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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돌과 술 한잔 : 알파고 그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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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돌과 술 한잔 여성중앙 알파고 그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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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고와의 마지막 대국을 마친 후 이세돌 9단은 경기가 열렸던 호텔 뒤편의 일식집에서 자정이 넘도록 술을 마셨다. 술자리에 유일하게 동행한 기자의 취재 뒷이야기.

바둑 담당 기자를 하며 이세돌 9단이 세계 대회에 참가할 때 여러 번 동행 취재를 한 적이 있다. 이번에도 ‘구글 딥마인드 챌린지 매치’의 첫 대국부터 마지막 대국까지 모든 현장을 취재해야 하는 미션이 주어졌다. 15일 전체 일정이 다 끝난 뒤 이세돌 9단과 그의 형인 이상훈씨와 밤 늦게까지 술잔을 기울이며 이번 대결에 대한 소회를 나누었다. ‘구글 딥마인드 챌린지 매치’ 최종국이 열린 3월 15일. 1승 4패로 대결을 마무리한 이세돌 9단은 몹시 아쉬운 표정이었다. 그는 “이번에는 내가 주인공이 아닌 것 같다. 너무 아쉽지만 감사하고 죄송했다”고 말하며 자리를 떴다. 기자는 이 9단을 따로 인터뷰하기 위해 황급히 그의 뒤를 쫓았다. 하지만 그는 이미 호텔을 빠져나간 뒤였다. 이세돌 9단의 개인 번호로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았다. 순간 ‘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5국 심판을 맡은 이다혜 4단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4단과 기자는 함께 술을 마시며 연애 고민을 털어놓는 사이다. 하지만 이날만큼은 정색하고 “인터뷰를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이 9단의 부인 김현진씨와 친한 이다혜 4단은 먼저 김씨에게 인터뷰 의사를 물어보겠다고 했다. 답을 기다리며 이세돌 9단에게 수차례 장문의 문자를 보냈다. 그만큼 초조했기에 마음을 달래기 위해선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때 이 9단에게서 전화가 왔다. 번개처럼 받자 이 9단이 “미안하다. 술자리라 전화를 못 받았다”고 했다. 잠시 인터뷰가 가능하냐고 묻자 “술 취해서 어려울 거 같다”고 했다.

“나도 같이 마시면 되지 않느냐, 아니면 혼자 술을 마시면서 호텔 로비에서 기다리겠다”고 하자 이 9단이 웃으며 “그럼 여기로 와라. 같이 마시자”고 답했다. 부리나케 달려간 곳은 호텔 뒤편에 있는 일식집. 이세돌 9단과 형 이상훈 9단, 이상훈 9단의 친구가 자리해 있었다. 분위기는 침울했다. 이상훈 9단은 “너니까 한 판이라도 이긴 것”이라며 동생을 위로했다. 이 9단은 형의 말을 부정하며 “버그 때문에 한 판 이긴 거 아니냐. 부끄럽다”를 연발했다.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으로 5국을 복기하며 계속 자신의 실수를 자책했다. 그 와중에도 이세돌 9단의 휴대폰으로 수십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이 9단은 계속 전화가 오자 휴대폰을 한쪽 옆으로 치우며 기보도 볼 수 없다고 투덜거렸다. 분위기가 점점 무르익었다. 침울하던 이세돌 9단도 술이 들어가니 기분이 좋아졌다. 이 9단의 딸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 갔다. 기자가 지켜본 이세돌 9단은 딸의 행동 하나하나에 눈을 떼지 못하는 ‘딸바보’ 그 자체였다. 첫 대국을 하루 앞둔 8일 서울 광화문 포시즌스 호텔에서 열린 디너 갈라 쇼에서 이세돌 9단은 부인 김현진씨와 딸 혜림 양의 손을 잡고 나타났다. 이 9단은 대회 관계자와 인사를 나누면서도 중간중간 딸과 장난을 치기 바빴다.

마지막 대국이 열리는 15일에도 이 9단은 대국장에 들어가기 전까지 딸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기자가 ‘딸바보’라고 놀리자 이 9단은 “맞다. 내가 대표적인 ‘딸바보’다. 가끔 딸의 교육을 위해 내가 엄하게 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런데 막상 딸 얼굴을 보면 마음이 그냥 녹아버린다”고 말하며 웃었다. 이어 가족에 대한 미안한 감정도 표했다. 이세돌 9단은 “아내와 딸에게 미안하다. 오랜만에 봤는데 내가 신경을 못 써줬다(이 9단의 부인과 딸은 현재 딸의 유학 때문에 캐나다에 머무르고 있다). 대국을 앞두고 감정이 흔들릴까 봐 혜림이와 제대로 놀아주지도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술자리는 밤 12시가 넘어서야 마무리됐다. 마지막까지 이 9단은 이번 대회에 대한 아쉬움을 놓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 대회를 통해 이세돌 9단은 ‘인간’만이 보여줄 수 있는, 인간다운 매력의 최대치를 보여줬다.이 9단은 사실상 최종 승자가 결정된 뒤에도 포기하지 않았고, 5국에서는 불리할 줄 알면서도 “흑을 잡고 알파고를 이겨보겠다”고 했다. 단지 기계와의 대결에서 극적인 승리를 했다는 점뿐 아니라 끝까지 ‘미련’하게 도전하는 인간 이세돌의 모습에 대중이 열광하고 있다.

정아람(중앙일보 기자)
에디터
홍혜미
사진
중앙포토
디자인
이진미
발행2016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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