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제갈량이 북벌에 앞서 후방인 남만의 반란을 진압하여 후환을 없앤 전투. 제갈량은 이곳에서 북벌에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였다.

외국어 표기

南蠻征伐 ( 한자 )

시기

225년

장소

익주 ( 益州 ) 월수군 ( 越巂郡 ), 익주군 ( 益州郡 ), 장가군 ( 牂牁郡 )

유비(劉備)가 이릉대전에서 대패하고 백제성(白帝城)에서 숨을 거두자, 익주 남쪽의 월수(越巂), 익주(益州), 장가(牂牁), 영창(永昌) 4개 군이 촉()에 반기를 들었다. 이 지역은 유비가 익주를 차지하였을 때에도 반기를 들었는데, 건위태수 이엄(李嚴)이 진압하였다. 이후에도 익주군 호족 옹개(雍闓)가 태수 정앙(正昻)을 살해하였고, 월수군의 고정(高定)이 태수 초황(焦璜)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제갈량(諸葛亮)은 유비 사후, 체제를 안정시키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 사이에 옹개는 맹획(孟獲)을 회유하여 비한족들을 반란에 가담시켰다. 다만, 영창군의 여개(呂凱)만이 옹개군을 무찌르며 저항하였다. 제갈량은 이릉대전 이후 피폐해진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손권(孫權)과는 외교관계를 개선하여 다시 동맹을 맺었다.

전열을 재정비한 제갈량은 2253, 군사를 이끌고 남만정벌에 나섰다. 이회(李恢)는 익주군으로, 마충(馬忠)은 장가군으로 출정하였고, 월수군은 제갈량이 직접 토벌에 나섰다. 이회와 마충은 반란군을 제압하고 굴복시켰다. 한편, 제갈량이 월수군으로 진격하는 사이, 고정이 옹개를 죽이고 맹획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제갈량은 고정을 추격하여 격파하고 참수하였다. 이어 노수(瀘水)를 건너 맹획을 공격하자 그도 항복하였다.

제갈량이 맹획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내자 반란군에 가담했던 비한족들도 줄줄이 항복하였다. 남만을 평정한 제갈량은 맹획과 토착호족들의 통치권을 보장해 주었다. 이러한 소식이 퍼지자 남만의 모든 민족들이 촉에게 귀순하였다. 제갈량은 남만을 선의(善意)로 평정하여 그들의 신망을 쌓고, 나아가 북벌에 필요한 군사와 물자까지 조달하게 되어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두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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