좋은 문제를 찾아서 의미 있는 결과를 만들어낸다면 투자자들의 시선이 달라질 것이거든요. 고객이 있고 수익화 가능성이 보이는 사업이라면 그때부턴 투자자들도 창업자의 스펙 위주로 평가하진 않는 것 같아요. 가장 중요한 것은 시장과 고객에게 집중해서 기존의 문제를 찾고, 제품으로서 해법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최민영 기자 mymy@hani.co.kr

▶더불어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언론, 한겨레 구독하세요!
▶esc 기사 보기▶4.7 재·보궐선거 이후 기사 보기


[ⓒ한겨레신문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자 프로필

이 기사는 언론사에서 IT 섹션으로 분류했습니다.
기사 섹션 분류 안내

기사의 섹션 정보는 해당 언론사의 분류를 따르고 있습니다. 언론사는 개별 기사를 2개 이상 섹션으로 중복 분류할 수 있습니다.

닫기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