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권국가로서 신라를 정립하다

법흥왕

法興王

인물한국사

비슷한 글13
보내기 폰트 크기 설정
출생 - 사망 ? ~ 540

법흥왕은 율령을 반포하고 불교를 공인하며 나라의 틀을 세웠다. 고구려의 소수림왕보다 늦지만 법흥왕은 그와 다른 신라만의 무엇을 생각했다. 그것이 화랑이었다.

소수림왕이 유교를 받아들여 태학을 세우고, 그래서 그것으로 나라의 기둥이 될 젊은이를 키우려 했다면, 법흥왕은 화랑을 내세웠다. 화랑은 신라 고유의 종교에 바탕을 둔다. 신라가 신라일 수 있었던 밑바탕, 중국의 유교를 가르치지 않고 신라 고유의 정신으로 무장시키는 교육제도인 화랑이다.

1 소수림왕을 벤치마킹하다

흔히 고대 왕권국가의 성립 요건을 율령(律令)의 반포에 둔다. 이 기준에 따른다면 고구려는 소수림왕 때, 백제는 고이왕 때 율령을 반포하면서 왕권국가의 자격을 갖추었다.

이에 비한다면 신라는 사뭇 느리다. 고구려에 비한다면 150여 년, 백제에 비한다면 250여 년이 늦은 법흥왕 때에 와서야 이루어졌다. 이런사실 때문에 신라의 후진성을 말한다.

비록 그렇다고는 하나 후발주자로서 신라는 앞선 두 나라가 가지지 못한 혜택이 있었다. 두 나라의 경우를 예의 관찰하며 그 허점을 버리고 장점을 채택할 기회를 가졌다는 점이다. 특히 법흥왕은 고구려 소수림왕이 취한 일련의 조치를 거의 그대로 따라했다. 오늘날의 말로 벤치마킹이라고나 할까.

소수림왕은 고구려의 국격(國格)을 갖춰낸 이이다.(이에 대해서는 ‘인물과 역사’의 소수림왕 편참조) 372년 불교공인과 태학의 설립, 373년 율령의 반포는 사상과 교육과 법률의 틀을 마련하는 소수림왕의 업적이었다. 그는 즉위 3년 만에 이를 발 빠르게 마무리지었다.

불교를 받아들이는 까닭에 대해서도 소수림왕 편에서 말한 바 있다. 같은 시기 중국의 불교는 한참 도약하는 중이었다. “혼돈된 사회상은 불교로부터 해답을 요구함으로써 영혼불멸설·인과응보설·전세윤회설 등 정신적 해탈을 추구하게 하는 불교 교의가 발달”(정수일, [고대문명교류사]에서)하였다.

이렇게 발달한 불교를 고구려는 왕이 직접 승려를 맞이해, 사원을 세우고 승려와 신자들을 키웠다. 전파라기보다 고구려가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처럼 보인다. 불교의 교리를 원용하여 왕의 권위를 만들려는 의도가 다분히 있었다.

불교 공인과 함께 유교적 정치이념에 충실한 인재를 키울 태학이 설립되었다. 불교와 유교를 동시에 받아들인 것이다.

그리고 바로 다음 해인 373년, 율령을 반포하여 국가통치와 사회질서 유지를 위한 규범을 갖추었다. 이는 소수림왕이 펼친 정책 개발의 완성이었다. 법흥왕은 소수림왕의 이런 정책을 고스란히 따라했다.

2 왕권국가의 기초를 닦은 법흥

법흥왕은 지증왕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인 지증왕 때 처음으로 중국식 시호(諡號)를 쓰기 시작했다는 점에 유의해 보자. 차차웅이니 마립간이니 거서간 같은 신라식 왕의 이름이 나쁘지 않으나, 시호의 사용은 당대 문명의 선진성에 다가가는 증표로 뜻깊다. 이는 곧 왕권의 강화와도 연결하여 생각할 수 있다.

유독 민간신앙이 강하고 중신(重臣)의 권한이 센 나라가 신라였다. 화백제도로 대표되는 초창기 신라의 정치체제가 그렇다. 왕은 화백의 합의에 의해 올려져, 신궁의 제사를 관리하는 정도 아니었을까 한다. 차차웅, 마립간, 거서간 등이 모두 무당을 일컫는다는 김대문의 기록을 참고해보라.

그러던 왕이 정치적인 힘을 갖추었다는 증표가 시호의 사용이다. 이는 물론 지증왕 때에 이룩되었다고 하기보다, 시호는 다음 왕대에 정해지는 것이므로, 실은 법흥왕에 이르러 이루어진 조치였음을 알 수 있다.

왕비는 박씨 보도부인이었다. 법흥왕에게는 “성품이 너그럽고 후덕하여 사람들을 사랑하였다”는 평가가 [삼국사기]에 실려 있다. 왕은 즉위 7년(520)에 드디어 율령을 반포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다.

그리고 8년 뒤인 15년, 이차돈의 죽음을 계기로 불교가 공인된다. 율령 반포와 불교 공인으로 왕권 국가의 틀을 마련한 것이다.

탄력을 받은 법흥왕은 정치적으로 매우 의미있는 세 가지 일을 이루어냈다. 첫째는 18년에 상대등을 신설한 것이다. 오늘날의 국무총리에 비견되어, 왕과 신하 사이의 완충 역할을 하는 자리가 상대등이므로, 왕은 그만큼 한 단계 높은 권위를 보장 받는다고 할 수 있다.

둘째는 19년에 가야를 병합한 것이다. 신라의 국력이 신장되었다는 데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셋째는 23년에 처음으로 연호를 일컬어 ‘건원(建元) 원년’이라 한 것이다. 시호의 사용과 함께 이 또한 신라의 국격이 한층 높아졌음을 웅변한다.

한마디로 법흥왕은 고대 왕권국가로서 신라를 정립시킨 왕이었다. 그만한 공을 세우고 27년간 왕위에 있다가 죽었다. 왕릉은 애공사 북쪽 봉우리에 있다고 [삼국사기]는 전한다.

3 법흥왕의 불교 공인이 고구려와 다른 점

율령의 반포와 불교 공인이 가지는 의의는 앞서 설명하였다. 법흥왕이 소수림왕의 경우를 충분히 살피고 이에 따랐다는 점에도 달리 이의가 없을 것 같다. 다만 두 왕 사이에는 두 가지 차이가 있다. 이는 고구려와 신라의 차이였다.

첫째는 두 사건이 일어난 순서이다. 고구려는 불교 공인이 먼저이고 이어 율령 반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신라는 반대이다. 율령을 반포하고 불교를 공인하는데, 그 사이도 8년이나 떨어져 있다. 고구려의 불교 공인과 율령 반포가 1년 사이에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점과도 대조를 이룬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불교에 관한 한 신라는 극심한 우여곡절을 겪었다. 곡절은 언제 처음 불교가 신라에 들어왔는지부터 시작하였다. 고구려나 백제와 달리 신라의 불교 유입을 설명하는 유력한 주장만도 세 가지나 된다.

첫째, 눌지왕(417~458)과 비처왕(479~500) 시대라는 [삼국사기]의 주장, 둘째, 법흥왕(514~540) 때라는 [해동고승전]의 주장, 셋째, 미추왕(262~284) 때라는 [수이전]의 주장이 그것이다. 신라에게 불교가 얼마나 골치 아픈 상대였는지 말해주는 반증이다.

신라에 불교가 들어온 경로는 여러 가지였고, 신라에 불교를 전파하려는 시도 또한 여러 차례였음을 말한다. 그만큼 전파가 쉽지 않았다. 실패에 실패를 거듭한 끝에 겨우 성공을 거두었다.

새롭게 들어오는 불교는 민간신앙과 그 격을 달리할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해 새로운 세력이 형성되는 계기를 만들어주어, 기존 세력의 경계대상이 되었다. 이것이 어려운 상황의 핵심적인 배경이었다.

기존 세력이 새로운 불교세력을 경계하는 가장 큰 까닭은 왕이 그들을 비호한다는 데 있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법흥왕 이후 왕실은 보다 강력한 통치체제를 만들어 기존의 귀족세력보다 큰 힘을 행사하려 했다.

불교라는 종교는 새로운 이념을 제공해주기에 족했다. 그들은 왕족을 부처님의 일족으로 격상시키며 신성한 권력을 만들어 나가려 했다. 법흥왕은 그런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불교를 공식종교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왕은 부처의 신성성을 얻고, 이제까지와는 다른 권위로 신하를 다스릴 수 있다. 그러므로 법흥왕의 불교 공인에는 고도의 정치적인 계산이 깔려 있었다.

법흥왕은 여기에 이차돈이라는 젊은 신하를 적절히 이용하였다. 기존 세력의 저항에 새로운 젊은 세력을 붙여 대항시킨 것이다. 게다가 이차돈의 불심(佛心)은 정치적인 목적이 깔려 있는 법흥왕의 의도보다 더 높았다.

그는 왕에게 당당히 “제가 저녁에 죽어 커다란 가르침이 아침에 행해지면, 부처님의 날이 다시 설 것이요, 임금께서 길이 평안하시리다”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부처의 날과 임금의 평안을 위해 두 사람 사이에 시나리오가 만들어졌다.(이차돈의 순교에 관해서는 ‘인물과 역사’의 이차돈편 참조)

한 사람이 목숨을 바쳐가면서까지 불교 공인을 이뤄내야 할 만큼 신라의 상황은 고구려와 달랐다. 소수림왕이 전격적으로 불교를 받아들이고 사찰을 지은 것과는 아연 다르다.

불교 공인 후 율령을 반포하는 보다 순조로운 정치적 역정을 걸었던 소수림왕에 비해 법흥왕은 도리어 여기에서 걸려 시간을 끌고 있었다. 우리는 율령 반포가 먼저 이루어진 신라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잘 살펴야 한다.

둘째는 불교에 대한 소수림왕과 법흥왕의 태도이다. 불교를 받아들이면서도 소수림왕 자신이 독실한 불교신자였는지 알 수 없다. 이에 비해 법흥왕은 단순한 정치적 목적을 떠나 자신이 불교에 심취했다. 그가 죽은 후 왕비는 출가하기까지 한다.

법흥왕은 불교 공인 이듬해인 16년에 살생을 금지하는 조치를 내렸다. 그의 불교 공인이 정치적 제스처만이 아님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더욱이 필요에 따라 전격 수입된 느낌을 주는 고구려와 달리 신라는 아래로부터 불교가 뿌리 내리고 있었다.

4 또 하나의 업적인 화랑의 탄생

법흥왕의 치세기간 동안 우리의 주목을 끄는 대목이 화랑의 출발이다. 알다시피 화랑은 원화로부터 시작하였다. 원화는 신라 특유의 신궁(神宮)에서 종사하는 여성이었다.

신궁이 만들어진 때는 조지왕9년(487)이다. 그러므로 원화는 487년 이후부터 존재했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 원화가 언제 화랑으로 변모하는가이다.

그동안 우리는 화랑으로 바뀌는 계기를 남모준정의 싸움으로 알고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모두 그렇게 쓰고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준정을 교정이라 하였는데, 준(俊)과 교(姣)의 글자가 비슷한 데서 온 혼란인 듯하다.

다른 기록을 참조하건대 아마도 [삼국유사] 쪽이 오자인 듯하다. 싸움의 원인은 준정이 질투한 남모의 아름다움이었다.

이 사건은 진흥왕때 벌어졌다. 이 사건을 해결하고 남자로 화랑을 세우는데, 그렇다면 화랑의 출발은 진흥왕 때라고 할 수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설원랑을 받들어 국선으로 삼았으니, 이 이가 화랑국선의 시초라고 하였다. 진흥왕 37년(576)이었다.

그런데 [동국통감]에서는 법흥왕 말년이자 진흥왕 원년에 풍월주라 부른 화랑이 탄생하였다고 썼다. 사실 화랑의 출발이라는 진흥왕 37년은 다른 사건 하나 때문에 모순이다.

화랑인 사다함이 가야정벌에 출전하여 공을 세웠는데, 이 일은 진흥왕 23년(562)에 벌어졌다. 아직 제도도 갖추어지지 않았는데 웬 화랑이란 말인가. 여기에서 [화랑세기]의 서문이 어떤 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다.

“지소태후가 원화를 폐지하고 화랑을 두어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받들도록 하였다. 이보다 앞서 법흥대왕이 위화랑(魏花郞)을 아끼어 화랑이라 불렀는데, 화랑이라는 이름은 여기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지소태후는 법흥왕의 딸이며 진흥왕의 어머니이다. 진흥왕이 즉위하였을 때의 나이는 일곱 살. 그래서 태후가 섭정을 하였다. 그런 태후가 화랑을 두었다는 때는 [동국통감]의 기록과 일치한다.

문제는 ‘이보다 앞서’ 법흥왕이 이미 화랑이라는 말을 썼다는 것이다. 위화랑은 [화랑세기]에 따르면 제1세 풍월주이다. 그렇다면 이미 법흥왕이 화랑의 밑돌을 깔았다는 뜻이 된다. 지소태후가 화랑을 두었음은 아버지의 뜻을 받드는 일이었다.

율령의 반포, 불교의 공인 외에 법흥왕은 다른 하나를 준비하였다. 그것이 화랑이었다. 소수림왕이 유교를 받아들여 태학을 세웠다면, 그래서 그것으로 나라의 기둥이 될 젊은이를 키우려 했다면, 법흥왕은 화랑을 내세웠다.

화랑은 신라 고유의 종교에 바탕을 둔다. 신라가 신라일 수 있었던 밑바탕, 중국의 유교를 가르치지 않고 신라 고유의 정신으로 무장시키는 교육제도인 화랑이다. 소수림왕을 따르면서도 소수림왕과는 다른 법흥왕의 생각이었다.

  • 발행일2010. 10. 24.

관련 이미지4

전체보기

출처

출처 도움말
확장영역 접기
  • 고운기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글쓴이 고운기는 삼국유사를 연구하여 이를 인문교양서로 펴내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 필생의 작업으로 [스토리텔링 삼국유사] 시리즈를 계획했는데, 최근 그 첫 권으로 [도쿠가와가 사랑한 책]을 펴냈다. 이를 통해 고대의 인문 사상 역사를 아우르는 문화사를 쓰려한다.

  • 그림
    장선환 화가, 일러스트레이터

    서울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학과와 동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화가와 그림책 작가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현재 경희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https://blog.naver.com/fartzzang

접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