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태의 요가로 세상 보기] 46. 산무키 무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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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2.01.16. 오전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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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무키 무드라는 요가의 핵심인 마음의 힘을 길러준다. 감각기관들을 내면으로 향하게 하고 혼잡한 마음을 가라앉힌다. 시연 배수진.


산무키(sanmukhi)는 사방·육방으로 눈을 돌려 전방위적으로 적의 동태를 살필 수 있는 여섯 개의 머리를 가진, 인도신화에서 전쟁신(神)의 이름으로 스칸다(skanda) 또는 카르티케야라고도 알려져 있다. 카르티케야는 인도신화에서 쉬바와 파르바티 사이에 태어난 아들로서 상반신은 코끼리 모양을 한 가네샤의 형으로 등장한다.

카르티케야는 전쟁신답게 양손에 칼과 활을 들고 모든 신들의 군졸들을 지휘 통솔하여, 세상의 질서와 정의·상식과 공정을 파괴하며 온갖 혼돈을 조장하고 분탕질을 일삼아 미래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아수라’ 그 자체를 격퇴시키는 강력한 위용을 갖추고 있는 신(神)으로 묘사되고 있다. 희망사항으로 오늘날 창궐하고 있는 역병의 격퇴도 담당했으면 좋으련만.

또 다른 이름은 요니(yoni) 무드라이다. 요니는 자궁(子宮)을 뜻한다.

이 무드라는 태초(太初)의 세계에 들고자 하는 수행자의 의지적 표현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수행자가 자기 자신의 내면을 응시함으로써 생명의 근원을 찾는다는 의미가 있다.

무드라(mudra)는 도장(印)·봉인(封印)·닫음·상징적인 언어 등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보통 결인(結印)으로 한역되어 불교와 요가에서 공히 사용되는 용어로 의식의 고정이나 의지의 외적 표현을 뜻한다. 눈짓, 손짓, 몸짓, 마음짓을 말하는 것으로 내면세계가 밖으로 드러나는 상태이거나 그렇게 되고자 하는 결의(結意)이다.

아사나와 비슷한 의미로 볼 수도 있겠으나 좀 더 고차원적인 정신이 외부로 표현된 형태로 보인다. 하타요가에서 무드라는 아사나보다 더 의도적으로 생명에너지를 통제하는 특수한 형태의 체위법이라 할 수 있다. 하타요가의 경전인 게란다 상히타에서는 25여 가지의 무드라를 소개하고 있다.

무드라는 신(神)과 수행자 사이의 관계를 꼭꼭 결합시키고 봉인하기 때문에 신들을 ‘기쁘게 한다’는 의미도 있다. 편한 자세로 앉아 숨을 깊게 들이쉰 후 양 새끼손가락은 입술 위에, 양 인지는 코를, 양 중지와 검지는 눈을, 양 엄지는 귀를 막은 채 숨을 들이쉰 후 참을 수 있을 만큼 참는다. 숨을 들이킨 후 지식(止息)하는 호흡인 안타르쿰박(antar kumbhaka)을 한 후, 천천히 손가락을 떼며 입은 다문 채 코로 숨을 내쉬는 무드라 행법이다.

처음엔 3~5분 정도 하다가 점차적으로 시간을 늘려 간다. 고요한 이른 아침이나 늦은 밤에 수련하면 더 좋다. 일반적으로는 본격적인 요가 수련에 들어가기 전에 뇌파를 떨어뜨리고 의식을 모으는 방법으로 활용되어도 좋다. 강박증·우울증 등이 있을 시 이 자세는 자제한다.

이 자세는 감각기관들을 내면으로 향하게 하고 혼잡한 마음을 가라앉힌다. 수행자로 하여금 감각 기능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고, 과도하게 욕망을 추구하는 것을 억제하게 하는, 요가수트라 아스탕가 요가 다섯 번째 단계 즉 프라티야하라(pratyahara)에 해당된다. 자신 안에 내재한 신성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하는 무드라인데, 처음엔 아무 소리가 없거나 뒤범벅된 여러 소음만 느껴지다가 수행에 의하여 차츰 피안의 저쪽 너머에서 들려오는 아스라한 소리를 듣게 될 수도 있다.

요가 경전에서는 숨이 움직이면 마음도 움직인다 하였다. 즉 숨을 통제한다는 것은 마음을 통제한다는 것이다. 산무키 무드라는 요가의 핵심인 마음의 힘을 길러준다.

그 밖에도 손동작으로서 엄지와 검지끼리 맞대어 요니(yoni) 모양을 만들고 나머지 손가락은 깍지를 끼는 수인(手印) 무드라의 일종을 요니 무드라라고 일컫기도 한다. 정좌 후 명상 중에 몸과 마음을 고정시키고 집중력과 지각능력을 계발하여 에너지 균형을 찾게 하는 데 특히 효과적인 수인 무드라이다.

사찰이나 교회 성당 등에서도 다양하고 상징적인 손 표현법을 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불상에서 보여주는 다양한 손 동작과 인도의 신상(神像)들에서 나타나고 있는 손 모양은 비밀스럽고 은유적이며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또 다른 언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언어를 초월한 내면의 소리, 본연의 진리 말씀이 시공간을 초월하여 전승되어 온 것으로 그러한 침묵의 언어를 손 모양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이런 무드라는 인간의 영적인 치유와 진화에도 상당한 기여를 했다고 볼 수 있다.

일상에서도 간절히 기도할 때에는 두 손을 합장한다던지 오랫만에 반가운 벗을 만나면 절로 손을 꼭 잡게 되고, 연인들끼리는 한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듯이 손깍지를 끼고 걷기도 한다. 분노할 때에는 절로 주먹이 불끈 쥐어지기도 한다.

언어가 끊어진 자리에 언어 이상의 뜻을 나타내는 의사 표시의 수단이다. 이런 것들은 우리의 마음 작용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본다. 이런 자연스런 표현의 형태를 무드라라고 한다.

무드라는 손과 눈, 몸을 움직이면서 무언의 드라마를 완전히 춤으로 표현하는 인도의 카탁, 쿠티야탐, 카타칼리, 바라타나티얌, 모히니야탐, 마니푸리 등의 춤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무드라의 대가인 잉그리드 본위뜨는 무드라에 대해 “손은 중요한 상징적 언어들을 전해주는 수단이다. 동양에서는 오늘날에도 그런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인도의 춤꾼들은 손으로 우주의 생명력을 표현해 낸다. 손짓을 통한 춤, 언어의 풍부한 상징성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으로 인해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효과적으로 마음을 표현해 주기 때문이다. 무드라의 영적인 의미는 인도 문화 속에 잘 표현되어 있다. 힌두 문화와 불교 문화 속에 묘사된 신들의 제스처는 각각의 역할을 상징하거나 특수한 신화적 사건들을 이야기 해준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요가 수행자(요기, 요기니, 요긴)가 외부의 감각에 귀를 기울이게 되면, 꿀을 찾아 이 꽃 저 꽃 기웃거리는 벌과 나비처럼 부산해지고 들뜨게 된다. 요기가 참 나(眞我)를 찾기 위한 노력은 이런 것에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 외부감각의 문을 차단하려는 노력이 뒤따르게 되는데, 이것이 요가수트라의 8단계 요가 중 다섯 번째 해당되는 오감(五感)을 다스리는 제감법 즉 프라티야하라이다. 프라티야하라의 뜻은 ‘되돌려 본다’인데 본래의 마음 즉 참된 자기와의 직관적 연결을 맺으려는 시도이다.

게오르그 호이에르슈타인은 “인간에게는 의식의 내부에 외부 영향을 차단하는 고유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외부의 영향을 매일 잠을 자면서 차단하고 있고, 모든 지각을 유지하면서도 의지력으로 그렇게 하는 방법을 배울 수도 있다. 우리는 외부의 자극에 방해받지 않고 의도적으로 의식 상태에 머무는 법을 모르긴 하지만, 깊은 내면의 세계에서는 그 능력을 회복하기를 갈망한다. 요가에서 이 수행은 보통 감각에서 벗어나기, 또는 감각억제라는 의미의 프라티야하라라고 한다”고 그의 저서 ‘요가의 세계’에서 설명하고 있다.

일상에서 순간의 감정에 의해 큰 실수나 범죄를 범하는 것을 생각할 때 요가의 수행은 물론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감정의 통제, 제어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 할 것이다.

제감법은 이리저리 날뛰는 마음을 상징하는, 마차를 길들이지 않는 말을 조정하는 것에 비유되기도 한다. 참 자아를 마차의 주인, 육체를 마차, 지성을 마부, 마음을 고삐, 감각기관을 말로 비유하여 참 자아(眞我)는 이렇게 육체와 감각기관과 마음이 한곳에 모인 마차 안에 앉아서 즐기는 자이다.

서사시 마하바라타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참 자아는 결합되지 않고, 이리저리 흩어진 감각들로는 인식할 수 없으며, 준비되지 않는 자의 감각기관으로는 자아를 제어할 수 없다”고.

물질세계는 환영(幻影)과 같고 감각을 자극하는 육체적인 쾌락은 변덕스럽고도 도취적이어서 끝없는 갈증을 느끼게 한다.

바가바드기타에서는 “강한 바람으로 물 위에 떠 있는 배가 흔들리듯이 배회하는 감각들 중에서 단 하나에도 마음을 뺏기면 우리의 지혜는 멀리 사라지느니라”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감각을 통제하는 제감법의 수련이 더 필요한 이유이다. 제반 무드라의 행법들을 통한 제감법 수행은 인간의 감각기능 중에서 선천적 중추인, 소위 육감 본능을 지배하는(선지자들은 21세기를 ‘간뇌의 시대’라고 했을 정도인데, 대뇌 반구와 중간 뇌 사이에 있으며 내장과 혈관의 활동을 조절하고 자율신경을 관리하는 기관인) 간뇌(間腦)의 개발에도 효과적이다. 간뇌는 ‘영성(靈性)의 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간뇌의 뒤쪽에는 송과선이, 시상하부 아래에는 뇌하수체가 붙어 있다.

무드라는 밀교(密敎)에서는 스승과 제자 사이에 무언의 대화 내용을 나타내는 일종의 상징적 표식으로도 중요하다. 깨달음을 완성한 성자(聖者) 틸로빠가 자신의 깊은 체험과 절실한 구도 과정을 통해 깨우친 지혜를 그의 제자 니로빠에게 노래로 들려주는 형태의 진리를 상징하는 ‘마하무드라의 노래’도 널리 알려져 있다.

하타요가 경전인 게란다 상히타(4,14-16)에서는 “네 다리를 껍질 속으로 거두어들인 거북이처럼 제감법에 의해 자신의 모든 욕망을 철저하게 거두어들인 사람은 마음이 고요해지고 마침내 자신 안에서 참 자아를 보게 된다. 또한 제감법의 덕택으로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충만하고 청정해져서 더 이상 요가 수행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대로 분별하는 자아가 된다”고 역설하고 있다.

적 중에서 가장 무서운 적은 자기 자신이라고 한다. 자기에게 애착하는 마음, 삶을 바라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마음, 돈과 권세와 사랑을 영유하고자 하는 마음, 요컨대 욕망에 의해 일어나는 미혹이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최대의 적이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자기에게 이기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승리자라고 할 것이다.

공자는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제자 안회에게 인(仁)에 대해 설명한 말로 인을 행하려면 자신의 인간적 약점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극기복례위인(克己復禮爲人)’을 강조했다.

이율곡도 그의 저서 격몽요결에서 “자신의 마음에 좋아하는 것이지만 객관적 진리나 이치에 합당하지 않음을 기라 여기고, 그것을 극복하여 진리와 이치에 합당하도록 힘을 기울이는 것”을 극기(克己)라 했다.

다산 정약용은 “인간의 마음에는 두 가지가 있다. 도심(道心)과 인심(人心)이다’라고 전제하고 “인심은 위태롭고 미약하여 주인과 손님의 처지이니 위태한 것은 언제나 강하고, 미약한 것은 언제나 약한 것이니 공격하지 않으면 어떻게 굴복시키며 붙들지 않으면 어떻게 넓혀 가겠는가”라고 하여 위태한 인심을 공격하고 약한 도심을 넓혀서 크게 함이 ‘극기’라는 뜻으로 해석했다.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과 경쟁한다고 왕왕 생각한다. 물론 다른 사람과 경쟁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보다 더 많은 경우는 우리는 자신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다른 사람과 싸우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뿐이다. 일상을 되돌아보면 더욱 그렇다. 연초에 결심했던 금연, 금주, 다이어트를 위해 간헐적 단식하기, 체력 단련하기, 자기개발을 위해 외국어 익히기, 취미 생활로 악기 배우기, 일기 쓰기, 가계부 쓰기, 하루에 30분씩 명상하기 등등을 결심한다. 그러나 작심삼일이라고 한두 달을 못 넘기고 그만 흐지부지 포기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걸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애써 이런저런 핑곗거리, 합리화 구실을 찾으며 자신에게 관대해진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엔 그러한 사소한 패배의 경험에 익숙해지면서 자신을 통제하고 극복하지 못한 데에 대해, 자신과의 약속, 자신과의 의지와 다짐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면서 자포자기하게 되는 경우도 생긴다.

“싸움에 있어서는 한 사람이 천 사람을 이길 수도 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이기는 자야말로 가장 위대한 승리자다.” 석가의 말씀이다. 역시 석가께서 수행자 시절 “패배하면서 사느니 차라리 싸우다 죽겠다”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자신을 핍박하는 악마나 사람들과의 싸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과의 싸움에 모든 것을 걸고 있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재물과 권력욕, 명예욕, 애욕 등의 과다한 욕심에 약해지고 또한 유혹에 흔들릴 때나 국가의 안위가 염려될 때 우리는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해 주옵소서”의 통성기도가 절로 나온다.

야고보서의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라는 말씀을 되새긴다.

우리가 승리자가 되는 것은 사람을 이겨서 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을 이기기 때문에 승리자가 되는 것임을. 이는 진정으로 스스로의 주인으로서 당당하게 살아가고 싶기 때문이다.

산무키라는 전쟁신의 이름처럼 우리는 매일매일 외부와 또는 자신과 치열한 전쟁을 하고 있는 모습을 돌아보게 된다. 이러한 감각의 통제에 의해 자신을 이기는 자는 외부 환경에 쉽게 흔들리지 않고 자기 자신의 삶의 주인공으로서 우뚝 설 수 있다.

자신을 이겨 얻을 수 있는 행복은 오직 다섯 감각들을 만족시킬 때 얻는 찰나적 기쁨과 희열에 비해 훨씬 큰 내면의 행복감과 성취감, 충족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자 있을까만, 문제는 그것이 그리 만만하고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데 있다. 생활하다 보면 오감의 만족을 위해, 마음의 수다스러움과 혼돈과 번잡함 때문에 감동할 만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을, 오붓하게 희열의 시간들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을 방해받고 놓쳤다는 때늦은 후회가 들 때가 어디 한두 번이었을까.

선지자들은 힘주어 말한다. “만일 당신이 자신의 마음과 감각들로부터 자유롭다면 아무것도 당신을 속박할 수 없다. 그런 당신은 정말로 자유롭다. 심지어 제왕의 권력도, 독재자의 힘도 당신을 절대로 속박할 수 없다. 당신은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당신은 완전한 자유인이다”라고.

수도승들은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을 ‘자신의 눈꺼풀’이라 한다. 그럼 세상에서 가장 이기기 어려운 것은? 자신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가 아닐까? 그렇다면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는? 가슴과 머리 사이라 한다. 머리와 가슴 사이가 때론 그렇게 가깝다가도 때론 또 그렇게 멀게만 느껴지는 걸 생활하면서 얼마나 많이 경험했던 일인가?

그러나 오늘도 넘어지고 깨어지고라도 또 그 길을 향해 나아가야만 함을, 고지가 바로 저기이기에.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성공한 소소한 경험들을 하나하나 차곡차곡 소중히 담아가면서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는 데 인간의 위대성이 있음을 가슴속에 봉인(封印·무드라)해 본다.

“선지자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은총은 바로 자신을 이길 수 있는 힘이다”라는 성 프란체스코의 말씀을 되새겨 본다. 매일 하는 노력 이상 자기 자신을 이길 수 있는 건 없다고 하지 않던가.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결국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는 니체의 말처럼 자, 지금부터 극기복례(克己復禮)다! 새해 다짐을 벌써 그만두거나 포기했다면 다시 시작해 보는 것은 어떠하리오. 아무리 아니라고 애써 손사래 쳐도 역시 살아간다는 건 내·외부로 모두가 전쟁 아니겠소?

전쟁의 신을 표방하는 무드라라는 ‘산무키 무드라’ 행법을 취하며 온갖 잡스러움과 나약함과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사악함과 거짓과 위선과 그리고 정의롭지 못한 숱한 달콤한 유혹들과의 전쟁을 결코 마다하지 않겠다는 전의(戰意)를 굳게 다져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 산무키 무드라 / 최진태 ]

나를 딛고서/ 나를 찾는 행법이/ 무드라라네//

산무키라는/ 전쟁신 이름답게/ 한바탕 전쟁//

외부는 물론/ 내부 숱한 적들과/ 살벌한 혈투//

오감 억제코/ 안으로 침잠하여/ 본성(本性)을 찾는//

길고도 험한/ 때론 쉽고도 쉬운/ 마음의 통로//

듣게 되는날/ 자신안에 내재한/ 신성한 소리//

태초의 세계/ 생명의 근원속에/ 나를 눕힌다//

날뛰는 명마/ 유순하게 길들여/ 천리를 간다//

자신을 이김/ 무엇보다 최고의/ 승리자라네//

21세기는/ 간뇌의 시대란다/ 영성(靈性)의 보고(寶庫)//

무드라 행법/ 간뇌를 깨우리라/ 피안을 향해



최진태 부산요가지도자교육센터(부산요가명상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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